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배우로 전직을 명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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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운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0.11.27 17:58
최근연재일 :
2021.01.1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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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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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Act 38. 마음의 치료사 - (2)

DUMMY

“사장님.”

“왜?”

“사장님 형님이셨던 지혁이 형님 있잖아요.”

“엉.”

“요새도 자주 연락해요?”


메인 편집자 이찬영의 물음에 박연주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당연하지, 매일 안부도 묻고 다 한다. 우리 형님 대박이지 않냐? 어떻게 무명에서 금세 그렇게 유명해지시냐?”


정지혁 이야기에 박연주는 팔불출 아버지마냥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벌써 몇 번이나 있었던 반응이다.

정지혁 이야기만 나오면 자동으로 나오는 반응.


“또 지혁이 형님 이야기 꺼낸 거예요?”

“아니, 궁금하잖아. 어떤 분이신지.”

“그렇긴 한데···”


이찬영과 김재욱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박연주를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4개의 눈동자를 보며 박연주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딱 보면 몰라? 엄청 멋있고 존경스러운 분이잖아.”

“아니 그런 거야 사장님 반응 보면 알겠는데, 사장님이랑 선임이시면 같은 707 출신이시잖아요. 그런데 사장님도 그렇고 뭔가 제가 생각하는 특전사랑은 이미지가 다르셔서요.”

“이미지가?”

“저번에 처음 뵀을 때는 엄청 상냥하시고 친절하시고··· 아, 물론 그때 범인 제압하실 때는 엄청 멋있으셨지만, 평소 모습은 제가 생각하는 특전사처럼 막 믿음직하고 엄청 강해 보이고 이런 모습이랑 조금 다르셔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이찬영을 보며 김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박연주의 입가에는 엷은 비웃음이 번졌다.


“쯧쯧, 너희가 형님 군 시절을 못 봐서 그래.”

“그러니까 속 시원하게 좀 말해 봐요. 사장님이 대답을 안 하니까 자꾸 궁금하잖아요.”

“맞아요! 아니 썰 좀 풀어봅시다 사장님. 혼자만 알기 있어요?”


한참 동안 능글맞은 웃음을 짓던 박연주는 이윽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이찬영과 김재욱 역시 그를 보며 눈과 귀를 세운다.

잠시간 과거를 회상하던 박연주는 웃음기를 전부 지우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형님 군생활이야 거의 레전드지. 워낙에 꼼꼼하고 철두철미하셔서 임무만 하달되었다 하면 모조리 완벽하게 완수하시는데, 707내에서도 엄청 유명하셨다. 거기에 성격도 좋으시지만, 실력도 좋으셔서 실상황 때도 자주 차출되시곤 했지. 언제 한 번 무공훈장도 받으셨을걸?”

“세상에···”

“훈장을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 두 분 중에 한 분인데 그 정도야 뭐.”


훈장이라니.

영화에서나 듣던 단어다.

설마 그걸 실제로 받은 사람이 주변에 있을 줄이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박연주 덕분에 오히려 현실감이 더 떨어진다.

박연주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형님은 악명으로 더 유명했다. 일상에서야 정말 예의 바르고 친절하시지만, 외골수적인 성격 때문인지 임무나 훈련 때는 가라 하나 없이 완전 FM(Field Manual) 대로 임무 수행하시는데, 오죽했으면 형님 특수살상무술 교관 시절에 별명이 악귀였겠냐?”

“아, 악귀요?”


잠자코 듣던 둘의 입에서 당혹성이 새어 나왔다.

악귀라니 정지혁의 모습에선 전혀 상상도 되지 않은 별명이다.

그들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는지 박연주는 씁쓸한 미소로 말을 덧붙였다.


“딱 한 번 형님이 극대노 하신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보는 내가 다 떨리더라. 특수살상무술 교관이셔서 어떻게 하면 사람이 죽는지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계셔서 그런가 일부러 죽지 않을 정도로만 조곤조곤 밟으시는데······ 어우.”


박연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절레절레 고개까지 저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 그럼 형님을 만약에 화나게 만든 놈이 나온다면······”

“만약 어떤 미친놈이 정말 선을 넘어서 형님 심기를 거슬린다면······ 어우, 차라리 나 같으면 혀 깨물고 죽을 것 같은데.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게 될걸?”


***


사람 쉽게 죽고 다치지만, 반대로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 가져오는 것은 급소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급소를 제외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


“끄··· 끄윽······”

“입을 테이프로 묶어놨는데 아직도 소리가 나오네, 덜 맞았나?”

