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배우로 전직을 명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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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운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0.11.27 17:58
최근연재일 :
2021.01.1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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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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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Act 43. 마지막 퍼즐

DUMMY

“자,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짜랑!


맥주와 소주.

시원한 탄산을 머금은 황금빛의 맥주와 투명하고 개운한 무색의 소주를 담은 잔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가게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유리잔 소리에 사장은 물론 우리들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번진다.


2016년 7월 초.

초회 시청률 10%로 시작한 마녀의 남자는 어느덧 모든 촬영을 끝냈다.

본편은 아직 방영 중이지만, 그마저도 이제 약 2주 남짓이면 끝이다.

종방까지 약 2주.

다소 이르 시점이긴 하지만 우리는 조촐하게 회식을 가졌다.


“이번에 못 해도 해외여행 정도는 포상으로 나오겠지?”

“그럼요 시청률을 보세요. 20%를 넘겼는데 그 정도 포상도 없이 설마 입 싹 닫겠어요?”


현재 <마녀의 남자>의 성적은 평균 시청률 20.4%.

다른 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분명 초대박까지는 아니지만, 입봉작임을 가정했을 때 작금의 성적은 대박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평소 바쁜 업무로 인해, 여행과 담을 쌓는 방송국 사람들도 회사에서 지급될 포상에 벌써부터 군침이 싹 돌기 시작한다.

이는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포상 나오면 어디로 나올까요?”

“괌이나 몰디브 이런 데로 나오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지혁 씨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글쎄요. 해외는 많이 가봐서요.”

“헐? 진짜요?”


선선히 웃으며 대답하자 다른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까지 당혹성을 터뜨린다.

해외 경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 여행은 아니었지만.


“지혁 씨 특전사라고 하지 않았어?”

“군인도 해외여행 갈 수 있어요?”

“군인도 지휘관의 승인만 받으면 해외여행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절차상 조금 귀찮아서 잘 안 가긴 합니다만··· 저 같은 경우엔 여행보단 파병이었죠.”

“파, 파병이요?”

“네, 아랍에미리트나 이라크 등등 몇 군데 좀 다녀왔습니다.”

“와아···”


저마다 술로 간을 적시던 이들에게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특전사라 그런가 클라스가 좀 많이 다르네.”

“해외라기에 당연히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파병일 줄은···”

“이럴 때 보면 진짜 참군인이었다니까.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연기 하나 몰라.”

“크하하, 군대를 다녀왔으니까 그렇게 잘하는 거야. 내 저번에도 말했잖아. 군 생활이 힘들었던 만큼 그때의 경험이 다 연기로 승화된 거라고. 우리 정 배우 봐, 연기 아주 기깔 나잖아?”


연거푸 소주잔을 꺾던 홍정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근에 있던 이들은 벌써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반면 홍정호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물처럼 소주를 마시고 있다.

배우계에서도 소문난 주당이라더니, 그 말이 허명이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우리 1등 공신 지혁 씨 한잔해요!”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그가 소주잔을 내밀고선 곧바로 잔을 부딪친다.

씨익 웃으며 곧바로 잔을 꺾는 모습에 나 역시 들고 있던 잔을 입속에 털었다.


“크으, 오늘따라 소주가 정말 다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지혁 씨.”

“별말씀을요. 고생은 감독님이 더 하셨죠.”

“지혁 씨 덕분에 홍보도 정말 잘 되고, OST도 잘 빠져서 이번에 지혁 씨 덕을 톡톡히 봤어.”


술기운 때문일까?

박수일은 평소와는 달리 그동안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고개마저 슬슬 내려가는 것이 제대로 취한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전에 얻은 새로운 재능을 떠올렸다.


- 재능 : 시선(視線) -

설명 : 시선에 보다 효과적이고 다양한 감정을 담을 수 있습니다.


정말 짧고 간결한 설명.

설명만 보면 그리 대단한 능력은 아니다.

그저 시선에 감정을 닿는 것이 전부이니까.

하지만 이 시선으로 인해 상대방 역시 몰입하게 되고, 그 감정에 공감하게 되면서 나의 연기는 훨씬 더 농후해졌다.

