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만리
눈치도 빠르다.
거기다 한 수 더한다.
“까짓 거, 뭔지 몰라도 나도 똑같이 보여주지 뭐!”
떠오르는 상상, 머리에 김이 올라오고 침이 꼴깍 넘어 간다.
당 운령에게는 무언가 부잣집 귀한 여자애 같은 남궁 비연과는 다른 치명적인 독녀의 맛이 느껴진다.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당 운령에게는...
당 운령과 나 사이에 이유 모를 뜨거운 열기가 생겨나 공간을 데운다.
****
구 이라의 그날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단 한번으로 더 이상 그 판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졌다.
구 이라는 북해 빙궁의 무사들이 호위하여 일단 북해 빙궁으로 피신했다.
중원 무사들이 오고 갈 일이 없는 그 곳이야 말로 피신 장소로는 최상의 장소임이 틀림없다.
'흐흐, 구이라 그놈 잘하면 북해 빙궁 여자 하나 쯤은 꿰 차겠네.'
잘 생겼기도 하지만, 그 인간이 그럴 듯하게 말하는 아주 좋은 재주가 있다.
여인을 꼬드기는 데는 그 이상 가는 초식이 없다.
어이없게도 화마의 비처에 남겨졌으리라 짐작 되는 검왕의 유물을 찾으려는 무인들로 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이건 내가 쓰고, 구 이라가 공연한 이야기가 진실로 여겨진다는 반증이다.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를 알고 퍼뜨린 곳에서 그걸 다 가져갔을 것 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건만, 화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이 알지 못할 경로로 전해졌을 뿐, 검왕의 보물은 어디엔 가 그대로 있을 거라는 지어 낸 소문이 이미 소문을 넘어, 사실이 되어 중원을 떠돌고 있다.
하지만 곤륜 산에 존재 하지도 않는 검왕의 유물이 발견 될 리가 없다.
보물을 찿으려 가는 인간들을 보는 재미가 솔솔 할 거 같다.
'수고들 하시게.'
다음날 동이 트는 새벽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나는 혼자 빠져 나왔다.
명마 로시 이놈이 심상찮은 모험의 기운을 느끼는지, 푸히힝 거리며 힘차게 달린다.
<가자! 로시야!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나는 어머니를 찾아가야해!
위험하고 힘들어도
내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 곳
어미가 있어야,
나는 나 이니까!>
로시 이놈이 내 마음을 분명히 아는 것 같다.
새벽부터 해가 중천에 떠올라 뜨거운 콧김을 내 뿜을 때까지 달렸다.
오늘 따라 로시 이녀석이 꾀 피우지 않고, 지친듯한 몸 동작도 하지 않는다.
"로시, 너도 어미가 없는거냐?"
"푸히힝, 풋풋!"
이놈이 봐도 봐도 천재 말이 틀림없다.
쉬지 않고 한나절을 달리자, 아침도 건너 뛴 지라
배가 고프다.
“좀 쉬자, 이 놈아!”
넓은 시냇가에서 멈추었다.
로시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물을 마신다.
나는 대식이 놈이 준비해준 가죽 배낭을 열었다.
육포 한가득, 객잔이 없는 곳에서는 이게 필수적인 비상식량이다.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시냇물을 떠서 마신다.
단 한끼 지나쳤는데. 벌써 잘 차린 밥상이 그립다.
참, 간사한 인간의 본능.
천마신교의 주 무대인 곤륜산 너머의 신강지역은 험준한 산길의 연속이라 이런 비상 식량이 없으면 낭패를 당한다.
객잔도, 민가도 거의 없다.
그 흔한 산적도 없으니, 산채 정식도 얻어 먹을 수 없다.
"산적이 그립군."
“이게 진짜 강호 만리행이야!”
천마 신교는 여러 곳에 거처를 지어 놓고 수시로 옮겨 다녀서, 현재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천마 신교가 몽땅 옮겨 갈 수 있는 곳이 무려 열 두 곳이다.
거기다 자잘한 안가가 수없이 많이 있다고 알고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서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작가 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다던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니, 사실상 천마 신교가 멸망해서 사라진다는 건 내부 분열이 아니라면 불 가능하다.
그건 중원 무림도 마찬가지다.
중원 무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늘 너 죽고 나살자는 정마 대전, 정사 대전이 끊이지 않지만 실제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육포를 질겅 질겅 씹고나니
가베 차 한잔 생각이 간절하다.
이 황야에서 가베 차 생각이라니...
가베 차 생각을 하니 가베 차 향이 콧 끝에 맴도는 것 같은 환각을 느낀다.
‘쳇, k국의 습성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군. 하루 세 잔은 매일 마셨으니까.’
그런 데 이게 계속 풍기는 것이 환각이 아니다.
시냇물 건너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서 풍겨 나오고 있다.
‘이건 못 참지’
혼자 있으니 더 못 참겠다.
수위가 무릎 정도 오는 얕은 물길이라, 로시를 타고 건너갔다.
얕은 물속의 작은 물고기들이 갑자기 봉변을 당하자, 여기 저기서 튀어 오른다.
물줄기를 다 건너자.
거기 사람들이 삼십 여명이나 몰려서 식사를 마치고 가베 차를 마시고 있다.
