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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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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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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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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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묘향산 1

DUMMY

밤벌레에 울음 계곡

별빛 곱게 내려앉나니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 가보세


산 모양이 달라. 왜 이러지...

거리, 방향, 정확히 왔어. 저 멀리 참고점도 정확해. 여기가 맞다고...


내 기억이 잘못되거나 쉬이 본 거야. 산이 어디 갔다 왔겠어? 기억이 고정관념과 결합해 다른 그림을 간직한 거다. 직접 보니 우리가 항상 정했던 것과 차이가 크다. 1차는 등고선까지 기억이 나면서 모양도 금방 알아봤는데, 이 2차는 위치와 표고 외에 기억에 없었다.


야전에서 몇 년 놀다 보면 지도만 봐도 산 모양이 보인다. 행군로에 등고선 간격이 좁으면 한숨이 나온다. 행군 중 가장 죽어나는 소리... ‘뚫어. 이건 길이 없어. 뚫어야 돼.’ 내륙전술 나가면 지겹고 이가 갈릴 정도로 계속 이동하기에 길을 잃거나 돌아가면 뭔 소리 들을지 모른다.


중사 고참이나 상사는 정보작전 주특기가 아니라도 지도 훅 보고 지나가는데, 대충 봐도 오늘 밤 행군의 종류를 본다. 행군하다 이상하다 싶으면 고참들이 슬쩍 와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고참들은 직접 산을 보고 나서 지도를 떠올린다. 산도 기본적인 패턴이 몇 개 있다. 그리고 그것마다 헐떡임이 떠오르는 거다. 생각해보면 내륙전술훈련도 지속적인 타격-도피탈출 하는 과정이었어. 왜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 힘들고 욕하기만 했지. 왜 이렇게 끝도 없이 걷나. 왜 자꾸 가고 매일 걷고 산을 넘나. 왜 하룻밤 자고 이틀 밤 자고 또 계속 가. 하루 이틀 잘 거 왜 이렇게 공을 들이나.


‘이 산이라고???’


재집결 1차에서 2차로 가는 방향 거리 루트는 기억이 나는데 모양은 기억이 없다. 한동안 새로운 경황에 넋 나갈 정도로 사람 이상해졌나보다. 나는 1차에서 접선을 실패했다. 늦었다.


정말 산이 이 모양이었나? 뭐 이런 전술적으로 개떡 같은 산을 찍었어. 백지시험이 지도의 현실을 자극하지 못했다. 눈에 들어온 우리 2차 재집결지, 저 산.


‘햐... 산이 뭐... 사람 만나긴 좋겠다.‘


그냥 통짜 삼각형 산이고 7~8부에 연결되는 능선도 없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 같은 삼각형이 떡하니 서 있다. 예전에 훈련 때문에 해군함정 타고 갈 때, 새벽 갑판에서 본 제주도.... 바다에 정말 좌우 변이 완만하고 검은 삼각형 하나가 떠 있었다. 제주도는 크게 봐서 그냥 삼각형이다.


지도는 없다. 산이 대체 이 모양이라니. 아무리 봐도 사면이 모두 가파르다. 칠팔 부에 은폐해서 주변을 관측하며 조용히 기다릴 수목도 없이 허연 바위들까지 드러나 있다. 결국 5부 아래서 뒤져야 하는데 너무 넓고. 그야말로 막산이다.


‘이런 데 위험해 이거...’


여기서 도로는 무척 멀다. 와봤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저 산에 민간인이 다닐 것도 없다. 산골의 마지막 집을 지나쳐온 지도 한참. 아침이 되면 안 보이던 민가들이 자진 신고한다. 아니, 신고하러 한 명이 산을 뛰어 내려가겠지. 동이 틀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온다. 안 보였던 민가가 보인다. 밤에 이동하고 아침에 그 연기는 확인하고 자는 게 좋다. 연기가 가까우면 좀 떨어져서 쉬는 게 좋다. 이곳의 산골 민가는 그게 집인지 오두막인지 간이 대피소 창고인지, 정치범관리소에나 있을 법한 대충 뚝딱뚝딱 지은 가옥. 여명거리 좆까라 그래.


