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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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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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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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묘향산 4

DUMMY

손가락이 방아쇠울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름 모를 산, 자기가 죽을까봐 눈을 부라리는 짐승 대 짐승. 우린 총구를 겨누고 상대의 간을 뜨고 있다. 무척이나 가늘어진 내 손목이 잡은 총열덮개는 요동 없이 굳었다. 나와 임중사님은 저 그림자보다 온 방향, 뒤에 달린 것이 없는지 집중하고 있다. 저 그림자가 유중사님 맞다면 우린 지역대원을 의심하고 있다.


왼쪽으로 가는 그림자는 우리를 통과할 때보다 속도를 늦춰 더 조심스러워진다. 북으로 넘어와 이 이상 경직되고 숨이 막힌 적이 없다. 작계 목표 때릴 때도 이렇지 않았다. 그건 무엇이 올지 무지한 대상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이건 좁은 곳에 총은 수평, 점프하기 직전의 고양이처럼 공존하는 상태다. 그림자가 조금씩 왼쪽으로 벌어진다. 만약 우리가 따라가면 서로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 더 멀어지면 못 찾을 수도 있다. 이 깊은 산은 저 멀리 도로나 시가지에 떨어지고 있을 폭음도 안 들리고 조용하다.


난 숫자 암구어를 걸어보자고 임중사님에게 말하고 싶었다. 의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꼭 부스럭 소리가 날 것 같아 두렵다. 임중사님도 망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 뭐지?

공기가 달라졌다.

뭐라 할 수 없지만 새로운 공기가 돈다.

내 눈에 개슴추레 그림자로 집중한다.


어, 그림자가 멈췄다.


‘우리를 느낀 거야?......’


숨 막힌다. 아닐 수도 있다. 우연히 유중사님과 아주 비슷한 북한군 척후일 수도 있다. 오른쪽에 징후는 없지만 정지하고 대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추격해 왔다면 평범한 보병이나 병참부대 같은 건 아니다.


우린 그의 등을 본다. 멈추어 고개나 총도 안 돌린다. 어떤 미세한 우리 소음을 들었나? 그냥 정지한 건가?


갑자기 허연 것이 네 시야에 나타난다. 헉! 임중사님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종이 위에 하얀 고양이 눈동자 두 개. 내게 묻고 있다. ‘뭐지?’ 나도 묻고 싶지만 참는다. 고개도 까딱하기 싫다. 허연 두 개가 돌아가며 다시 사라진다.


1초, 3초. 5초. 10초... 20초...


‘어?...’


손을 든다. 그림자가 천천히 높게 왼손을 든다.


왜 저러지?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본대에게 보내는 신호인가?

다시 움직인다...


그림자가 쪼그린 상태에서 이번에는 총을 놓았는지, 오른손을 들더니... 초중고에서 ‘저요!’처럼 들었던 왼손의... 팔뚝까지 내려간 소매를 엄지 검지로 잡더니, 하늘을 향해 위로 당기면서 여러 차례 툭툭툭 친다.


멍했다. 뭐가 왔는데 뭔지 문장으로 완성이 안 된다.


유중사님의 하얀 두 개가 다시 돌아오고, 이제 훨씬 더 큰 하얀색, 치아가 보인다. 날 보고 웃는다.


임중사님이 총열덮개를 아주 작게 우리 지역대 숫자로 때린다.


씨발, 눕고 싶다...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날 사랑하고 있다는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날 바라보는 게 아니고, 날 바라보고 있다는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오지은.’


유중사님이 인민군모를 던지고 벌렁 드러눕는다.

“에이 씨발. 먹을 거 없나?”


유중사님도 지나가면서 우리를 인지했다. 또한 동일하게, 우리가 적 매복인지 아군인지 분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분대급 이하 소소한 몇이 있음을 직감했고, 그때 아마도 아군이라고 생각했다. 아군이라면 당연히 우리 지역대란 의미다. 아주 똑같은 생각 - 북한군이 여기 왜 있나. 뭘 알고 왔다면 누가 정보누설한 거다...


