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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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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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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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02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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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못 68화 - 물음

DUMMY

사람은 둘이나 가건만 그 아래 다리까지 둘이라 숲을 빠져나와 반가운 것은 드디어 기다리던 평평한 바닥이었다.

디피스가 온몸으로 쏟아내는 지친 소리가 벌판을 채우고 있었다. 멀리 보던 길이 앞에 다가옴이나 그래도 그의 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을 쫓았다. 지웨이의 가느다란 숨소리, 무덤숲에서 예까지 들리지 않을 칼 소리 그 너머 초조함의 소리까지, 처음에는 주머니가 가득하였는가 했더니 줄줄 흘리고 다닌 기분이었다. 해도, 갈 길은 가야 하는 법이니 뒤만 돌아볼 수도 없어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이놈의 웬수 같은 비는 참 잘도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낮은 돌부리에도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웠다. 땀과 빗물이 엉켜 낯짝을 연신 덮어대니 짜증스럽게 그것을 손으로 털어내었다.


촤아아악.

무언가 젖은 바닥을 긁으며 흙물을 튀겼다.

디피스는 놀라 한 발 뒤로 몸을 밀었다. 사방팔방 물 튀기고 나타난 것은 나약한 달빛에도 알 법한 희게 빛나는 얼굴의 비사였다. 얼굴을 보니 고민 하나가 덜려져 저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숨을 내쉬는 가슴의 세찬 들썩거림이 눈에 들어왔다.

'굴에서 나온 내내 가쁜 기색이 없더니 이 아가씨, 정말 숨도 돌리지 않고 뛰었구나.'

몸에 걸린 과부하를 참으며 달려왔으리라. 디피스에게는 비사 역시 자신만큼이나 지쳐 보였다. 목 언저리에 피가 얇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이 어린 목을 타는 빗물에 붉은 것이 엉켜 번져감을 보니 먼저 빠져나온 자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은 입 나불거릴 힘도 아끼며 다시 움직였다.

디피스가 휘우듬하자 비사가 재빨리 그의 가슴 앞으로 팔을 뻗었다. 곧이어 얄따란 손목이 다리 풀린 이의 등짐을 옮겨 가려 하니 디피스가 재빨리 몸을 세웠다.

"비사양도 지친 거 압니다."

어둠 속에서 잘 뵈지도 않은 검은 동자 두 개가 디피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빠르다."

네 자존심은 알 바 없다는 저 말투. 짧고도 단조로운 목소리. 더 뭐라 말하겠는가. 저보다 낫다고 말하는 데 할 말이 없었다. 비사 역시 기다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냅다 내디뎠다. 숨까지 씨근대며 진기를 아꼈으니 죄다 써버릴 냥으로 다리에 밀어 넣었다.


"저걸, 뛴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나..."

저공비행 하는 매를 보는 기분이었다. 비사의 뒤를 따라잡기 위해 그도 다시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이를 악물고 지면을 밟았다.


성문에 다다르자 비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멈추었고 이어 디피스가 한발 늦게 도착하자마자 성문 근처의 병사 한 명을 붙들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당장 성내 귀빈실에 계신 숀님을 신전으로 모셔와."

"뭐요? 귀빈실 손님? 댁은 누구길래...!"

"케인레스 기사단의 기사 디피스다. 무조건 데려와! 자고 있던 뭘 하든 무조건 끌고 와! 알았나! 안 그러면 네놈의 뒤는 없을 줄 알아라."

병사는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휘몰았다. 디피스의 행색을 살핀 것이었다. 로브 틈으로 보이는 검 손잡이와 함께 먼저 도착해 있던 소문의 소녀로 보아 케인레스가의 사람이 맞을 것이리라 여겼기에 그는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네..넵."


이제 목적지는 신전이었다. 디피스가 길 안내를 맡았다. 성 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신전의 문장이 비사의 눈에도 들어왔다.

디피스는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고 곧 사제들이 줄을 지어 나타났다.

케인레스, 그 이름의 힘은 실로 대단하였다. 아무도 따져 묻지 않았다. 이 뒤는 비사도 경험한 바가 있었으니 이제 자신들은 더 할 일이 없었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흘러 내렸다.

