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짖는 소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추리, 공포·미스테리

완결

연어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29
최근연재일 :
2020.06.16 14:07
연재수 :
91 회
조회수 :
3,197
추천수 :
502
글자수 :
841,325

작성
20.05.19 00:16
조회
31
추천
5
글자
21쪽

국밥집 1

이 글은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DUMMY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그는 눈치껏 밖으로 나와 섰다.


‘눈이 내린다.’


절로 떠오른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다. 하늘이 자신의 편이 된 기분을 느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추위는 그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폭풍이 가져온 눈과 살을 베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그는 깊은 안도를 하는 중이었다. 시신을 처리할 여유가 생겼기에.


자수할 결심을 했을 때는 크게 걱정하지 않던 일이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정황상 자신의 죄보다 큰 죄를 지은 누군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적어도 사형은 면할 수 있다는 기쁨에 유일한 걱정은 시체의 부패였다. 추위는 그를 막아주는 요소다.


봄이 늦게 오길 바라던 터라 눈바람에도 그는 몸을 떨지 않았다. 어설픈 솜씨지만 정성이 깃든 해물탕 덕분일 것이다. 함께 식사했다는 것에서 느끼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몸을 채운 따스한 기운에 그는 웃을 수 있었다.


그가 여전히 낯설어하는 온기처럼, 행복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가지게 되니 욕심이 생겼다. 어쩌면 그래서 인나를 이해하려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혹은 자주 들었듯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해물탕과 두 사람이 만든 온기가 추위에 조금씩 잦아들자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집중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단서는 찾았다. 확증은 없지만 어쩌면 누군가의 농간으로 사체가 집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급히 도망가는 차량을 본 후에 든 생각이었다.


‘차량을 이용해 담 아래에 세우고... 그 위에 올라가 시체를 집으로 던진다. 집으로... 던진다? 혼자는 어려워, 분명. 적어도 둘... 범인은 둘 이상일 것이다.’


그는 어제 본 차량 소유주를 추적해 볼 생각이다. 그 운전자가 범인일 가능성은 적다 여기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며 찾아볼 생각이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신고는 어리석은 짓이라 그는 판단했다.


‘귀찮으니 제대로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내게 모두 뒤집어씌울 확률이 커.’


유전무죄, 무전유죄.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사회적 불평등이다. 가진 것 없던 그는 수없이 당면해본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 불만보다 더 큰 이유는 여전히 사체유기라는 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서는 전조등. 분명 비싼 차에 달렸던 것이고... 그런 특수한 도장을 한 차라면 눈에 띄기 마련이지. 국내에 그런 차량은 몇 대 되지 않을 것이고... 동호회 같은 곳에 잠입하면 최근 사고가 난 차를 찾을 수... 있을까?’


가까이 해본 적 없던 사회의 상류계층의 무리에 자신이 끼어들 틈이 있을까. 방법은 있을까. 막막해진 그는 안정감을 찾기 위해 가까운 곳을 바라보았다.


-헥헥헥!


눈밭을 굴러다니는 집돌이를 보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눈이 좋아?”


그의 말에 굴러다니던 집돌이가 그를 급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가 있는지 몰랐다가 발견한 것처럼 놀란 기색이다.


“...내 존재감이 그렇게 약하니?”


그 말에 집돌이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앞발을 쭉 내밀고 뒷발로 미는 불도저 같은 자세로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집돌이의 앞발과 턱 밑에는 눈이 가득 뭉쳐있었다.


“무풋! 뭐...뭐하는 거야? 응?”


밀고 오며 눈이 그의 발아래 가득 쌓이자, 집돌이는 크게 뛰었다가 눈덩이에 머리를 박았다. 한참을 멈춰있어 걱정이 든 그가 손을 내밀 때, 집돌이가 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좋은가? 눈이 그렇게 좋다니... 썰매견이었나?”


그는 눈을 뭉쳐 뛰어다니는 집돌이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러자 집돌이가 뛰어올라 그가 던진 눈을 입으로 물었다.