그 결과는 시청률과 시청자들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 와, 정지혁 눈빛 뭐냐. -

- 전에도 눈빛 쩐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살살 녹네. -

- 내가 상대 배우였으면 바로 고백했을 듯 -

- 오늘도 시선에 치이고 갑니다. -

- 아직도 1일 1영상 안 하는 흑우가 있다? 뿌슝빠슝뿌슝?! -


재능이 생기는 것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금세 달라졌다.

이전보다도 시선 처리가 훨씬 자연스러워지고, 눈에 담긴 감정이 더욱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연기력이 한층 더 발전함에 따라,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은 보다 쉽게 작품 속에 몰입하게 되었다.


“세상에 20%를 넘길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와, 선배 너무하네. 나를 뭐로 보고.”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푸념에 옆에 있던 백인화가 서운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후배의 눈치에도 박수일은 피식 코웃음을 칠 뿐이다.


“누가 네 시나리오 별로래?”

“그게 그 말이죠.”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여기 배우이랑 다른 스태프들에게 감사의 말이나 전해. 네 입봉작에 무려 대박을 안겨주신 분들이 아니냐?”


박수일이 키득거리며 연거푸 술을 들이키던 다른 이들을 가리킨다.

치트키처럼 같이 고생했던 이들을 가리키자 백인화의 입가에도 은근한 미소가 번진다.


“제가 좀 성깔이 있어서 그렇지,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당연히 우리 배우님들과 스태프들 덕분에 단어 그대로 작품이 나온 거죠. 안 그렇습니까?”

“오오!”

“그런 의미로 여기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이 오늘 2차 쏘는 걸로 할까요?”

“좋습니다!”


가게를 가득 채운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와 더불어 사장님의 입가에도 진한 미소가 번진다.


“역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면··· 역시 정 배우!”

“암, 암! 정 배우만큼 화제를 몰고 온 사람 없잖아?!”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다들 나를 보고 환호성을 띄우는데 나는 멋쩍은 듯이 웃어 보일 뿐이다.

마침 그 표정을 읽은 것인지 지켜보던 백인화가 재차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 지혁 씨가 엄청난 공을 세우긴 했죠. 하지만 여러분 배우분들도 스태프분들도 모두 고생하셨지만, 준비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공을 들이신 분이 누굽니까? 입봉작인 제 시나리오를 끌어올린 분이 누굽니까?”

“감독님!”


그 순간 웃고 있던 박수일의 입가가 경직된다,


“설마!”


뒤늦게 그녀의 속내를 알아챈 박수일이 황급히 그녀에게로 다가가지만.

너무 늦었다.

백인화는 나와 눈을 맞추고는 다음 말을 외쳤다.


“그런 의미로 2차는 우리 박 감독님이 쏘신답니다!”

“와아!”


마치 예능 프로의 MC와도 같은 백인화의 손짓에 모두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박수일이 뒤늦게 백인화를 불러보지만 이미 늦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박수일의 목소리는 탄성에 묻혀 아스라이 사라질 뿐이었다.

환호성 사이에서 백인화가 한쪽 눈을 깜빡인다.

시트콤을 방불케 하는 두 선후배를 보며 나는 웃으며 소주를 홀짝이려 하지만.


“잠깐!”

“···에?”

“에이, 그렇게 혼자 마시는 게 어디 있어요?”


어디선가 다가온 가느다란 손이 내 팔을 누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 오른팔을 내렸다.


“그러지 말고 같이 한잔해요,”

“주 선배님?”


<마녀의 남자>의 남자 주인공, 주승호

탄탄한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항상 주변 이들을 챙겨주는 훌륭한 인품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자애로운 주승호님을 줄여 ‘주님’이란 별명으로 불리곤 할까.


“자, 건배!”


짜랑!


늘 그랬듯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과 더불어 그가 잔을 부딪친다.

환하게 웃는 그 모습에 나 역시 웃으며 소주잔을 꺾었다.


“크으, 역시 좋은 사람이랑 마시니까 더 좋네요.”

“역시 선배님이 좋은 분이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에헤이, 당연히 지혁 씨랑 마셔서 그런 거죠. 안 그래?”

“네.”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주승호가 옆으로 시선을 던진다.

조용히 안주를 집어 먹던 서예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손 사이로 보이는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적당히 취기가 오른 모양이다.

홍정호의 손에 붙잡혀 꿀떡꿀떡 마시던 결과다.