“······”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덜 맞았냐는 말에 금세 소리가 사라진다.

바로 이렇게 된다.

눈앞의 남자는 거의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이번 기회에 정신머리를 싹 뜯어고칠 생각에 아주 자근자근 밟아댔더니 마치 좀비를 보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아주 갈아 마시고 싶지만, 방밖에 서예나도 있으니 이제 그만 할까?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 간신히 연결되어 있는 사지를 테이프로 꽁꽁 묶어두고 나는 방 밖으로 나섰다.


“지. 지혁 씨!”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세상에, 피가!”


서예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옷을 보니 확실히 내 옷에도 피가 가득했다.

정확히는 내가 흘린 피는 얼마 되지 않는다.

놈이 휘두른 칼에 스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다다.

나머지는 전부 놈이 흘린 피지만, 서예나의 대부분의 피를 내가 흘린 피로 착각한 모양이다.


“자, 잠깐만요!”


서예나는 방 안쪽으로 향해 헐레벌떡 구급약을 꺼내온다.

별거 아닌 상처라며 말려보지만, 그녀는 어느새 내 소매를 걷고 상처를 확인하고 있다.


“칼에 베였잖아요!”

“정말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요. 상처가······”


말꼬리를 흐리며 그녀는 황급히 내 팔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정당방위를 위해 일부러 맞아준 것인데, 저렇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 한편이 뜨끔하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방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선배님.”

“방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저 때문에 상처가 생기셨잖아요.”

“정말 별거 아닙니다.”


서예나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저기 혹시 그 남자는······”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었습니다. 맘 같아선 확 죽······ 아니, 입이랑 팔다리를 묶어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선배님!”


낮은 탄식과 함께 서예나가 자리에서 무너졌다.

다리에서 힘까지 풀린 것을 보니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다.

하긴 웬 칼을 든 미친놈이 집에 들어와 자기를 죽이려 들었으니 놀라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흑!”


끝내 굵은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서예나는 내게 기댄 채, 한참을 울었다.

그간의 모든 고통과 설움이 담긴 눈물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색하게 위로 향해있던 손이 끝내 그녀의 등을 토닥인다.

눈물에 젖어가는 그녀의 바닥을 보며 나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습니다. 이제 다 괜찮습니다.”


유려하게 흔들리는 커튼 사이 어스름하게 비치는 달빛.

창문 너머로 밤하늘 가득히 서럽게 목 놓아 우는 서예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조용히 빌었다.

부디 그녀의 마음속에 갇혀 있던 응어리가 말끔히 사라지기를.


***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글쎄요.”


미약하게 남은 울음기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일단 상황을 해결하긴 했지만,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든 저렇든 방에 움직이는 시체(?)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경찰에 인계하고 사건 조사를 받으면 그만이지만, 그러기엔 우리의 신분이 그리 가볍지 않았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할까요?”

“아뇨, 어설프게 신고했다간 괜히 문제만 될 겁니다.”

“하, 하지만···”

“경찰서엔 마와리(특종을 잡기 위해 경찰서에서 기자들이 계속 대기하는 행위) 도는 기자들이 많아서 분명 기사가 날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 촬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스토커가 여배우를 살해하려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만 해도 심심치 않은데 심지어 그녀를 구한 것이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남배우다?

분명 가십을 좋아하는 기자들이 이를 토대로 온갖 소설을 가져다 쓸 게 뻔하다.

소속사에 넘긴다고 해도, 소속사에 출근하듯이 나타나는 기자들에게 걸릴지도 모르는데···

결국 이를 해결하려면 저 미친놈을 조용하게 처리해줄 공권력이 필요했다.


“······이런 식의 연락은 좋아하지 않는 친구이긴 한데.”

“친구요?”

“일단 도와달라고 해봐야죠.”


고소(苦笑)와 함께 품 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연주와 함께 가장 소중한 인연 중 하나.

익숙한 이름을 찾고서 나는 통화 버튼을 밀었다.


뚜, 뚜.


“어라 이게 누꼬?”


몇 번의 신호음과 동시에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잘 있었어?”

“내야, 부대 있을 때랑 비슷하제. 이 시간에 연락온거믄··· 소주 한잔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부탁?”


그로부터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긴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녀석의 직업 특성상 웬만하면 잘 부탁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부탁이라니 당황했을 것이다.


“마 설마 돈이가?”

“아니.”