-텁!

“크오! 그런 재주도 있어? 또 해봐.”


그가 다시 눈을 뭉치자 집돌이가 자세를 낮춘 채 대기했다. 그는 일부러 조금 먼 곳을 향해 눈을 던졌다.


“받아봐.”


급히 달려 움직인 집돌이가 눈을 물려다 딱! 하는 이 부딪히는 소리만 내고 떨어졌다. 아쉬운지 집돌이는 떨어진 눈뭉치를 입에 물고 크게 입을 움직였다.


“푸하하하! 그게 뭐야. 무슨 국밥 먹는 사람 같다. 푸하.... 하...”


‘비싼 차네...’


그는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본 적 있어! 분명...비싼 차를... 어디서... 어디서 봤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잡으려 애쓰던 그의 뇌리에 한 장소가 떠올랐다.


“국밥집....!”


사건이 일어난 날 그는 국밥집에서 술을 한잔 마셨다. 제대로 진상을 부리는 손님을 맞이해 기분이 상해 일찍 돌아온 날이었기에 기억이 대체로 뚜렷했다.


‘아홉시... 아니, 열시였나. 그때 끝내고 돌아왔으니... 열시 반... 열한시 가량이었겠지.’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는 것을 그는 기억해냈다.


‘만원내고 천원을 거슬러 받았으니까, 국밥하고 소주 한 병을 먹었고... 먹는 시간은 대충 삼십분... 열한시 반...에서 열두시 사이에 집에 들어왔다. 아냐, 조금 더 걸렸어. 올라오다 쓰레기보고 옮겼고... 그 시간이라면.... 차가... 올라갈 때, 차가 몇 대였지....?’


잡으려 들수록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는 다시 국밥집 앞에서 본 화려한 차량을 떠올려 보았다.


“검정색이었던 것 같은데. 무광이었나. 아니... 유광이었지. 그리고...”


‘사고 난 흔적이 있었나? 그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셋!’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한 이들 셋이 국밥집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그는 기억해냈다. 그들이 타고 온 차구나 연관 지었었다.


‘흔적...흔적...’


발견했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그는 기억을 더듬어 봐도 차에 이상이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는 대리운전기사다. 남의 차를 대신 몰아주기에 흠집에 민감하다. 타기 전 차량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야 덤탱이라 불리는 불합리한 누명을 쓰지 않는다. 손님이 잠들었다 깨어나 차에 흠집이 났다며 돈을 요구한 적이 있기에 그는 차에 눈이 가면 먼저 손상여부를 살핀다. 마나와 인나의 차에 난 상처도 그는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런 습관을 알지만 술을 마셨다는 것으로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차 앞을 지나갔었어. 분명... 전조등은... 깨진 전조등을 달고 다녔을까? 그럼 경찰이 발견하고 먼저 지적하겠지. 피라도 묻었다면 더욱... 범행을 한 그날 국밥집에 앉아서 밥이나 먹고 있었을까? 그 차가 맞기는 한가. 분명 비싼 차였지만, 도색은 평범했던 것 같은데... 크으... 모르겠군.’


“국밥 먹고 싶어요?”

“허으!”


놀란 그가 돌아서다 넘어지자 인나가 급히 툇마루에서 뛰어내렸다.


“아차거!”

“인나씨!”


그가 일어나며 인나를 안아들고 툇마루에 올린 후, 눈을 털고 발을 호호 불며 마사지했다.


“왜 뛰어내려요?”

“국밥, 국밥 하시기에... 무슨 생각을 했어요? 국밥이 먹고 싶어요.”

“참... 들어가세요. 동상 걸려요.”

“이미 따뜻해졌어요. 날씨도 들어와요. 날씨도 좋지 않은데. 풋! 집돌아! 너도 들어와. 어서!”


그녀의 말에 경사면을 타고 놀던 집돌이가 뛰어왔다.


‘이놈은 누가 주인인지 모르나?’


“목욕해야겠네. 집돌이도 날씨도... 어서 들어와요. 집돌이 너도.”


