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9개월차 -2-
전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소중한 목숨, 시간, 자원, 경제, 정치...
그리고 영국과 청국은 그 인명과 자원, 돈과 시간을 갈아가며 피튀기는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이번 청과 영국의 전쟁은, 시작만 따지고 본다면 영국에게 책임이 좀 더 있었다.
차와 도자기에 빠진 영국은 청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도자기와 비단, 그리고 차를 수입했고, 그것을 대신하여 이제 막 시작된 산업혁명의 힘으로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나오는 면직물과 모직물을 팔고자 했다.
그러나, Made in China의 위엄은 이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직물들이 분명 기존 직물들보다 값싸고 질도 균일했으며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기는 했으나...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뽑아내는 직물들만큼 가격이 싸지는 않았다.
게다가 모직물은 중국에서 인기도 별로 없었다. 세탁도 어렵고 중국 남부지방에서 입기에는 쓸데없이 더웠으며 관리도 힘든 그것이 팔리는 일은 없었다.
결국 영국은 아편을 팔아 그 무역 적자를 메꾸는 데 거의 성공하는 듯 했으나... 황제가 나라를 갈아엎다시피 하며 영국산 아편의 수입을 금하고 심지어 영국에게 선빵을 날리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깔끔하게 모두 죽여 입을 막고 시간을 버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청국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략에서는 패한 셈이 되었고, 영국은 인도를 소화하지 못해 끙끙대는 와중에도 결국 개전을 결정하고야 말았다.
애초에 선빵을 맞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건 또 영국이 아니기도 했고.
청국도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역시 전쟁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영국이 청국에게 요구한 조건은 청국이 선빵을 날렸다고는 해도 사실상 항복에 가까운 수준의 조약 체결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청에서 불법으로 몰수한 아편을 순은 3000만 냥으로 배상한다.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순은 1억 냥을 대영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1개월 이내에 5천만 냥, 24개월 이내에 또 5천만 냥을 지불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15%로 한다.
청의 중요 핵심 항구 5곳을 전부 개항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차후 영국 시민은 청 황제와 맞먹는 동등한 지위를 약속한다.
광둥 지역에서의 무역을 전쟁 이전으로 복구한다. 모든 복구비용은 청나라에 귀속한다.
당시 청의 1년 예산이 4천만냥 전후였으니, 사실상 3년치 이상의 예산에 해당하는 순은과 함께 영토의 할양, 개항, 그리고 영국 시민과 황제의 지위를 동급으로 올려달라는 요구를 하며 전쟁과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으니, 청국 입장에서도 전쟁이 차라리 낫겠다 싶은 옵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사영과 그 일당들이 만들어놓은 신기술과 신무기들이었다.
영국은 조선 공충도에서 개발된 기관총과 철갑선, 비행선 등 신규 무기체계에 매우 만족을 표하고 있었고, 그 소식은 거의 실시간으로 청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청 황제는 시간을 더 끌 경우 영국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황제는 일부러 북경의 방비가 허술한 것처럼 해서 깊숙이 영국군을 끌어들인 후, 참호와 우수하고 많은 인력을 바탕으로 한번에 영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영국군 또한 조선 조정이 청 조정과 결탁하여 공충도의 기술과 무기를 빼돌리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고, 실제로 화승식 기관총이나 볼트액션과 자모포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한 과도기적 후장식 총기등을 노획한 후 청국의 군사기술 발달 속도에 우려를 표했다. 그들 또한 동시에 인도와 청국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부담이 컸기에, 일단 청국부터 빠르게 정리하고 인도의 문제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북경과 천진(天津, 톈진)을 잇는 운하를 따라 북경 코앞까지 들어간 영국군과, 북경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성곽과 그 중간중간 몇 겹으로 파둔 참호를 따라 우주방어를 하고 있는 청국간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황하 하구로 들어간 배는, 청국이 열심히 재건해둔 대운하의 종점, 천진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 중심까지 40km를 남겨둔 지점까지는 저항다운 저항 한번 맞이하지 않고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2년여에 가까운 시간동안 해안가와 강 하구의 시설과 마을들에 대해 꾸준히 파괴 및 거부 임무를 수행해 온 까닭에 청국 해군이나 청국 대함전 능력이 사실상 사라진 때문이었다.
“EZ, easy.”
“이대로 가면...”
“올 크리스마스때까지는 전쟁 마무리하고 집에 갈 수 있겠구만.”
그러나 그렇게 순조로운 시간은 금새 끝나고, 운하가 끊긴 곳부터 만만치않은 저항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의 화력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것이긴 했으나, 청국군 또한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고, 기관총과 함정, 그리고 참호의 조합은 공격자에게 끔찍한 피해를 강요했다.
물론 당시 참호라는 것이 제대로 된 1차대전때의 참호처럼 사람 키만큼 깊게 판 호나 발판, 흉벽, 배수구, 수류탄 처치공 등등을 갖춘 것이 아닌, 단지 허리 깊이만큼 파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면 눈먼 총탄을 피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긴 했으나 그것만 하더라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기존의 라인배틀을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비교적 안전한 엄폐물 뒤에서 몸을 노출하지 않고 싸울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사상자가 극히 적어지고 방어자가 야지에 노출된 공격자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댈 수 있었던 것이다.
“둥! 둥! 둥! 둥!”
“중대! 차렷!”
“앞으로 갓!”
기관총과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레드코트가 당당하게 행진해 들어간 첫 전투에서 영국군은 항상 그러했듯, 붉은 코트를 입고 열을 맞추어 당당하게 정렬한 후, 북소리에 맞추어 행군해 나갔다.
그렇게 들어간 전투에서, 800여명의 레드코트 1조는 전사 92명, 부상자는 그 두배가 넘는 참패를 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군도 배후에서 선박이 지원해 주는 비교적 풍부한 탄약과 식사, 그리고 화력을 지원삼아 맞참호를 파며 그 근처에 진지를 꾸리기 시작했다.
“적진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 보급선이 끊기거나 퇴로가 끊기거나 하지는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화력은 우리가 수십배는 우세하고, 저 위에 우리의 눈이 되어주는 비행선도 떠 있다.”
“이 근처는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물길로 40마일 넘게 들어와 있습니다. 물길이 막히면 그대로 끝입니다. 당장 지금 베이징으로 바로 들이치지 못하고 이 근처에서 축성하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앞으로 가는 운하가 완전히 메꿔져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뱃길을 따라 고속선으로 하루 8회 이상 순찰을 돌고 있지 않은가?”
“각개격파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당장 저들도 기관총과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하지 않았습니까? 당장 저들의 신형 선박이나 대함무기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겁니다.”
“그럼 후퇴해야 한다는 것인가? 지금 빠지면 저들은 더 강해질 것이고, 우리는 다시 여기 오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돌아갑시다, 돌아가면 다시 올 수 있으니까.”
“아니. 목표까지는 이제 고작 20마일 남짓 남았다. 우리는 여기를 뚫는다.”
그리고 그 말대로 영국군은 청국군의 참호를 포격 지원에 힘입어 하나 둘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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