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만남
황 범이 뒤돌아서자 어느 낯선 한국인이 서있었다.
그 남자는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덕분에 황 범은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다.
황 범은 권총을 들고 있던 낯선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 말을 꺼낼 때 그때가 기회다. 달려들어서 목을 부러뜨리겠어.’
“황 범 님 맞으시죠?”
그런데 뜻밖에 그 남자는 황 범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황 범은 잠시 멈칫 했다.
물론 매우 재빠른 도약이 주 특기인 황 범의 몸은 벌써 그의 앞까지 다가서있었다.
“휴우. 이름 말 안했으면 저도 죽을 뻔 했네요. 멈춰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잖아요. 좀 참을성도 좀 갖으시고 인내심도 좀 갖으시고 그래주셨으면 좋겠네요.”
그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유머러스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황 범은 묵묵부답으로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기에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아, 저부터 소개드리겠습니다.”
낯선 남자는 야구 모자를 벗으며 황 범에게 말을 했다.
“대한제국의 러시아지부에서 활동 중인 13도의군의 막내 독립군, 최 종훈이라고 합니다.”
황 범은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했다.
러시아의 정보기관에서 보낸 첩자일수도 있었고 도망치던 자신을 따라온 중국 공안 요원일수도 있었다.
“아, 여전히 못 믿으시는 군요. 괜찮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그럼 이걸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남자는 품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저와 비슷한 사진을 가지고 계시죠?”
그 사진은 13도의군의 독립군 의병들의 단체 사진이었다.
황 범 역시 철민이의 아버지인 중국지부 독립군 대장 김 창식과 열 명의 동료들과 함께 찍은 똑같은 구도의 사진이 있었다.
그제야 황 범은 씨익 웃었다.
“와! 2미터가 넘는 거구의 황 범님이 웃으시니 묘하게 무섭네요.”
그 이야기를 들은 황 범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곤 황 범은 크고 넓적한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반갑소. 13도의군 조선지부에서 활동 중인 황 범이라하오.”
“넵! 전설의 황 범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하하하하. 과찬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10년 전에 조선지부 공안 본부건물을 다 날려버리고 그 안의 공안 요원을 전 부 죽인 전설의 인물이신데요.”
“뭐, 그건 인정합니다. 하하하하.”
“그리고 방금 전에는 또 새로운 신기록도 세우셨더군요.”
황 범은 놀랍다는 듯 웃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슈즈를 비롯해서 조선지부 공안을 다 죽이셨다고요······. 2개의 보병 대대를 몰살하셨고요.”
“그걸 어떻게······.”
“저희의 소식통은 조선 지부와 조금 다른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시죠.”
황 범은 살짝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독립군 의병들의 기념사진을 가지고 있는 멤버라고 해도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의심한다 한들 달라질게 없으니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뭐, 좋소.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오?”
“아! 그 이야기를 깜빡하고······. 워낙에 황 범님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셔서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못 드렸습니다.”
“괜찮소. 얘기 해 보시구려.”
“저희 러시아 지부 13도의군 의병대 대장님이 조심히 모셔오라고 보내셨습니다. 즉, 황 범 님을 모시러 나왔습니다.”
“······.”
황 범은 속으로 복잡해졌다.
‘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나? 나 혼자 못할 거 같아서 이러나? 아니지. 또 길잡이가 있어주면 좋긴 한데. 러시아에 대해선 아는 게 없으니. 이걸 좋아해야해? 아니면 돌아가라고 해야 해?’
“아! 황 범님, 황 범님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고 보내신 게 아니고 하루라도 더 빨리 안전하게 모시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먼 길 돌아가지 않도록 제가 길잡이 역할을 하겠습니다.”
마치 황 범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러시아 지부의 독립군 최 종훈은 황 범에게 친절히 이야기를 했다.
‘눈치 하난 빠르구만.’
황 범은 속으로 최 종훈을 기특해했다.
“그럼 오늘부터 제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연방은 중국 연방과 좀 다릅니다. 복장을 최대한 평범하게 입으시기만 하면 검문을 받는다든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인 즉은 옷을 갈아입으란 이야기오?”
“네 맞습니다. 지금은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복장이거든요. 그리고 메고 계신 배낭이랑 그리고 또, 저 큰 가방역시······.”
“가방은 안 되는데······.”
“아! 저도 왜 안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조선지부 독립군 대장님의 아드님이 계시단것도 알고 있습니다.”
‘대체 러시아 지부의 독립군들은 모르는 게 뭐야? 이 사람들 독립군 맞긴 맞아? 러시아 측의 정보요원들이 독립군인척 하는 거 아냐?’
순간 황 범은 더 의심스러웠다.
모르는 게 없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아! 의심스러우신 건 이해합니다. 제가 너무 모르는 게 없죠.”
황 범은 최 종훈의 이야기를 듣자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더 의심스러웠다.
황 범은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물론 의심스러우신 건 이해합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그런 큰 가방을 들고 다니시면 너무 눈에 띕니다.”
황 범은 잠자코 그를 쳐다만 봤다.
그러자 최 종훈은 더욱 당황해하며 황 범에게 말했다.
“더군다나 그냥 대충 봐도 81식 중국 소총에 미군 무기에 M16 A1도 있으시고, 이렇게 온갖 무기가 다 들어있는 엄청 큰 배낭까지 메고 계신데 이러시면 러시아 KGB에게 신고가 들어갈 겁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황 범은 무거운 입을 땠다.
“그럼 어쩌란 말이오.”
”일단 저희 아지트에 가셔서 짐 정비를 하시죠.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계획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황 범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이었다.