버려진 땅에서 나도 버려진 것 같다. 넘어오기 전에 이 지역 탈북민 인터뷰 영상을 보고 강연도 들었는데, 탈북자가 압록강을 향해 도망치다가 외딴 오두막에서 보름도 넘게 있었다는 말을 이제 믿겠다. 길이 없다 길이. 보안서건 보위부건 헌병이건 차를 내려 두 시간은 올라야 할 걸. 다만 우리가 모여야 할 산이 좀 그렇다.


‘일대에서 너무 두드러져.’


군장을 벗어 내리고 거총해서 조준경으로 산을 살핀다.

‘으 어깨... 먹을 것도 없는 이놈의 군장.’


조준처럼 어깨 삼각근에 총을 대고 나무 하나, 바위, 봉우리. 개미새끼 하나...

“휴... 휴...”


마지막으로, 청음... 산새가 울어 정겹구나...


다시 짊어지고 전진. 정지. 조준경 관측. 청음... 매복이 있다면 먼저 움직이는 놈이 죽는다. 자리를 잡으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기다려라. 인간의 인내심은 대동소이하다. 급해도 최소 5분 정지, 니가 안 움직이나 보자 - 45분. 연극이론에도 있다. 1시간 20분부터 관객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한다.


주변을 장악한 그 다음에 움직여라. 주간에는 수풀과 그늘을 최대한 타며 가라...


짧은 거리가 너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참아라. 먼저 움직이는 놈이 죽는다. 먼저 드러내는 놈이 기다린 놈에게 관측된다. 그러면 놈은 최대한의 조준거리 방향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다 한 방으로 보낸다. 발을 천천히. 소음 제거. 근처 10미터의 적이 모른 채 갈 정도로. 안 보이면 소리, 소리. 냄새의 결투는 결국 담배. 이 동네는 담배 안 피우는 남자가 없다. 이제 내 남조선 냄새도 빠졌을까?


‘남조선 사람 몸에서는 고기기름 같은 냄새가 난다니까나.’


우리가 산에 있는 시간은 전술/전력 낭비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자 우리도 목숨을 부지하며 치고 빠지면서 자꾸 산으로 들어오게 된다. 방법이 없다. 언제 단잠을 잤는지 모르겠다. 적이 갑자기 나타나고 내습할 거란 두려움이 떠나질 않는다. 총구가 먼저 나간다. 나가면서 왼손이 내려가 대검집을 덮었다 다시 올라온다.


산 5부 - 거리 500미터. 드디어 군장을 움푹 들어간 곳에 넣고 수풀로 공들여 위장한다. 덮기 직전 또, 불안한 마음에 실탄 수류탄을 더 챙겨 조끼에 넣고 물 세 모금. 수풀로 덮어 위장하고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주변 지형을 입력한다. 양쪽에 큰 나무 두 개가 확인점. 공중에 저 특이하고 긴 가지. 저걸 기억하라.


좋아 가자. 정숙보행...


없다. 보이는 것이 없고 소리도 없다. 설마 적이 벌써 여기에? 소대급 이상만 돼도 산에서 잠시 기다리면 뭔가 달그락 소리가 들린다. 모든 군인의 소리. 쇠와 플라스틱 장구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대체 이 정도야? 이미 여길 왔다가 떴나? 백지시험 암기항목 상 아직 시간은 안전권인데? 오늘 자정이 지나야 여긴 폐쇄(?) 된다. 재집결지 유효시한이 지난다. 어쩌지. 여기 이후는 암기하고 있는 것이 없다. 혼자라서 간파될 위험은 적으나, 제발 누구 만나고 싶다.


