붉은 못 45화 - 몽중몽(夢中夢)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비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옆에 앉은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비사가 지난 시간을 되짚는 동안 이시스는 여전히 이스터에게 종알거리고 있었고 이스터는 쌍익에 딱 들어맞게 씌워진 가죽 집을 보며 나름 만족을 하고 있었다.
"비사."
멍하니 앉아 있던 비사의 눈초리가 변함에 이시스는 괜스레 긴장감이 들었다.
"뭐야. 뭐야. 왜 그래. 뭐 있어?"
비사는 이들의 움직임과 함께 다른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살기 하나 없으나 지난밤부터 거슬리게 주변을 맴돌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자인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레이너스를 떠올렸으나 다른 자였다. 아주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다 해도 매시간을 경계로 살아온 비사가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못 알아챌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의도는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감시.'
지시한 자는 가주인 카일러스일 것이다. 적인의 기운을 느낀 탓인지 아니면, 칼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 자신을 경계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쾌한 것도 없었다. 가주라면 자신의 가인들을 지키고자 무슨 짓이든 해야 하니, 오히려 아무 방비 없이 자신을 집안에 들였던 제닐과 세이가 위험한 것이 아닌가.
"쥐? 쥐라도 있어?"
비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유, 뭐야 놀랬잖아."
다 잊은 듯해도 이시스도 이스터도 몸에 밴 두려움이 있었다. 이시스는 괜히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갈 거야? 아렌스로? 아니면 청...뭐 거기 마을?"
이시스가 던진 말을 이스터가 급히 수습하였다.
"편하신 데로 머무셔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겨울이 지날 즈음 본가로 함께 가시는 것은 어떠한지요."
"나가라고 물은 소리는 아니야. 저택은 넓으니까."
이스터는 돌아갈 곳이 없느냐고는 차마 묻지 못하였다.
감시자가 있다.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있으니 묘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비사는 이제 이 질문에 답이 쉬워진 기분이었다.
"언젠가까지. 머문다."
"또 또 그 애매한 말투."
이시스가 툴툴거리기 시작하려 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이 열리며 들어선 것은 카일러스이었다.
"비사, 몸은 괜찮나."
그는 공무를 보다 온 것인지 제복 상의 단추를 대충 풀고 앉으며 다짜고짜 물어왔다.
"괜찮다."
"다행이군."
카일러스가 의자에 앉자 이스터가 잔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이스터는 바쁜 와중에 그가 갑자기 비사의 안부를 물으러 찾아온 것이 영 이상한 마음이었다. 감시자가 있으니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물으러 왔음에 비사의 눈이 빤히 카일러스를 향했다. 카일러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이른 아침, 감고 있던 비사의 눈이 반짝 뜨였다.
조금 거리를 두고서 방 밖에 머물고 있던 감시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쿵쾅거리는 발소리의 주인들을 피하는 듯하였다. 지나가리라 여겼던 발소리가 방문 앞에서 멈추더니 한참 소음을 내고 있었다. 비사는 결국 몸을 세워 앉았다. 귀찮은 일의 예감이었다. 문 한 번 두드리지 않고 비사가 머무는 객실이 벌컥 열렸다. 방문을 들어서자마자 내밀어지는 칼끝이 비사를 향했다.
"싸우자!"
사람이 오는 것이야 알고 있었으나 자다 봉창 두드리는 것마냥 낯선 이의 뜬금없는 외침이었다. 칼이 나왔다고는 하나 살기는커녕 말만 바꾸면 놀자고 들릴 말이었다. 비사는 그저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왔다.
"일어나! 칼 잡아! 나랑 싸우자고!"
구불구불한 머리에 햇빛에 잘 그슬린 피부를 가진 남자 옷을 입기야 하였으나 여성이었다.
"테미! 초면에 반말은 좀..."
그 뒤로 당황한 듯이 키가 작은 소년과 또 다른 소년이 옆으로 쑥 들어섰다.