한참을 오물거리며 안주를 먹는 그녀를 보며 주승호는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저 녀석이랑 같이 연기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에이, 고생은요.”


옆에 있던 서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주승호를 노려본다.

그동안 계속 같이 호흡을 맞춘 덕분인지.

둘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남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 선배가 항상 잘 챙겨줬습니다.”

“서 선배? 뭐야 아직 둘이 말 안 텄어요?”

“그, 그게···”


화들짝 놀란 서예나가 은근히 시선을 피한다.

그러고 보니 나랑 동갑이었던가?

마침 새로운 놀림거리를 찾았는지 주승호는 서예나를 보고 이죽거리기 시작한다.


“뭐야 그렇게 지혁 씨 이야기만 매일 하더니 아직 말도 안 놓은 거였어?”

“오빠!”

“지혁 씨 서운해하겠다. 네가 먼저 말을 놓으라고 편하게 해줘야 지혁 씨도 편하게 말하지.”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주승호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번진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술은 어느새 뒷전이 되었는지 다들 음흉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서예나를 쳐다본다.

하여간 이럴 때만큼은 단합력 정말 좋다.


“예나가 먼저 말하기 어려운가 본데 그럼 지혁 씨가 먼저 말 편하게 해봐요.”

“제가요?”

“이제 종방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계속 누구 씨 누구 씨 하면서 지낼 거예요?”


하긴 그것도 이상하다.

그렇게 불편한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주승호의 말에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서예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부딪치는 시선 끝에 나는 웃으며 입술을 떼었다.


“예나야.”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뺨이 불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입꼬리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리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자, 예나 너도.”

“아, 알았어요!”


서예나가 소주를 들이켜고는 심호흡을 거듭한다.

이름 부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니 조금 안쓰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지··· 지··· 지··· 혁아.”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서예나를 보자 다른 이들의 입에서 휘파람이 터져 나온다.


“캬아, 술맛 조오타! 주모··· 아니, 사장님 여기 소주 2병 아니 5병 더 주세요!”

“여기 육사시미도 2인분 주세요!”

“인간들아 적당히 시켜!”


구석에 있던 박수일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쳐 보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여기저기서 웃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헛웃음이 터질 것 같다.


“승호야! 거기 애들 괴롭히지 말고 이리와. 나랑도 한잔해야지!”

“에이, 선배님 저 술 얼마 못하는 거 아시면서.”

“얼마 못하기는! 너 주당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지 말고 같은 주당끼리 한잔하자고.”


한쪽에서 다른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홍정호가 주승호를 부른다.

마지못해 가는 척을 하면서도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우는 것을 보니 그도 술이 고팠던 모양이다.

갑작스레 주승호가 빠지자 남은 것은 나와 예나뿐이다.

주승호가 멀찍이 사라지자, 예나는 시선을 떨구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


갑자기 목소리 톤이 변한다.

분위기에 젖은 다른 사람들 사이로 나직한 예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뭐가?”

“그냥 다.”

“에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네 덕분에 다시 연기할 수 있게 됐잖아. 그 스토커도 떨쳐내고.”

“······”


술기운 때문일까?

예나는 평상시 꺼낸 적 없던 속마음까지 전부 드러내었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발음은 다 어디 간 것인지, 갑작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예나에게로 시선이 고정된다.


“이렇게 다시 배우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거. 다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예나는 진심을 전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본 어떤 미소보다도 훨씬 더 밝고 환한 미소를.


***


한편 그 시각.

기분 좋은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짜랑!


여기 이곳.

규모도 적고 훨씬 더 조용하긴 하지만, 두 남자는 조그만 호프집에서 자신들의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비워진 소주만 벌써 3병째.

슬슬 취기가 오를만한 양임에도, 두 사람의 얼굴색은 그대로다.

굳이 변한 점을 고르자면, 한껏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 딱딱하던 말투가 살짝 풀어진 정도였다.


“크으, 형님하고 소주도 오랜만이네.”

“소주 좀 같이 한잔하게 언제든 부르라니까.”

“아니 그걸 형님이 불러야지. 손아랫사람인 내가 형님을 부르게?”