그는 집돌이를 먼저 씻기겠다 말했다.


“제가 할게요.”

“어려워요. 이 녀석 씻는 거 무척 싫어해서.”

“해볼래요.”

“나도 도와줄게.”


마나와 인나, 둘 모두 그와 같은 운동복을 입었다. 마나는 그가 벗은 운동복을 입을 수도 있었지만, 인나가 그의 운동복을 입고 나오자 자신도 입겠다고 고집 부렸다. 그렇게 네 사람이... 세 사람과 사람이었던 존재가 색만 다른 같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저...저런...’


문을 열어 두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던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인나의 성향에 대해 알게 된 순간보다 집돌이가 움직임 없이 씻김을 당하는 것에 더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유, 착해라.

-정말 말 잘 듣는다. 씻기니까 털색도 예뻐 보여. 키울걸 그랬어.

-넌 개 싫어했잖아.

-응? 난 인나가 싫어한다 생각했는데?

-....우린 서로 모르는 것이 많았나봐.

-그런가봐.


대화가 끊긴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와 집돌이를 닦는 동안 그는 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집돌이에게 사용된 뜨거운 물 때문에 순간 찬물이 나왔는데, 그 순간 그는 또 다시 사자와 대면했다. 전처럼 그는 두려워하지만은 않았다.


‘날 찾아온 이유가 있겠죠. 그게 내 의무라면... 억지처럼 맡겨진 의무겠지만, 찾아보겠습니다.’


당신을 죽인 이들을 찾아내겠습니다. 그의 결심을 들었는지 사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사라져갔다.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할 거야. 찾아줘야 해.’


어쩌면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닐까. 비과학적인 요소로 인해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억지로 연관 짓지 마. 이유는 충분해.’


자신을 위해. 죽은 이를 위해 꼭 그리하겠다고 그는 거듭 다짐했다. 자욱하게 낀 수증기를 내보내려 샤워를 마친 그는 창문을 열었다. 하얗게 변한 세상이 작은 창 안에 가득하다. 아직은 모든 것이 하얀 백지와 같았다.


*


‘할 일이 많은데...’


어제 본 차량을 찾아야 한다. 전조등을 교체한 비싼 차량도 찾아봐야 한다. 그러나 그는 마나와 인나를 두고 나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다락에 올라갈까 싶어서다. 다락을 보고 싶은지 두 사람의 눈이 3시간 사이에 여섯 차례나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었다.


“뭔가... 이 마루에 난로가 있으면 딱일 것 같지 않아?”

“나도 그런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말에 그는 난로가 있었다고 말했다. 말하고 금세 후회했다.


“어디 있어요?”

“설치해요. 분위기 좋을 것 같아요.”

“버...버렸어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며 그는 인나 몰래 다락에 있는 난로를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녁은 뭐 먹을까?”


마나가 물었다. 답하려던 인나가 급히 그를 돌아보고 다시 마나를 보았다.


“집에 안가?”

“이 날씨에?”

“우리 날씨가 왜?”

“...알고 묻는 거지?”

“응... 날씨, 괜찮아요?”

“예? 아... 음...”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인나를 내칠 수 없었다. 잡을 수 있다면 곁에 두고 싶었다. 허나 인나는 그가 해야 할 일의 최대 걸림돌이다. 독한 마음을 먹고 인나를 내보내자는 생각을 한 그는 입을 열기 전 마주한 그녀의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이길 수가 없어...’


“고마워요. 날씨.”

“고마워, 날씨.”


안겨오는 인나의 온기에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지도 못했다.


‘어... 그쪽은.’


슬쩍 안겨온 마나에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


마나는 간단한 조리만 할 줄 안다. 인나는 모든 것이 갖춰줘야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조리법에 나온 계량기가 다른 회사의 것이면 만들지 못할 정도로 아직 음식 만드는데 서툴다. 그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음식이란 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던 사람이다. 입맛은 까다롭지 않고, 괴식도 자주 먹는다.


“과일 통조림을 반찬으로 먹었다고요?”