갈색 머리 장정과 검은 머리 소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두 사람은 초면에 인사도 없었으나 지금은 사이 좋게 둥그런 나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빡빡하게 당겨졌던 근육도 잠시 느슨해졌고 폐부를 찢을 것 같던 괴로움도 잦아들었다. 이들의 몸에서 쏟아진 물이 바닥이고 탁자고 죄다 흙물 범벅을 만들어 놓았다. 평사제가 따뜻한 물과 얼굴을 닦을 천을 가져다 놓았다. 잠시 얻는 여유였다.



"숀님의 마차가 들어옵니다."

누군가 문밖에서 소리쳤다.

"숀."

비사가 일없이 그 이름을 짧게 되새겼다.

"좀 짜증 나는 인물이지만, 실력은 확실합니다."

"짜증."

디피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곧이어 이 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요란함과 함께 사람이 등장했다.

"나한테 물 튀기지 마!"

커다란 가방을 든 시종을 양옆으로 대동하고 들어선 이는 무언가 계속해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얀 천으로 신발에 튄 물까지 다 닦아내고서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비사와 눈이 마주치자 날랜 걸음으로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문의 죽은 눈이군. 이렇게 빛이 반짝이는 보석을 죽었다고 하다니 이 무지한 벌거지들 같으니. 이래서 몸만 쓰는 힘 꾼 나부랭이들은 감수성이 없..."

숀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비사의 눈이라도 만지려는 듯 향하자 디피스가 제재에 나섰다.

"기사단의 손님이시니 그 이상의 무례는 아니 됩니다. 급한 환자에게 먼저 관심을 두시겠습니까."

"무례한 것은 그쪽이지. 쉬다가 끌려 나와 주었잖아. 네가 좀 더 머리를 숙여야지. 그럼 환자를 고치고 나면 무례해도 되나? 응? 안 되나?"

넝마가 된 두 몰골을 보면 안에 있는 이가 사지를 헤맬 것을 짐작할 법한데도 자기 할 말 다하는 이였다. 비사는 긴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디피스가 말릴 새도 없이 차가운 서슬이 숀의 목에 닿았다. 이 자의 말은 비사에게 있어서 원활한 소통이 되는 단어들은 아니었으나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숀의 눈이 슬그머니 비사를 향했다.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칠흑이 말할 내용이야 숀도 디피스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해도 칼날 목에 붙인 사람치고 그는 그리 긴장감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좋아. 내가 저 환자를 보고 나면 레이디 그대는 나와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거야. 어때. 그 정도 사례정돈 있어야지."

"좋다."

"치워야 움직이지. 아가씨."

검이 다시 검실로 들어갔다. 숀은 비사의 손안에서 도는 익의 움직임을 고개까지 꺾어대며 구경을 하였다.

그는 웃으며 눈까지 찡긋하고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남 속 타는 것을 그리 괘념치 않는 확실히 좀 짜증 나는 인물이었다.

"사례는 다 챙겨 받으면서 뭘 더 받겠다는 건지. 실력이 과하게 좋다 보니 결국 아쉬운 이가 한 수 접어 들어가는 거지요. 괜찮으시겠어요. 저런 녀석과..."

"상관없다."

말도 없이 칼부터 꺼내 드는 것을 보니 차 마시려다 찻잔에 피나 채울 살인 나는 것 아닌가 할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디피스의 표정은 미묘하게 찡그린 듯 웃는 듯하였으나 곧바로 다시 기사의 얼굴로 돌아왔다.


"기사단으로 가야겠습니다."

숀 덕에 늘어난 수건을 정리하며 한 사제가 말을 건넸다.

"기사님, 오늘 케인레스가에서 싸움이 잦군요. 저 소년도 그런 거지요? 칼 쥔 사람들이 싸우니 험악하군요."

"기사단에서 싸움이 있었습니까."

"네, 숀님도 사실 많이 바쁘셨었어요."

디피스가 떨떠름한 한마디를 이었다.

"난장판이군."

디피스는 사제에게 신전 내에 성수가 얼마나 있는지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이것저것 묻더니 곧바로 밖을 향했다.


신전의 마차를 빌려 탄 비사와 디피스 두 사람이 기사단 입구에 닿았다. 가림막 아래에서 횃불들이 타고 있었으나 안은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두드려도 문이 열릴지는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비사는 사뿐히 닫힌 철문 위로 올라섰다. 저 소녀는 벌써 몸을 추슬렀는가 디피스는 그 행동이 아연하여 긴장 섞인 숨을 내쉬더니 곧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도 문을 넘어섰다. 비사만치 가볍지는 않지만 제법 성공적이었다. 못 넘었으면 체면이 영 말이 아닐 것이었다.