킬킬거리며 금세 잔을 비워낸 남자는 다시금 소주병을 잔을 향해 기울인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형은 피식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이제 우리도 그럴 나이가 됐잖수? 옛날처럼 멋모르고 세상에 달려드는 나이는 아니니까.”

“허이고, 나이도 아직 사십밖에 안 먹은 놈이 뭔 소리야?”

“그야, 오십을 바라보는 형님 눈에나 그렇지. 나도 이제 늙었수다. 여기저기 쿡쿡 쑤시는 것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소주잔을 가득 채운 남자는 오른손으로 왼어깨를 두드리며 아픈 시늉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형님에겐 가소로울 뿐이다.


“이놈아 사십이면 한참 젊은 나이다. 한창 현역으로 날아다닐 놈이 엄살은. 나 때는 말이야, 선배들 앞에서 그런 소리는 입 밖에도 못 냈어.”

“그놈의 라떼는 카페 가서 찾으시고.”

“아무튼 이놈아. 엊그저께 저예산 영화로 대박 친 놈이 그런 약한 소리나 하면 쓰겠냐?”


저예산 영화.

본인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시작했던 영화 <수라>를 떠올리던 남자, 차성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진다.

형님의 말대로다.

때늦은 사춘기랄까?

그 누구의 도움도, 개입도 없이 자신만의 영화를 찍어보자 했던 영화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물론 제작 과정 중에 현실적인 이유로 몇몇 회사에서 조그마한 예산을 투자받고 몇 가지 사건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무색하게 세상은 그의 영화를 인정해 주었다.


“120만이라고 했냐?”

“127만이요, 형님. 7만은 왜 뺍니까?”

“그래, 네 똥 굵다.”

“아, 술맛 좋은데 더럽게 똥 얘기는!”


차성우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를 지켜보던 형님은 킬킬거리며 자기 몫의 소주를 털어 넘긴다.

알싸한 소주의 향이 식도를 넘어 전신으로 퍼진다.

한참 동안 소주의 향을 음미하고서야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

“정말로 고생 많았어.”

“낯부끄럽게 안 하던 소리를 하고 그런데?”

“클클, 이제 뭐 할 거냐? 소원대로 네 영화도 만들었으니 이 바닥 정리할 거냐?”

“형님 미쳤수? 여기까지 왔으면 끝을 봐야지. 내 능력은 입증했으니, 이제 남은 건 천만이지 당연히.”

“미친놈.”


낮은 욕지기와 함께 형님은 원 없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천만.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야 정말 쉽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억대의 제작비를 갈아 넣고서도 망하는 케이스가 왜 나오겠는가.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천만을 넘은 국내 영화는 겨우 20개 남짓이다.

물론 해를 거듭할수록 시장이 커지고, 투자자와 인재도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나, 진지합니다.”

“그래, 저예산으로 100만을 찍었으니 투자까지 제대로 받으면 못할 것이 있겠냐? 하지만 다음은 안 돼.”

“······설마 다음은 형님이 한다는 말 하려고 그러요?”

“왜 너는 되고 난 안 되냐?”


낄낄거리는 형님의 모습에 차성우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 영감탱이 노망났네.”

“노망은 무슨! 그런 소리 하기 전에 이거나 읽어봐!”


형님이라 불린 남자는 씩씩거리면서도 퉁명스럽게 차성우를 향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익숙한 모양의 갈색 종이봉투.

갑작스럽게 훅 다가오는 봉투를 받아들며 차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요?”

“다 읽고 이야기해.”


형님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소주잔을 꺾는다.

차성우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가 내민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을 꺼냈다.


“시놉? 형님이 쓴 거요?”

“······”


형님은 더 말이 없었다.

일단 다 읽고 이야기하자는 신호.

차성우는 대답하지 않는 형님을 흘기고는 천천히 대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성 감독이라 그런지 천천히 넘어가던 시놉시스가 점차 그 속도를 더한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기자 시놉시스 너머로 조용히 웃고 있는 형님의 얼굴이 들어선다.


“어떠냐?”

“형님 미쳤수?”


어느 정도 예상되던 대답이다.

형님은 킬킬거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지만, 차성우는 진심이었다.


“대체 이런 걸 언제 생각한 거요. 스케일이 최소 2년은 쓴 것 같은데.”

“내용은?”