“시원하게 둬서 그런지 먹을 만 하더라고요.”

“어떻게 먹었는데요?”

“그냥 찬밥을 말아서...”

“크에.”

“허으... 이상해. 속이 거북해.”


대화도중 그의 괴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저녁은 그가 맡기로 결정되었다.


‘어째서?’


그래도 많이 해보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재료를 먼저 살폈다. 인나의 장보기는 전투적이다. 만약을 위해서라며 과하게 장만한다. 그 덕에 재료는 풍성했다. 그는 사골 팩을 뜯어 끓이고 고명을 준비했다. 왜냐하면 그가 국밥이란 단어를 수십번 중얼거리는 것을 인나가 들었기 때문이다. 국밥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지 자꾸 묻기에 먹어야 했다.


‘냄새를 맡았군.’


고기를 삶으며 그는 다른 때와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집돌이를 보았다. 그는 슬쩍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기를 꺼내 썰어보고는 다시 넣었다. 작은 조각을 남겨둔 그는 그걸 들고 집돌이에게 다가갔다.


“자. 고기야.”


그가 직접 준 음식을 바로 먹지 않는 집돌이다. 허나 그는 집돌이가 고기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끼기 위해 자주하지 않지만 가끔 그는 외식을 한다. 국밥과 소주가 주된 외식 메뉴다. 국밥을 먹다 그는 고기 몇 점을 남겨 냅킨에 싸서 호주머니에 넣곤 한다. 집돌이에게 주기 위해서다. 사료 위에 올려두고 숨어서 지켜봐야 집돌이가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 먹어.”


그러나 그는 오늘 집돌이에게 다른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자신에겐 냉담하고 인나와 오늘 처음 본 마나에게도 경계하지 않기에 화도 났다.


“안 먹으면... 평생 고기는 없다.”


작게 윽박지를 때, 드디어 집돌이가 움직였다.


탁!

“이...!”


그의 손을 발로 쳐버린 후 떨어진 고기를 집어 먹고 고개를 휙 돌렸다.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이 개...”


방에 마나와 인나가 있지 않았다면 그는 폭언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왔다는 말이지? 그래... 내가 사태인지 안심인지 모르겠지만, 엄청 많이 삶았거든? 너도 조금 주려고... 근데 이제 생각이 달라지네? 어? 어? 어떻게 할래? 지금이라도 사과할래 안할래?”


-풋!


웃음소리에 그가 돌아보자 인나와 마나가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봤는데... 원래 그렇게 말을 잘 걸어요?”

“엄청 귀엽다. 저 남자 나 줘.”

“셧... 흥. 내꺼야.”

“나누자. 공유하자.”

“농담이라도... 아니,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아직은...”


낯빛이 어두워지는 인나를 보고 마나는 그에게 살짝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어으, 어... 괜찮지만... 아니, 괜찮으면 문제구나.”

“큭! 뭐래?”


두 사람이 웃으며 다가오자 그는 집돌이를 슬쩍 노려봐주고 웃으며 일어났다.


“밥 다 됐어요. 앉아요.”

“발 시린데 방에서 먹어요.”


마나의 말에 그는 미안함을 느꼈다. 마룻바닥이 차다. 두 사람이 양말을 벗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기다리세요.”


그가 갑자기 뛰어나가자 두 사람은 멍하니 서로를 보았다.


“화났나...”


눈치를 보며 마나가 말하자 인나가 고개를 저었다.


“화 안내. 화내는 걸 본 적 없어. 아직은.”

“음... 아까 말하려다 말았는데... 그건 많이 이상하지 않아?”

“뭐가? 왜 없는 자리에서 욕하려고 해?”

“욕은 아니야. 그냥 느낌.... 이상하잖아. 우리 그런 모습 보았는데... 너와 연인관계라고 생각했잖아.”

“생각 아니고 진실. 그런데?”

“그런 모습 보고 태연해서.”

“동요했어. 충분히.”


변명하듯 말하는 인나도 그의 남다른 태도에 적잖이 놀랐었다.