"이 멍청아, 아 진짜 하지 말라고."
"아 왜! 카일러스님이...!"
폴레스와 디엣이 당황하며 테미의 입을 막으며 잡아끌었다.
"죄송합니다."
폴레스가 급히 비사에게 인사를 하며 방문을 닫았다. 비사의 멍한 고개가 앞으로 돌아왔다. 잠시나마 머물기로 한 것이 과연 잘한 생각일까. 왠지 다시 한 번 고려가 필요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비사의 방문 앞에 몸을 수그린 세 사람은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른 데도 아니고 저택의 복도였으니 저절로 자세가 낮추어지고 있었다.
"카일러스님이 이기면 진급시켜 주신다 그랬잖아! 다른 수련생이 오기 전에 먼저 싸워야지!"
"아오 진짜. 그렇다고 아침부터 방문 벌컥 열고 들어가서 칼부터 들이대냐. 여긴 기사관저가 아니라 저택이라고! 다들 알면서도 여긴 안 들어온단 말이야. 너 귀족 집 가시네 맞냐?"
"응하지 않는 싸움은 무효라 하셨으니 칼부터 들이대는 것도 좀..."
잔소리를 듣더니 테미의 미간이 좁아졌다.
"싸웁시다. 라고 할 걸 그랬나. 그래도 뭐, 나는 귀족이고 나이도 엇비슷해 보이는데 뭐 어때."
"거기만 문제가 아니지. 처음부터 틀렸잖아. 저쪽 신분은 몰라도 일단 저택 객실에 머물고 있다고. 멍청아."
"아니, 그래도 카일러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거면 저 검은 머리 계집...아니, 저 숙녀분도... 아 진짜 뭐라 해야 하는 거야. 하여간 저 체스판 같은 낯짝도 들은 게 있을 것 아냐."
"없다."
"...!"
세 사람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방문을 언제 다시 열고 서 있던 것인지 세 사람이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카일러스님께서 아무 말도 안 하셨단 말이야?"
테미가 벌떡 일어나더니 물었다.
"그렇다."
테미가 비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하자 비사가 발걸음을 돌려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야! 아니, 저기요! 이 봐!"
테미가 소리를 지르자 디엣이 이마를 짚었다.
"한 번만 싸워줘!"
비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가버렸다.
"테미."
"엉."
"창피해."
"아 뭐가 또 창피해. 쟤도 반말 쓰잖아!"
"그냥 다 창피해. 구걸해서 이기면 무얼 할 건데. 남작께서 우리 바보 딸을 잘 부탁한다고 간곡히 부탁만 안 하셨어도 이 고생은 안 할 텐데."
"아 하지 마라니까! 왜 쫓아와 그러니까."
아침나절부터 칼자루 챙겨 들고 웬만해서는 어려워 발길도 하지 않는 저택으로 뛰어들어가니 아니 쫓아올 수가 있으련가.
"어휴. 뭔 짓을 할지 알 수가 있어야지."
"웃지 마! 폴레스!"
괜히 별말 없이 지켜보던 폴레스에게까지 성질을 부리는 테미였다. 작게 또각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긴 숄을 걸친 이스터였다. 그 옆으로 눈을 비비고선 이시스가 이들을 향해 걸어왔다. 비사의 객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더니 이스터가 물었다.
"무슨 일로 저택의 객실 앞에서 소란을 피우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고상한 목소리의 질문에 디엣이 대답하였다.
"카일러스님께서 이 방에 묵으시는 숙녀분을 이긴 수련생에게 진급을 시켜 주시겠다 하셨기에... 죄송합니다."
어젯밤 카일러스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린 듯하더니 안부를 묻기도 전에 일을 벌여 놓은 것이 분명했다. 편히 쉬게 두면 좋을 것을. 이미 갚지도 못할 신세를 진 이스터로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다 한들, 이러한 행동은 상당히 무례하군요."
"죄송합니다."