“소재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내용은 괜찮습디다. 특히 캐릭터가 살아있네. 완전 입체적이고 그사이에 녹아있는 인간상까지 아주 잘 표현했어. 제대로 지원만 받쳐주면 청불 받아도 500만은 넘겠수.”


그 깐깐한 차성우의 입에서 연신 칭찬이 쏟아진다.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말을 듣던 형님은 이내 조그맣게 속삭인다.


“캐스팅도 웬만큼 끝났다.”

“벌써?”

“한 명만 알려주자면 거기 박동수 역할엔 마상범 배우 들어갈 거야.”

“마상범? 요새 신스틸러로 유명한? 캬, 우리 형님 아주 작정했네.”


차성우가 진한 감탄을 터뜨린다.

직접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적절할 수도 없는 캐스팅이다.

남은 배우만 잘 살리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근데 한 명이 아직이야.”

“누구?”

“신율 역.”

“하긴 난감하긴 하겠네. 사이코패스라니. 영화 특성상 액션 씬도 많을 텐데 여기서 신율은 훨씬 더 복잡한 캐릭터라 연기력이 웬만큼 안 받쳐주면 힘들겠더만.”


차성우가 안타까운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할도 역할이지만, 하필 자기보다 깐깐함은 더한 양반이니 캐스팅에 더 난항을 겪겠지.

시놉시스를 본 입장으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지 정말 궁금한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도 한 신율이 미정이라니 괜스레 자신이 속이 쓰리다.


“맘에 드는 배우는 있수?”

“그래서 그런데 네가 다리 좀 놔줘야겠다.”

“내가?”


차성우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졌다.

자기보다 경험도 인맥도 훨씬 넓은 사람이 갑자기 다리를 놔 달라니 순간적으로 어이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형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진다.


“왜, 네가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배우 있잖아.”


너구리 같은 미소에 불현듯 딱 한 명의 배우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 말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래 있던 형님은 모르지만 자신은 알고 있으면서, 까탈스러운 것 하나로는 범접할 사람이 없는 그가 이렇게까지 호기심을 보일만 한 배우.

이번에 수라에서 엄청난 임팩트를 선보이며 화려하게 데뷔한 괴물 신인.


“···설마, 정지혁 배우?”


차성우의 추측은 이윽고 정답이 되었다.

그를 증명하듯 형님, 영화감독 황태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기 때문이다.


“그래, 그가 내 시나리오를 완성시켜줄 마지막 퍼즐이다.”


작가의말

조만간 제목이 변경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사항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변경 예정 제목은 <천재 배우로 전직을 명 받았습니다> 입니다!

이 제목이 최종 변경이 될지 추가 변경이 있을 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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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Act 45. 잡초를 뽑을 땐 뿌리까지 - (2) +19 21.01.08 9,918 311 15쪽
44 Act 44. 잡초를 뽑을 땐 뿌리까지 - (1) +21 21.01.07 10,303 257 18쪽
» Act 43. 마지막 퍼즐 +15 21.01.06 10,793 273 20쪽
42 Act 42. 너 인성 문제 있어? +23 21.01.05 10,491 312 18쪽
41 Act 41.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 (2) +17 21.01.04 10,791 294 20쪽
40 Act 40.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 (1) +16 21.01.03 11,210 295 19쪽
39 Act 39. 마음의 치료사 - (3) +19 21.01.02 11,142 308 17쪽
38 Act 38. 마음의 치료사 - (2) +14 21.01.01 11,219 305 19쪽
37 Act 37. 마음의 치료사 - (1) +22 20.12.31 11,714 321 20쪽
36 Act 36. 마녀의 남자 - (3) +24 20.12.30 12,175 289 18쪽
35 Act 35. 마녀의 남자 - (2) +16 20.12.29 12,105 296 20쪽
34 Act 34. 마녀의 남자 - (1) +14 20.12.28 12,897 293 20쪽
33 Act 33. 꿈이 무엇입니까? +12 20.12.27 12,757 304 19쪽
32 Act 32.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4) +13 20.12.26 12,709 294 20쪽
31 Act 31.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3) +12 20.12.25 12,432 286 17쪽
30 Act 30.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2) +20 20.12.24 12,725 308 20쪽
29 Act 29. 액션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 (1) +18 20.12.23 13,175 30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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