“하긴 돈문제였으믄 차라리 연주한테 부탁했겠제. 그럼 설마 니··· 사고 칬나? 사람 한 명 골로 보낸기가?”

“···내가 무슨 조폭이냐?”

“조폭은 무슨, 차라리 조폭이믄 다행이제. 그리고 니랑 조폭이 붙으면 오히려 그 조폭 안부부터 확인해야 않긋나? 살아 있는지 숨은 잘 쉬고 있는지.”


수화기 너머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조직범죄에 휘말린 건 아니고, 네가 은밀히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청탁이나 범죄 은닉 도와달라는 이야긴 아니제?”

“내가 그런 걸로 너한테 부탁하겠냐?”

“하긴 니가 그런 걸 부탁할 사람은 아니제. 그럼 뭐꼬?”

“신고.”


몇 마디의 대화 끝에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껐다.

이윽고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지, 지혁 씨··· 바, 방금 누구예요?”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한 서예나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

황망한 표정의 그녀를 마주하며 나는 담담히 미소를 그렸다.


“친구입니다. 제 경찰 친구요.”


***


“하이고마, 아주 반쯤 쥑이삤네.”


문대성

하사 임관 동기이자, 5년의 세월을 같이 동고동락한 전우.

군에 남은 나와는 달리 전역 후, 경찰이 되어 현재는 형사로 근무하는 나의 든든한 뒷배이기도 했다.

서예나의 집에 도착한 대성이는 칠면조 비슷한 모양의 놈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연신 감탄을 흘렸다.


“딱 뒈지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놨다 아이가.”

“하하.”

“이기 웃을 일이가?”


고맙게도 통화가 끝나자마자 대성인 곧바로 서예나의 집에 찾아와 주었다.

사건 현장과 더불어 기절해 있는 놈을 몇 번이고 확인한 대성이는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흘겼다.


“니, 칼에 일부러 베였제?”

“티 나냐?”

“하모! 니 실력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아이가. 마, 우이됐든 흉기도 있꼬, 정당방위로 잘 포장하몬, 마 어떻게든 잘 될끼다.”


놈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대성이는 이윽고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라문 이눔아 데꼬 간데이.”

“뭐 조사 더 안 하고?”

“아, 딴 것 없고, 아무리 마글라 캐도 조사를 안 할 수는 없어가, 우리 쪽에서 조사팀이 올끼다. 그때까지만 여기 문 단디 닫고 들어오지 말라꼬만 전해줘라.”

“고맙다.”

“됐다마. 고마 많이 놀랬을낀디 조사는 신경쓰지 말고 저분 단디 챙겨드리라. 글고 이제 걱정 말라꼬 안심하라고 잘 전해드리고.”

“···마지막 말은 직접 전하는 게 낫지 않아?”


직접 전하라는 말에 그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한다.

설마···


“너 아직 그 버릇 못 고쳤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보니 정답인가 보다.

여자만 보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버릇.

군대에 있을 때야 그러려니 했는데, 경찰이 되고 사회 물 깨나 먹었을 텐데 아직도 못 고쳤을 줄이야.

대성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마, 마 여튼 내 간데이.”

“하여간··· 암튼 고맙다.”

“됐다. 나야 실적 쌓고 좋제. 나중에 연주랑 날이나 한번 잡아라. 소고기에 소주 한잔 캐야지 않긋나?”


친근한 사투리와 함께 대성이의 입가에 웃음꽃이 핀다.

분명 자기 일도 있을 텐데 이렇게 배려해주는 모습이 더욱 고맙게 다가온다.

대성이는 이윽고 놈을 들쳐 메고 현관을 나섰다.


“좀 괜찮으세요?”

“···네.”


서예나는 멍한 표정이었다.

하긴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이제 다 끝났으니 안심하고 푹 쉬세요.”

“···저는 왜 그럴까요?”

“예?”


나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갑자기 자기는 왜 그러냐니.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서예나의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내가 큰 죄를 짓고 태어난 걸까? 아니면 살면서 많은 죄를 지은 걸까.”

“선배님.”

“왜 내 주변에는 날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내가 그렇게들 미운······.”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흠칫 놀란 눈동자가 다시금 내게로 향했다.

나는 짐짓 굳은 표정으로 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지혁 씨.”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선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님도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는 저를 소중히 대해주는 분이 없잖아요.”

“왜 없습니까?”


쾅!


때마침 이랄까?


“예나야!”


현관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낯선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나야 모르는 사람이지만, 서예나에겐 아니다.