세 사람이 눈치를 봐가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좀 급해서요.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이기고 싶었거든요. 죄송합니다."
테미가 너털대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비사를 이겨야 진급? 그럼 무리네. 무리."
이제 잠이 깨는지 말참견을 시작한 이시스의 말에 테미가 눈이 휙하고 돌아왔다. 그 표정을 보더니 이시스가 당연한 걸 모른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수련생이 비사를 이길 리가 없으니까. 오라버니는 수련생 기합이라도 주실 생각인가."
"호오. 너 꼬맹이 네가 보기엔 그 비산지 뭔지 하는 자가 나보다 강할 것이라 이 말이 하고 싶은 것이지."
테미는 자신의 실력도 모르면서 입을 나불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련생주제에 가주의 누이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예도 모르나 보군. 그쪽은 비사를 절대로 못 이길걸. 절대로."
꼬맹이라는 말에 울컥한 이시스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요게!"
딱하는 소리와 함께 이시스의 이마를 향해 테미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얏!"
"못 이기긴 왜 못 이겨."
"못 이겨! 못 이긴다구!"
버럭버럭에 조잘조잘로 말대꾸가 이어졌다.
"으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디엣과 폴레스가 테미의 머리를 누르며 급히 사죄의 말을 반복했다. 디엣과 폴레스는 평민이었으니 아직 어리다 하여도 이시스가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 속도 모르고 기세등등한 테미를 뒤로하고 당황한 두 사람을 위하여 이스터가 말을 꺼냈다.
"넘어가도록 하지요."
"언니!"
"것 보라지. 네 편은 없나 보다?"
테미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하지만, 상대가 아이라 하여 쉬이 손찌검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인 것 같군요. 검을 들어야 할 손이 가벼워서는 아니 되지요."
이스터의 말에 테미의 기가 살짝 눌리었다. 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테미를 흘겨보았다. 보자 보자 하니 이 자그마한 것이 자꾸만 성질을 긁고 있었다.
"안 우십니까? 꼬마 귀족 나으리? 나도 남작 가의 여식이라 이거야. 같은 귀족끼리 너무 그러지 말지?"
"기사단에 입단한 이상 단의 법도를 따라야지. 어디 단주의 가족을 함부로 할 셈이야! 그리고 어디 남작이 공작을 이기려 들어!"
"뭐가 어째?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거야?"
"공작이 훠얼씬 높은 건 사실이지!"
이시스가 벌게진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테미를 향해 말했다. 울어도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이시스의 작은 자존심도 꺾어지기는 싫은 모양이었으니 말이다.
"흥! 내 그런 것에 기죽을 냥이면 처음부터 입단도 안 했어. 이게 어디서 유세야. 네가 단장이야? 네 오라비가 단장이지. 일러라. 가서 일러. 일러."
제 오라비 성미를 모를 이시스가 아니었다. 어디 하나 부러진 것도 아니고 이마 한 대 맞았다고 하면 들은 척도 안 할 것이 뻔하였다. 허나, 어디서 맞아 본 적 없는 자신을 건드렸으니 어떻게든 복수를 해주어야 했다.
"좋아. 나도 치사하게 오라버니에게 이르지는 않겠어. 비사를 이기지 못하면, 내가 보는 앞에서 비사에게 한 대 맞아야 해."
"좋습니다. 다섯 대든 열 대든 맞아 드리지요. 그럼, 내가 이기면 꼬맹이라는 이름을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존댓말을 듣는 것은 지금뿐일 겁니다. 작은 숙녀님."
"비사한테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쬐끄만 숙녀분 보는 앞에서 그 손님을 울려 드리겠어요."
"왓하하. 그 비사가 울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살려달라고 빌지나 말라고. 비사한테 그냥 폭싹 두들겨 맞고 울지나 말지?"