그렇게 가다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이 따랐다고 한다. 우리와 정말 똑같았다. 셋 다 당기면 총알 난무. 그리고 내가 낮에 생각했던 그것. 강압의 의한 약정신호가 떠올랐고, 그걸 이용해서 ‘개를 달고 오지 않았다...’ 표시하면 알아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드셨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유중사님이 그 자리에서 10미터만 더 진행했다면 우린 그 수기를 못 봤다. 더 나가면 산 그림자 속으로 중사님이 들어갈 ‘겹치는’ 시점이었고, 만약 유중사님은 의사를 표했는데 반응이 없다면, 우리가 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수기가 의미가 없어지고, 만약 우리가 따라올 경우, 천천히 몸을 돌려 쏴버릴 생각이었다고 한다.


소매? 남들이 듣기에 웃길까? 하지만 우린 목숨이 걸렸고 그런 무수한 것들을 머리로 짜내고 짜내고 짜냈다. 특히나 적에게 사로잡혔을 때 행동과 표식은 무척 신경 썼다. 지역대장 앞에서 대대장 앞에서 연극 대사 외우듯이 작계와 개인임무를 줄줄줄 암송해야 했다. 정보가 될 것을 절대로 휴대하면 안 된다.


중대장과 정작이 휴대한 지도는 연필만 사용하다 넘어오기 전에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군장에 넣었다. 북조선에서 브라보 투 제로를 본 놈이 있는지 모르지만, 잡힐 경우를 대비해 모두 병사 계급으로 설정했다. 중대장님은 하사. 하하. 강제 징집되었고 이 군복은 갑자기 입으라고 준 것이며 이유도 모른 채 직승기에 올라탔으며, 죽으라고 우릴 북조선에 보낸 남조선 정부가 싫다...

그리고 반드시 탈출한다. 두만강 압록강을 향해 끌고 갈 것이고, 그 이전에 탈출해야 한다. 격리 고문 심문... 씨발 말대로 되냐. 또 알긴 뭘 얼마나 안다고. 같은 지역대 팀들 목표도 잘 몰라. 심문에 개병신 되겠지. 차라리 맞총질하다 죽고 말아. 가오도 습관이라 우린 쪽팔린 거 극혐이니까.


다시 시간은 흐르고.

“없어. 이제...”


‘없어? 더 없다고? 다 어디 간 거야.’

‘미쳤냐. 정신 안 차려?’

산이 침묵한다.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오래 있으면 위험해.’

‘정말 가는 거야? 여길 떠나면 더 이상 골프 재집결지는 없어.’


첫사랑을 너무 오래 그리워하는 건,

첫사랑의 지금 모습을 못 봐서 그렇다.


수풀이 좌우로 조용히 눕는다... 우린 뱀 꼬리처럼 스르륵 스르륵 장소를 벗어난다. 낮은 자세로 발소리를 죽이며. 작은 소리에 셋이 그대로 멈췄다 풀다 반복하며 간다. 체온이 오르지만 땀은 나지 않는다. 우린 간단하게 생각한다. 물 많이 먹으면 땀 많이 난다. 내장에 소화시킬 것이 별로 없고, 소금끼를 안 먹으면 물도 많이 안 든다. 어렵사리 소금을 획득해 먹으면 정~말 설탕보다 달다. 소금은 본디 달콤하다. 우린 산사람이 되어간다.


산을 천천히 벗어나자 허리를 펴고 걷기 시작한다. 시야가 트인 능선에 도달하자 선두가 멈췄다. 임중사님이 다른 산을 하나 지시한다.


‘저기. 우리 팀이 대기하고 있는 곳.’

걷는다. 계속. 곰발이 되어간다.

안 뛰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하면서...


속옷까지 벗겨진 도톰하고 뿌연 하체에 걸려 있던 하얀 양말. 풍만한 유방을 만질 때 ‘너 정말 날 책임 질수 있어야 돼.’ 또렷이 눈으로 말하던 너. 어느덧 해가 뜨고, 애써 묘사할 필요 없는 변두리 모텔의 창은 밝게 번지고, 오동통한 나신에 음모와 하얀 양말. 목을 끌어안자... 어느새 내 성기는 너의 질속에서 움직이고 난 머리칼에 코를 묻는다.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풍만하고 야릇하고 부드러운 그것. 아이가 내 허리를 감고 엉덩이를 움켜쥐고 난 끝을 본다. 밤과 달리, 끝이 바람처럼 지나가자 이름 모를 감정에 휩싸인다. 더 있고도 싶고 도망치고도 싶었다.