“매, 매니저 언니?”

“예나야!”


큼지막한 눈동자를 몇 번이고 끔뻑이던 서예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고정된다.

매니저는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곧바로 서예나에게 향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몸은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매니저는 이리저리 서예나의 안부부터 살핀다.

꼼꼼하게 서예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걱정이 한 가득이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던 서예나의 눈동자가 다시 그렁그렁하게 변한다.


“언니··· 흑!”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의 눈시울도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이윽고 친자매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하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여기 있잖아요. 선배님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


***


“자자, 카메라랑 장비 다시 한번 체크하고!”

“거기 선 정리 똑바로 안 해? 지나다니다 넘어져서 장비 부수면 책임 질 거야?”

“조명 거기에 두지 말랬지!”


그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마녀의 남자 첫 촬영일이 되었다.

그간의 노력을 확인하는 자리이니만큼 촬영장은 늘 그렇듯이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것일까?

늘 미리 도착해 준비하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왜 안 오시지?”


바로 촬영이 임박해 오는 순간에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에 가장 중요하고 핵심 인물이자 나의 상대 배우.

그녀가 아직 촬영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 배우 한 번 전화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까 연락해봤는데 거의 다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스태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곳곳에서 서예나에 관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거의 다 도착했다면 정말 다행인데, 아직 보이질 않으니 나도 한번 연락해 볼까?

그때였다.


“서, 서 배우님 도착하셨습니다!”


촬영장 한쪽 끝에서 어느 스태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오셨······”


이어지던 목소리가 점차 크기가 줄어들어 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도 행동을 멈춘 채, 어느 한 방향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얼마 감정이 담기지 않는 목소리.

다소곳하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동공을 가득히 채운다.

분명 내가 아는 서예나지만, 한 가지가 크게 달랐다.


“···서 배우 머리 잘랐어?”


바로 서예나의 머리칼이었다.

어깨를 넘어 날개뼈 인근까지 길게 내려오던 비단 같은 검은 생머리.

그게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머리였다면, 지금은 전혀 달랐다.

흑요석 같은 검은색이라는 것은 똑같지만, 날개뼈를 거의 넘어가던 길이가 어깨에 겨우 닿을 듯 말 듯 할 정도까지 짧아져 있다.

분명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지만, 나는 물론,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와, 미친.”

“서 배우 맞아? 헤어스타일 대박. 완전 멋있잖아!”

“예나 씨 저렇게 예뻤던가? 이제 보니까 완전 미인이시네. 긴 생머리도 잘 어울렸는데 단발도 엄청 잘 어울려!”

“···나도 머리나 자를까?”

“아서라, 너나 나나 저렇게 단발하면 그나마 있던 머리빨도 사라진다.”


중간에 이상한 소리가 끼어있긴 하지만, 서예나의 머리는 정말 잘 어울렸다.

무표정 때문에 차가워 보이던 인상이 헤어스타일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훨씬 예쁘고 멋있어 보인다.

조금 부끄러운 것일까?

살짝 붉어진 볼을 누르며 서예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내 앞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탓에 그녀와의 시선이 일직선상에 맞닿는다.


“머리··· 잘 어울려요?”


서예나의 무표정에 점차 균열이 인다.

부끄러움과 불안으로 점철된 얼굴.

하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괜한 걱정이다.


“엄청 잘 어울리셔요. 오늘 이렇게 예쁘게 해도 괜찮은 거예요? 다들 선배님만 쳐다볼 것 같은데.”


해맑게 웃으며 나는 양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무표정이라는 이름의 가면이 벗어지며 서예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저번에는 지혁 씨가 제 감정을 끌어올려 줬죠? 기대해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환한 미소.

그 미소에 심장이 빠르게 뛴다.


“오늘은 제가 지혁 씨 감정을 끌어올려 줄 테니까.”


작가의말

2021년 신축년 첫 업로드네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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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Act 35. 마녀의 남자 - (2) +16 20.12.29 12,106 296 20쪽
34 Act 34. 마녀의 남자 - (1) +14 20.12.28 12,898 293 20쪽
33 Act 33. 꿈이 무엇입니까? +12 20.12.27 12,759 304 19쪽
32 Act 32.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4) +13 20.12.26 12,709 294 20쪽
31 Act 31.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3) +12 20.12.25 12,432 286 17쪽
30 Act 30.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2) +20 20.12.24 12,725 308 20쪽
29 Act 29.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1) +18 20.12.23 13,175 30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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