끝까지 한마디를 지지 않는 이시스였다. 남은 사람들은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뭐라 말을 더 붙이려는 테미를 질질 끌고서 연신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나가는 디엣과 폴레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넌 뭐 애를 그렇게 진심으로 상대하고 그래. 밉보이면 어찌할 거야. 이스터님이 너그러우신 편이라 다행이지."
"애면 뭐! 애라고 봐주면 기어오른다고! 딱 밤 때렸다고 뭐 이르면 어찌할 건데 쪼잔하게. 내 기필코 저 꼬맹이를 사람들 많은 데서 버릇없는 꼬맹이라고 열 번은 불러주겠어! 난 안 약해. 안 약하다고!"
"계집애가 몸만 컸지. 머릿속 나이대가 똑같아. 이러니 말싸움이 되지. 그래 그 검은 눈하고 싸우기 전에 애랑 싸워서 어쩔 건데. 목적이 바뀌고 있잖아. 멍청아."
"아 몰라! 다 이길 거야! 난 해보기도 전에 안된다고 하는 게 제일 짜증 난다고!"
테미는 진다, 안된다 하는 말이 가장 듣기가 싫었던 말이었으니 오기가 돋고 있었다. 두 사람을 뿌리치고서는 씩씩거리며 앞서 나갔다.
"아오, 저쪽 애나 이쪽 애나 한 마디 져주지를 않네. 누구라도 좋으니 이스터님 반만 닮아도 좋겠네."
디엣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폴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폴레스. 이런 걸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움... 여자의 적은 여자?"
디엣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여자는 무슨 다 애들이지. 밉상의 천적은 결국 밉상이라는 거야. 우리 예쁜 웨이린이랑 친구만 아니었어도, 내가 같은 마을 출신만 아니었어도 한 대 때려주는 건데. 으아! 웨이린이 보고 싶다! 젠장 이쯤 되니 나도 그 손님 쪽이 이겨서 테미 한 대 콱 때려 주라고 하고 싶네."
디엣이 짜증이 났는지 머리를 박박 긁으며 말을 뱉었다.
이시스는 쾅쾅거리며 달려와 침대로 풀썩 달려들더니 분이 안 풀리는지 손톱을 세우고 침대보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열 받아! 짜증 나! 언니는 뭐라고 더 해줬어야지. 우릴 우습게 보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이시스를 우습게 보는 것이었다.
"너도 잘한 것이 없지."
"내가 뭘! 비사가 이길 게 뻔한데!"
"뻔하더라도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비아냥은 아니 되지."
"누구 편이야! 그럼 언니는 비사가 지길 바래?"
"그런 말이 아니잖니."
지금은 이시스보다도 비사가 걱정이었다.
"대체 오라버니는 왜 그런 말씀을..."
"몰라! 이렇게 된 이상 난 비사 편이야! 대보나 안 대보나 뻔한 싸움! 어차피 이길 거면 실컷 패주라고 할 거야!"
이시스는 천을 흐트러트리며 분을 못 이겨 한참을 더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뭐가 되었건 가장 난감해하는 사람은 당연히 당사자인 비사였다. 건물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시선이야 이런저런 이유로 언제나 받고 있었으나 이 분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진급이 급하다곤 해도 여자와 싸워서 이기라니. 무슨 생각이신 거야."
"뭐든 좋으니 기회야. 빨래에 청소에 막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잖아."
"테미보다도 체구가 작은데?"
"수련생만 벌써 4년 째야. 뭐든 좋으니 난 할 거야."
여기저기서 속닥거리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소년 몇이 비사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물어왔다.
"검을 겨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테미 같은 막무가내가 아닌 이상 상대가 저택에 머무는 손님이니 어느 정도는 예를 갖추고 있었다. 한 이가 말을 꺼내자 흩어져 웅성거리던 자들까지 슬금슬금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그자,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분명히 이 저택 어딘가에서 어젯밤처럼 웃고 있을 것이었다.
- 작가의말
몰아치던 도과에서 분위기를 바꾸며 풀어 볼 예정입니다.
부디 즐겁게 읽히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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