“황 범님. 처음 본 저를 못 믿으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황 범님.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거든 그냥 저를 죽이십시오. 2개의 보병 대대를 섬멸하고 연방지구의 최정예 공안요원들을 다 죽인 분이 무언들 못하시겠습니까?”
황 범은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의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냥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무지 단순한 논리의 황 범이었다.
“좋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오?”
“일단 제가 차를 가지고 왔으니 제 차로 저희의 임시 아지트로 모시겠습니다. 그 곳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도록 하시죠.”
“좋소. 그럼 안내하시오.”
최 종훈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
한 손으론 철민이를 안고 한 손에는 방탄가방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황 범은 최 종훈을 따라갔다.
“그 가방 제가 대신 들어드릴까요?”
황 범은 속으로 웃었다.
‘무거울 텐데.’
“뭐 그래도 좋소. 그럼 부탁하오.”
“그럼 제가 부족한 힘이지만 돕도록 하겠습!”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어흑!”
“왜 그러시는 거요?“
“저, 저기······. 황 범님 이거 빈 가방 맞죠?”
“그러하오만. 왜 그러시는지······.”
“아, 아닙니다.”
황 범은 피식하면서 웃었다.
황 범은 재밌다는듯 그냥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저, 저기······. 황 범님? 이거 그냥 저기? 황 범님?”
황 범은 못들은 척 하며 천천히 걸었다.
***
황 범의 눈앞에 러시아와 피아트가 합작해서 만들었다던 그 유명한 <라다 쥐굴리> 승용차가 보였다.
저렴한 가격에 널리 보급된 자동차였다.
러시아의 험난한 지형을 달리기 위한 후륜구동 모델이었다.
그렇지만 타고 다닌지 10년은 된 듯 했다.
“낡은 차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잘 달려요. 가끔 보면 소련 놈들 기술력은 좋은 편이에요.”
황 범은 그의 짐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러자 차 뒷부분이 축 하고 내려갔다.
“도대체 저기 들어있는 짐들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겁니까?”
황 범은 어깨를 으쓱 하며 잘 모르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런 그를 보자 최 종훈은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
밤 깊은 시골길을 벗어나자 포장된 도로가 나왔다.
차량 뒷좌석엔 철민이와 황 범이 타고 있었다.
철민이는 잠을 자고 있었다.
황 범은 여전이 눈을 부릅뜨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러시아는 좀 특별합니다.”
조용한 차 안에서 문득 최 종훈이 말을 꺼냈다.
“러시아는 중국과 많이 다릅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인들이 무얼 하는지 신경을 안 써요. 그래서 우리도 한국인처럼만 활동하면 별 무리 없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수 있습니다.”
황 범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바로 신원확인입니다. 러시아 연방정부에서 발급된 아이디 넘버가 있습니다. 그게 있어야만 넘어갈 수 있어요.”
“난 애초에 그렇게 안하려 했소.”
“네?”
잠자코 있던 황 범이 말을 꺼냈다.
“난 산 사람이오.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란 사람이오. 난 산맥을 따라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려했소.”
“예?”
최 종훈은 그 야이기를 듣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를 걸어서 가신다고요? 왜요?”
“그거야 뭐, 그게 더 안전하니까.”
“그게 안전해요? 거기까지 걸어가시면 한 달 이상 걸릴 텐데요.”
“난 보름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로 계획 했소.”
최 종훈은 여전히 놀란 상태였다.
‘1000km가 넘는 길을 보름 만에 걷는다니······. 괴물이야 사람이야? 같은 편인 게 천만 다행이군······.’
“아, 아니 그 길을 어떻게 걷습니까? 포항에서부터 내륙지방으로 이동 할 때 1000km가 넘는데요.”
“아! 아니 내 말은······.”
“이야! 역시 전설의 황 범님이시네요. 대단하십니다.”
황 범은 순간 사실대로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사실 그게 아니고 포항까지 이동해서 그 다음부턴 배를 타고 가려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려 했던 황 범은 그냥 아무 말 안하기로 했다.
그게 더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정말 전설은 다르군요!”
황 범은 연신 속으로 찔렸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경남 합천군 가야산 근처의 작은 도시였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황 범은 짐을 다 내린 후 아직 잘 자고 있는 철민이를 안고서 최 종훈을 따라 갔다.
“저 길로 가면 경남 합천의 그 유명한 해인사 사찰이 나옵니다. 중국 19연방지구에선 이젠 우리나라 사찰을 못 본다죠?”
“그렇소. 안타깝게도 짱꼴라 놈들이 다 태워버렸소.”
“짱꼴라 들이란······. 그 유명하고 좋은 문화 유물들을 왜 다 태워먹어서.”
“모택동이 원래 그러잖소. 모택동이 그냥 곱게 디졌으면 상관없는데 그 놈이 죽기직전까지 대한제국의 문화를 모두 불태우라 했소. 그래서 그만 다 타버렸던 거요.”
“미치광이죠. 그 놈은.”
황 범과 최 종훈은 이런 저런 양측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여깁니다. 우리들의 아지트가.”
“방앗간?”
“네. 맞습니다. 방앗간입니다.”
“여기가 아지트요?”
“네. 공작 활동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죠. 자금 돌리기도 수월하고요. 일단 들어가시죠.”
“좋소.”
황 범은 철민이를 안고 한 손에는 방탄가방 손잡이를 잡고 끌며 등에는 한 가득 무기가 담긴 배낭을 메고 아지트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지트의 길 건너편의 3층 양옥집 창문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쌍안경과 망원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보고 있던 것이다.
“이반1. 보고 합니다. 목표물 확인 되었습니다.”
“이반1. 계속 감시하도록.”
“다!(러시아어: 네! Д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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