괜히 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수치심과 함께 막을 수 없는 쾌감. 귀두에서 울리는 놀라운 경종의 떨림. 그 아이에게서 몰랐던 새로운 것.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날, 버스정류장과 빨간 글씨로 뭐라 쓰여진 하얀 면티. 바라보면 이제 3차원 이상의 육감으로 널 느끼고, 말하다 자꾸 서로의 배가 붙는다. 남들 눈 때문에 떨어졌다 또 붙는다. 버스가 어지간히 늦어도 상관없다. 사람들만 없다면 쓰다듬고 싶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말을 난생 처음 떠올려. 곰돌이 같은 아이가 귀여워 미치겠다. 화장 없는 뽀얀 얼굴과, 이제 우린 남이 아니라는, 전날보다 백 배는 깊어진 우리 눈의 응시. 하룻밤, 이틀 밤, 열흘을 같이 있고 싶었다. 꽤 만나면서도 처음 맡은 체취. 화장품과 향수의 장벽에 가려 맡을 수 없었던 그 체취. 체취는 크림빵 같기도 하고 (바보 같은 말이지만) 들판에 핀 수선화 같기도 하며, 회색을 함유한 눈부신 백색의 꿀맛. 너와 헤어져 오래도록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벌렁, 아이의 머리칼에 파묻어 남겨진 냄새. 가만히 누워 있는데 그 냄새가 가지실 않는다. 다음 날까지 샤워하지 않았다. 그 향기를 씻어내기 싫어서...


‘왜 피임을 하고 지랄했어. 이제 내 씨는 끝나는 거냐...’


이게 무슨 기분이야. 응? 화가 나서, 씨발 좆같아서 참을 수가 없네 정말. 애기도 못 낳고 죽어... 뭐 이런 씨발. 남자 구실도 못하고 이런 씨~~~발. 열불이 나. 억울하다. 어머니에게 딸을, 손녀를, 낳아드리고 싶었어. 끝이야? 끝이지. 지금 사라진 사람이 지역대 40명이 넘어. 그중 1/3은 죽었다는 거 알기나 했지. 이런 좆같은 산골짜기에서, 좆같은 발전소에, 개 좆같은 공장에 그런 거 때려 부수고 굶고 지치고 총 맞아 죽어. 내 사타구니에 생명은 죽어. 이제 어쩌냐. 이제 어째... 이제... 나도... 사람 좀 죽여도 되지?


갑자기 사지에 힘이 풀린다.

걷는다. 임중사님 뒤를 따라서.

그래... 냄새... 아, 냄새가 코에 온다.


뚜껑을 열자마자 옆으로 젖혀 물방울을 턴다. 오래전나 썼을 보온도시락. 뜨거웠던 밥에 적당히 온기가 남아 딱 질감 좋게 식은 밥. 애들은 이게 뭐야 웃었지만 달콤한 콩장과 멸치볶음, 식었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은 계란프라이. 볶아서 넣어준 김치. 어머니의 도시락. 군침 돈다. 먹고 싶다. 그래 난 급식보다 도시락이 좋았어.


어머니가 급식 후지다고 싸줬던 도시락. 어머니는 창피하지 않니? 묻지만, 난 좋았다니까! 게다가 텅 빈 교실에서 나 혼자 음식을 음미하며 꼭꼭 씹어 먹을 수 있었어. 학교에서 손가락에 꼽는 나를 놀릴 놈도 없고, 친한 놈들은 일부러 도시락을 싸오기도 했지. 모친은 내가 도시락 싸간다고 따를 당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 서로 ‘급식비’란 말은 입에 안 올렸어. 모친은 모르지. 중학교 때부터 난 별로 진 적이 없어. 엄마 얼굴 봐서 좆밥들 모여 다니는 무리에 들지 않았고 돈도 뜯지 않았어.


빈 창자. 홀로 뚜껑을 딱 열었을 때 그 향기 식감이... 앞에 있는 것처럼 코와 혀에 온다. 훈련 중 생존기간에 굶어도 이 생각은 안 떠올랐다. 지금 그 볶은 김치에 밥만 제 끼니로 먹어도 날아다닐 것 같다.


‘아, 내 입에서 아기 젖 냄새가 나네... 돌아가는 냄새. 죽음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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