"비사님이다."

횃불들 사이로 내려온 비사를 알아본 이들이 입을 열었다. 자신을 향한 분위기가 나갈 때와 다름을 곧 눈치채었다. 시선이 저택의 불 켜진 창을 향했다.


"출병 준비한다."

디피스가 내려서자마자 소리쳤다. 디피스에게로 이목이 몰렸으나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아무도 안 움직이나! 낮 정찰조가 돌아오지 않았다. 신호탄 터진 것 본 사람도 없나! 뭐가 이렇게 엉망이야!"

이러니 신호탄 따위 쏘아 봤자였을 것이다 생각하니 그 역시 짜증이 솟구쳤다.


"소리 지르지 마라. 본가에서 왔다고 으스대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 지부단장님이 돌아오셨단 말이다."

문 근처로 늘어선 천막 하나에 앉아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동조하는 표정들로 보아 천막 안으로 자리한 것은 퍼렐의 사람들로 보였다. 외부인, 내부인. 뒤범벅이었다.

"그래서. 동료의 안위는 안중에 없다 이건가. 이런 상태의 북동지부라면 그냥 없어지는 것이 낫겠군."

"기껏해야 평기사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군."

"입씨름할 시간 없다. 그래, 지부단장의 명령 없이는 생각이라는 걸 하는 자는 없나. 벌써 몇 사람 죽었고 부상자들도 있다."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가겠습니다."

복색으로 보아 수련생이었다.

다른 이가 말을 꺼냈다.

"디피스. 단령은 단령이다. 기사단은 계급 간의 명령 체계로 움직인다. 네 판단만 따를 수 없어."

"이렇게 문을 닫고 있으란 퍼렐님의 명령이 아랫사람을 휘몰게 한다면 그것은 위에 설 자가 아니다. 나는 단주께 고하고 바로 잡도록 청할 것이다."

"단주가 온다고 퍼렐님을 함부로 할 수 있겠어? 막말 지껄이지 마라."


"숲에서 검은 피를 마신 자들이 나왔다."

북동 지부는 반 이상이 퍼렐이 자리한 동안 그의 밑에서 있던 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휙 하고 이들의 발을 잡아끌 것이 필요했다.

"정말인가. 검은 피라니..."

기사단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지낸 자라면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그것을 본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검은 피라 그럼 가야지."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천막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러스에게 검이 잘리고 지하에 감금되어 있던 자였다. 핼쑥하나마 눈은 조금 또렷해져 있었다. 해도 움직이는 자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니. 지부단장이 오자마자 꺼낸 것이다. 다른 처벌 대상자들도 모두. 가주에게 반감 있을 법한 인물이라 이거겠지."

"정신은."

디피스는 짧게 물었다.

"멀쩡하다면 하고, 아니라면 아니겠지. 나는 가겠다."


또 다른 기사가 소리쳤다.

"어딜 나가! 퍼렐님의 명령을 잊었나! 나가는 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글러 먹었지만 퍼렐도 참 글러 먹었지. 큭큭 그러니 이 꼴이 된 나 같은 것도 이 지부에서 버티고 있던 것이지. 너 같은 것도 퍼렐에게 기사 작위를 받고 말이다. 난 이 기사단의 일원으로 전쟁까지 치른 몸이다. 그 긍지까지 팔아먹지는 않겠어."

그가 저벅저벅 걸어나가더니 주먹을 날렸다. 맞은 이의 고개가 돌아갔고 주변 이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의 싸움도 이와 다를 것 없었으리라.


"약쟁이 주제에 감히!"

칼이 아니라 주먹이 오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주변의 안광들까지 빛나기 시작하자 디피스가 더 들러붙으려 하는 두 사람을 떼어내 저택을 향해 외쳤다.

"안전한 곳에서 아랫사람 목숨을 두고 장난치는 것 아니라고 전해!"

디피스의 뒤로도 사람이 들어찼다.

"이, 이! 항명이다! 여기 항명하는 자들이 있다!"

퍼렐의 심부름꾼은 소리를 질렀다.