혼자 있으니 산도 컴컴한 괴물처럼 무섭고 동물들의 눈총이 느껴진다. 만약 만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혼자라도 산에 숨을 수는 없다. 북한식 표현으로 개별항쟁에 들어가야 한다. 인적이 있는 군 소재지와 도시 인근으로 가서 단독 비정규전으로 간다. 할 수 있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도로에 붙어야 돼. 여긴 먹을 게 없어. 민가라도 있어야지. 지역대가 이렇게 작살났나. 아직도 쏘고 뛰며 도피탈출 중인가. 그래. 없어도 가자. 독수리훈련에 비하면 암 껏도 아니다. 현역 예비군 주한미군까지 전 병력이 방어하는 독수리훈련.


생각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난 산을 내려간다. 외에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우린 백지시험 그 하얀 종이 안에 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백지 상에서 희미한 점으로 스러져간 팀원 지역대원들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지.


‘삼~~~천리 금수강산 피~~~로 물든다.’


불광불급(不狂不及) : 제정신으로는 이르지 못한다.


속 쓰리고 목이 마른다. 컴컴한 산을 뛰다 발을 접찔리고 가지가 면상을 때리고 팔을 긁고 군복은 찢어지고... 개던 노루던 멧돼지건 보이면 잡아먹고 싶다. 역겨워서 못 먹던 생간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 맛의 문제가 아니다. 단백질 덩어리를 넣어 힘을 얻고 싶다.


몸에 힘이 떨어지고 약해지는 게 매일매일 다르게 온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불안하나, 더 이상 그렇게 무서운 건 없다. 지옥은 내 행로에서 순간순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백지 같은 얼굴. 뭐가 있는지는 죽어봐야 알겠지만, 옆에서 보기에 아무나 죽고 아무나 쉽게 쓰러진다. 내 살기 위해서라면, 마주친 놈은 곧 나에게 죽어있을 거다. 이렇게 살고 싶은지, 이렇게 야비한 마음까지 솟아오르는지 모른다.


헌데 더 무서워지는 걸. 훈련은 산에 우리 밖에 없으니 복잡할 거 없었다. 지금은 조준경으로 봐도 일정 거리가 떨어지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저게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겠다. 그저 검은 그림자. 게다가 AK 든 지역대원이 늘어나면서 더욱 힘들어졌고, 심지어 북한군복을 입은 사람들 때문에 이 무인지경에서 아군을 쏘는 건 아닌지, 지역대원이나 우리 대대원을 쏘는 게 아닌가 불안하다.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어 방아쇠를 못 당긴 적도 있다. 적어도 머리칼이 식별될 거리 안에서 당겨야 안심된다. 삭발은 적, 긴 머리칼과 수염은 아군, 사각턱은 어지간하면 적이다. 뒷모습이면 북한군모 밑의 머리칼부터 본다. 제발 다른 것보다...


‘우리 팀. 우리 중대.’


갑자기 발걸음이 주저한다. 특이 지형. 바위가 넓다. 오른쪽은 벼랑, 이동할 방향은 왼쪽 밖에 없다. 바위가 시작되는 곳을 피해 수풀 지대를 통해 간다. 배에서 꼬르륵. 너무 먹고 싶다. 넘어와서 항상 배고프다. 24시간 긴장해서 걷고 뛰다보니 어지간히 먹어도 배부르다는 기분이 안 들고, 이제 먹을 것도 없다. 옛날 공비처럼 민간을 털어야할 지경, 도로에서 차량을 털던가. 국밥이라도 한 그릇 말면 정말... 집밥 한 끼 먹으면 원이 없겠다.


스치는 수풀 소리를 줄여...

어? 뭐가 좀 이상하다. 뭐지. 아닌가?

내려간 총구를 왼손으로 올린다.


“둘.”

“......”


아득하다. 몸이 굳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환청은 아닌지 내 귀를 의심한다.

아니다. 환청이 아니다. 움직이면 죽는다.

훈련 때는 ‘왔냐?’로 끝. 지금은 말이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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