“그래? 난 모르겠는데. 보통은 화내잖아. 크게.”

“그건... 나와의 관계에 대한 정립도 되지 않은 상태라 그런 것 같아. 내가 조급하게 밀어붙였잖아.”

“그건 옳아. 과할 정도로.... 나 때문이겠지.”


인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구보다 인나는 어머니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알지만 감춰주고 있는 그녀에게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건.... 모르겠어. 전부는 아니야. 그건 분명해. 난 날씨를 보면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이 뛰어. 기분이 좋아. 네가 없었다면 찰싹 달라붙어 있었을 거야.”

“네가?”

“응. 내가.”

“....너와 내 관계는 어쩌면 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한때는 나도 진지했어. 나중에는... 점점 모르게 되었지만.”

“네가 한쪽으로만 만족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응... 그래서 네게 미안함이 있었어. 늘.”

“난 너 만나다 헤어질 때마다 다른 여자와 놀았잖아. 너와 달리. 그 중에는 진지하게 생각하던 사람도 있었어.”

“그랬었지.”


지난날을 떠올리며 둘의 대화가 끊어졌다.


“대학, 같은 곳인 것은... 의도한 거야?”

“응? 아, 그건 아니야. 나도 그곳에서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때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우린 친구로만 계속 남았을까.”

“장담하는데 절대 안됐을 거야. 그 전에 너와 난 사이가 좋지 않았잖아.”

“그렇긴 해.... 분명 내가 태어난 곳인데, 다시 가니 왜 그렇게 낯선지... 그런데 널 보니 무척 반가웠어.”

“나도 그래. 난 일본에 가면 한국인 취급을 받아. 한국에선 일본인 취급을 받고. 미국에선 중국인 취급도 받았지.”

“푸하! 나도 그랬어.”

“우린 많이 닮았어. 그래서 자주 싸우는 것 같아.”

“아...”


인나는 마나의 말에서 자신과 너무나 다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선해서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무서워.”

“달라서? 호기심? 그럴지도.... 그렇지만 그건 계기야.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


말하며 마나는 자신의 계기를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 다른 그룹에 묶여서 서로를 미워했잖아.”

“미워하진 않았어... 무시했지.”

“흥. 나도 뭐... 비슷해. 우린 친해질 기회가 많았어. 돌이켜 보면.”

“음... 처음엔 너도 나처럼 한국이 낯설구나 싶었어. 그래서 말 걸었는데... 네가 그랬지? 한국에선 한국말 하라고.”

“그건 미안... 일본에서 학교 다닐 때 영어를 쓰면 아이들이 따돌림을 하거든. 그래서 한국도 비슷하구나 싶어서 난 충고를 했던 거야....그리고 나 그때는 영어 그렇게 잘 못했고.”

“그건 내가 미안해. 난 귀국자녀라고만 들어서 나하고 같은....”

“미국인의 자부심이구나?”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국적문제는.”

“응.”


쓴맛 가득한 기억들을 그녀들은 누르기 위해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저 내리누른 마나는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경쟁이 시작되었었지.”


*


귀국자녀가 한반에 열은 되었다. 순수한 외국인도 다섯이나 있었다. 국제정세나 국내정치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정세대로 몰려다닌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아이들이 모인 학교였지만, 그 안에서도 어울리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철저히 나누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주도적인 인물이 있었고, 그것은 인나도 마나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쩌다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갈라서며 서로의 그룹을 위하고 다른 그룹아이들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지냈다. 그렇다고 다툼이 이는 것은 아니었다. 상급생이었기에 자신들의 행동이 부모님에게 나아가 국가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 생각하는 시기였다. 대체로 무시하고, 가끔 말싸움을 가볍게 하는 정도로 지내던 두 그룹에서 싸움을 일으킨 것은 인나와 마나다.


두 사람이 처음 충돌한 것은 둘 다 그룹에 속하지 않았을 때다. 인나는 마나와 친해지고 싶었다. 미국인답게 귀국자녀면 당연히 영어에 능숙하겠다고 여겨 다가서 영어로 말을 건 것이다.