"항명인지 아닌지는 단주께서 결정하실 것이다. 검은 피 척결에 앞서도록 훈련받아 왔다. 그것이 진짜 임무다. 위의 명령이 있든 없든 머리가 있는 자는 판단을 해라."

디피스가 힘을 주어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맞는 말이군요.."

오가던 굵은 목소리 사이에 여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비사는 날랜 짐승마냥 언제 다녀온 것인지 저택에서 두 소녀를 끄집어내 사람들 뒤편에 세워 놓았다.

"나가도록 하세요."

단호한 음성이었다.


"이스터 아가씨. 얼굴이..."

고운 얼굴에 핏기가 떠올라 있었다. 얇은 피부 아래서 선명하게도 터진 혈관으로 볼이 붉었다. 입술이 찢겼음에도 그 어조는 힘이 있었다. 이스터는 보는 이들 시선이 어떻든 말을 이었다.

"공작 저하께서는 인재를 아끼는 분이십니다. 동료를 버리는 인간과 명령을 어기는 인간.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뢰가 부족함인지를 제가 확언할 수는 없사오나. 가 주세요. 동료를 위하고 임무를 다하는 것이 처벌받을 일은 아니지요. 그것은 제가 목을 걸고 확언 드릴 수 있습니다."

우성(雨聲) 속에서도 이스터의 목소리는 정연하고 날카롭게 귀에 박혔다.

"아가씨면 아가씨답게 하는 말이나 따를 것이지 어디 나서는 것입니까!"

겁이라도 먹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이스터의 면전을 향해 소리를 질렀으나 꼿꼿함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가씨께 예를 갖추지 않는 자는 죽여버리겠다."

이를 악무는 디피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기에 물어뜯을 입들이 잠시 틀어막혔다.


"돌아오면 그 얼굴에 해를 입힌 자를 찾아내도록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이스터님."

이스터는 우아하게 고갯짓만 하였다.

기사단의 아가씨. 곧 자신들의 울타리 안의 아가씨라는 소리였다. 그녀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본 일이 없는데 누가 그녀를 저리 대하나 말이다. 아무리 윗전이라 하여도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단내의 사내들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핀 불만큼 자존심에 화의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작은 순간순간으로부터 쌓아올린 존재감의 영향이었다.



디피스는 비사에게 남아달라 말하였다. 아가씨들의 안부를 걱정한 것이리라. 행여,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곁에 서 있길 바라고 있었다. 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스미의 얼굴을 떠올렸으나 자신이 끼지 않아도 문제는 해결점에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을 뺄 시간이었다.

디피스는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서도 비사가 따라가겠노라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 묘하였다. 되씹어 생각하니 엮인 관계들에 선이 그어져 있구나 생각하였다. 무른 것인지 냉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이였다.


몇 마디의 시비가 뒤에서 계속 던져졌으나 마음먹은 이들의 움직임에 느림은 없었다. 퍼렐 쪽은 상황이 변함을 느끼는가 이번엔 아예 저택 문을 닫아걸기로 한 모양이었다.

퍼렐의 편에 섰던 자들도 슬슬 망설임이 새어나오기 시작하는가 수군거림이 깊어졌다.


막상 기사단의 대문이 열리자 처음 나섰던 수련생 무리는 뒤로 밀려났다. 빗속에서의 싸움에 준비 안 된 그들은 역시 부족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피스는 너희의 투기를 기억하겠다 말하였다. 조금 실망한 듯한 그들에게 이스터가 말을 건넸다.


"그대들에게도 부탁이 있어요."

이스터는 문이 닫히며 나가지 못하게 된 사용인들을 챙길 생각이었다. 작은 구석까지 아우르는 세심한 여자였다.

감금되다시피 했던 이들이 밖으로 나왔고 가장 어린 쥬나의 등을 다독이며 이스터가 말했다.

"사용인분들은 내일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금은 모두 지급할 것이니 쉬도록 하세요. 너무 늦어 버렸고 길이 위험하니 여러분은 이분들을 집까지 무사히 바래다주었으면 합니다. 할 수 있지요?"

"네! 이스터님!"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즉시 기사관저로 복귀합니다."

또 큰 목청의 대답들이 이어졌다.

얼마나 요란스레 호위들을 하시려나 큰일도 아닌데 사기가 너무 돋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들에게 이 소란은 재미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서 이스터는 기사관저의 서재로 향했으나 안에는 불을 땔 곳이 없었기에 다시 다른 방으로 들어섰다. 테미에게 설교를 하던 그 방이었다.

금세 작은 화로에 불이 붙었다.

비사는 물먹은 로브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몸의 물기를 털어내자 어차피 속이 다 젖었기야 했어도 한결 가벼웠다.


"언니, 많이 아파?"

"아파."

이스터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웃어 보였다.

"비사도 숲에 있던 거야?"

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스는 로브 밑으로도 비사의 몸 여기저기에 튄 피를 보며 싸웠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이시스가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가 하더니 말을 꺼냈다.

"누가 또 목 날아갔나 했더니 비사 피였네. 언니 비사 목에 피 나."

이스터는 문밖으로 무언가 가져다 달라 말을 걸었고 곧이어 작은 바구니 하나가 안에 들려 왔다. 비사는 목에 붕대를 감아주는 이스터에게서 풀리지 않는 긴장을 느꼈다. 그녀라고 왜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누르고 누르는가.'

비사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소녀였다. 이러니 그 수월찮아 뵈는 카일러스가 아끼는 누이의 옆에 세웠을 것이리라.


"얼마 전이 생각나네요."

그때만큼은 쫓기고 있지는 아니더라도 세 사람이 이러고 앉으니 절로 그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도움을 받기만 하지요."

이 사람은 곤란한 상황에서 항상 의지가 된다. 이스터는 처연히 내려다보던 그 비어둠이 들어찬 창 너머로 솟아올랐던 비사에게 또 신세를 지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갚고 싶다 생각하여도 돈도 권력도 관심 없어 하는 이니 이스터 자신이 도움 갚을 일이 있기나 하려는가.


"미안. 비사. 우리 집 아주아주 안전하다고 내가 그랬는데. 그것도 아닌 가 봐."

이시스의 입이 또 삐죽 나왔다. 시무룩함이 등 뒤로 뿜어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세상의 중심과 다른 이가 느끼는 세상의 기준은 상이한 것이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처음으로 장기간 본가를 떠난 이시스에게는 여러모로 시련의 나날이었다.


비사가 곁에 있으니 이스터나 이시스는 그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비사와 한 방이라면 안전의 영역이라 몸에 새긴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쉬고 싶은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이 일었다. 금세 아래층의 쿵쾅거림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축 늘어져 있던 비사는 급격한 짜증과 두통을 느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이시스는 비사의 첨리(尖利)한 눈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것을 앎에도 머리끝이 쭈뼛 섰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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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붉은 못 58화 - 고목(枯木)의 숲 +28 13.02.28 1,513 78 14쪽
57 붉은 못 57화 - 고목(枯木)의 숲 +22 13.02.27 1,273 37 11쪽
56 붉은 못 56화 - 불신(不信)의 길 +26 13.02.01 1,551 41 10쪽
55 붉은 못 55화 - 불신(不信)의 길 +14 13.01.28 1,271 31 12쪽
54 붉은 못 54화 - 불신(不信)의 길 +30 13.01.22 1,489 44 16쪽
53 붉은 못 53화 - 불신(不信)의 길 +24 13.01.18 1,239 32 15쪽
52 붉은 못 52화 - 감시 +18 13.01.12 1,393 28 17쪽
51 붉은 못 51화 - 감시 +8 13.01.12 1,401 37 12쪽
50 붉은 못 50화 - 감시 +30 13.01.09 1,438 34 14쪽
49 붉은 못 49화 - 감시 +18 12.12.27 1,541 37 11쪽
48 붉은 못 48화 - 몽중몽(夢中夢) +22 12.12.21 1,609 44 22쪽
47 붉은 못 47화 - 몽중몽(夢中夢) +20 12.12.17 1,656 75 15쪽
46 붉은 못 46화 - 몽중몽(夢中夢) +20 12.12.15 1,641 41 12쪽
45 붉은 못 45화 - 몽중몽(夢中夢) +19 12.09.25 1,639 49 15쪽
44 붉은 못 44화 - 도과(倒戈), 들리지 않을 이야기. +11 12.09.22 1,660 40 25쪽
43 붉은 못 43화 - 도과(倒戈) +11 12.09.09 1,791 46 11쪽
42 붉은 못 42화 - 도과(倒戈) +9 12.09.07 1,523 34 9쪽
41 붉은 못 41화 - 도과(倒戈) +12 12.09.05 1,695 5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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