“여긴 한국이야. 그리고 너도 한국인 아냐?”


무안했던 인나는 곧 화가 났다. 작게 말해도 될 텐데 크게 말해 주변의 시선을 끌어버렸으니까. 그 후로 두 사람은 서로 대화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곧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그룹에 속하게 되었고, 여전히 무시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나는 자신에게 온 러브레터를 책상에서 발견했다.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것은 마나에게 보내야 할 편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경로로 인나의 책상에 마나가 받아야 할 편지가 들어있는지는 지금도 둘 다 모른다. 편지에 쓰인 마나님에게라는 글을 보고 화도 났고 어려 분별력이 떨어지던 시기의 인나는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했다. 편지를 보낸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편지를 보낸 아이는 여자였고, 마나는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마나가 화가 난 이유는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여자아이가 부끄러워 전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마나는 인나를 불러내 사과를 받으려 했다. 허나 인나는 마나에게 겪은 일이 있어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짝!


먼저 때린 것은 마나였다. 태어나 뺨을 처음 맞아 본 인나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짜악!


힘껏 때리자 마나가 쓰러졌다. 그러나 마나도 보통 성격은 아니었다. 화장실 바닥에서 일어난 마나는 눈을 부릅뜨고 인나의 뺨을 때렸다. 두 사람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서로의 뺨을 때렸다. 점심식사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두 사람은 그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당연히 집과 학교 양쪽에서 난리가 났지만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후 둘 다 붓기가 빠질 때까지 통학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우연히 둘은 같은 날 학교에 다시 나왔지만, 전보다 더 서로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년이 지나, 두 사람은 같은 캠퍼스에서 만났다.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다가섰다.


“여기 다녀?”

“응, 너도?”

“응... 무슨 과?”


과는 다르지만 둘은 같은 기숙사에 배정될 수 있었다. 졸업하기 전까지 둘은 거의 매일 붙어 지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단체등은 사실과 같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개 짖는 소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 카센터 1 20.05.25 19 3 14쪽
31 참치 2 +2 20.05.24 19 5 26쪽
30 참치 1 +2 20.05.24 20 5 19쪽
29 변태라서 나쁘지 않아 2 20.05.23 22 4 21쪽
28 변태라서 나쁘지 않아 1 20.05.23 21 4 15쪽
27 주차장 2 +4 20.05.22 27 6 18쪽
26 주차장 1 20.05.22 20 4 25쪽
25 만세형 20.05.21 22 5 23쪽
24 관2 20.05.21 22 5 29쪽
23 관1 +2 20.05.20 26 6 21쪽
22 또 다른 단서 +3 20.05.20 30 9 23쪽
21 국밥집 2 20.05.19 29 6 25쪽
» 국밥집 1 20.05.19 32 5 21쪽
19 행복은 아프지 않다 3 20.05.18 29 7 16쪽
18 행복은 아프지 않다 2 20.05.18 24 5 14쪽
17 행복은 아프지 않다 20.05.17 26 3 17쪽
16 외출에는 신발이 필요하다 20.05.17 35 4 14쪽
15 호박이 찾아준 다서 20.05.16 34 5 19쪽
14 굴러온 복덩이를 걷어차는 방법 20.05.16 38 8 19쪽
13 급발진 2 20.05.15 38 9 26쪽
12 급발진 1 20.05.15 45 6 19쪽
11 오래된 집 20.05.14 53 6 20쪽
10 그들의 일탈 20.05.14 48 4 15쪽
9 수상한 여인 +2 20.05.13 56 7 15쪽
8 유품 20.05.13 50 5 21쪽
7 증거물 20.05.12 55 4 18쪽
6 유서는 반송처가 필요하다 20.05.12 72 7 20쪽
5 떠나기 위한 준비 20.05.11 94 7 17쪽
4 다락과 세혼 +1 20.05.11 109 8 22쪽
3 공존 +1 20.05.11 130 14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