비싼 가베 차를 모조리 한 잔씩 마시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부유한 집단인가 보다.
보통, 상전들 말고, 일행 전부에게 그 비싼 차를 돌리지 않는다.
외진 곳에서 불쑥 내가 나타나자, 무사들이 검에다 손을 대며 경계 자세를 취하다 혼자인 것을 보고, 경계심을 푼다.
철사 수염이 턱에 한정 없이 돋아나 있는 거한이 나서며 묻는다.
“공자는 누구인데 이리 한적한 곳에 불쑥 나타나시오!”
“혹시 무슨 용무가 있어 우리를 따라 오시었소?
좋은 무복에 청강 검을 차고 있으니 무시하지 않고, 공손히 묻는다.
이러니 사람들이 좋은 옷, 좋은 외모를 가지려 하지!
속 알맹이보다 사회생활에는 겉 치장이 이래서 중요하다.
그런데 내 애마, 로시 이놈 외모가 점수를 많이 깎아내린 것 같다.
로시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무사들의 눈길을 느낀다.
<타고 다니는 말 꼬라지가 왜 저래?>
키키, 하지만 최대한 기품 있게..
“하남 관씨 세가의 관 은우라고 하오, 소생이 세가에 갇혀 지내다 보니 세상 물정을 몰라서 세상을 배우러, 강호 유람 중 이오만...이 외진 곳에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그냥 살피러 와 보았소!”
“아하, 그러시오...보아하니 가는 길이 비슷하면 동행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원한다면 우리 상전에게 말해 보겠소, 어디로 가시오?”
오지랖 넓은 철사 수염이 장면을 다 만들어 버렸다.
되는 대로 일단 맡겨보자.
혼자 떠도는 것은 정보량의 한계 때문에 좋지 못하다.
“일단 곤륜 산으로 방향을 잡고 있지요, 구대 문파 중 하나인 곤륜파도 볼 수 있으면,들러 볼 요량으로...”
“호오, 방향이 같네요.”
철사 수염은 야외 탁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상전인 듯한 사람에게 다가 가 내 이야기를 한다.
먼 곳이지만 다 들린다.
“관 은우라? 설마 그 관 은우는 아니겠지...”
‘뭐야,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
철사수염이 바로 다시 왔다.
“아하, 우리 공자님께서 사람 사귀는 걸 좋아 하셔서 단박에 모셔 오라는 데요!”
“참 친절하시오, 그 상전이라는 분..”
커피 한잔이 간절해서 수작 붙였는데...관씨 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일이 살짝 커지는 모양새다.
상전이라는 사람은
얼굴이 관옥 같은 미장부!
나보다는 나이가 너 댓살은 많아 보인다.
문제는 그 옆에 앉아 있는 도도하게 생긴 귀티 나는 여자 애다
참 중원에 미녀가 많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포권 지례
“낙양 관씨 세가의 셋째 관 은우라 합니다.”
“허, 정말 낙양 관씨 세가 막내 공자가 맞네...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뜸을 들이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건 강호의 예법에 어긋난다.
즉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이 강호의 예의다.
“사천 만금장의 조 운룡이오! 혹시 사천 만금장을 기억 하시오?”
푸하! 이건 코피 터질 일이다.
그럼 저 도도한 여자 애가 혹시 내 약혼녀였던 조 비연 일수도 있지 않나? 설마 아니겠지. 그 집에 딸이 하나인 것도 아니고.
이런 난처한 일이 닥칠 때는 가장 좋은 만능 무기가 내게 있다.
기억 상실!
이미 이상한 놈으로 찍혀 있으니 이건 확실히 먹혀든다.
“하하, 소생이 좋지 못한 일을 당해서 과거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소생을 잘 아시는 것 같은데...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이걸 그대로 말할 바보가 어디 있나.
당연히 조 운룡도 누이를 슬쩍 보고, 시치미를 뗀다.
“하하, 낙양 관씨 세가주와 부친이 조금 안면이 있지요, 애는 내 누이인 조 비연이요!”
헐, 예감대로 저 도도한 여자애가 조 비연이다,
조 비연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고개만 까딱한다.
나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만 까닥..
몸을 빌려준 관 은우를 위해 도도하고 위엄있게 행동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이 된다.
사나이 관 은우가 그런 행동을 하고 파혼을 당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인생사를 남겨 줄 수는 없다.
조 운룡이 듣던 것과 다른 내 모습에 강력한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세가주 잔치 때 본 적이 있는데, 그 때와 많이 달라진 것 같소.”
“하하, 그랬나요, 제가 몇 년간 기이한 병증이 있었다 하였소, 하지만 이제 점점 좋아져서 지금은 거의 다 나았지요.”
“하하, 아직도 좋아지고 있는 중이지요”
“그래, 곤륜으로 가신다고...강호 만행을 혼자서 한다니, 그것 참 대단한 용기요! 우리도 곤륜 파에 일이 있어 가는 길이니 원한다면 함께 가도 좋소!”
“하하, 그래 주면 소생이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를 갖게 되는 거지요, 감사하오!”
기다리던 말이 이제야 나온다.
“가베 차 좋아 하시오?”
“가베 차! 그거 제가 무지 좋아하는 거지요, 사실 강 건너에 있다가 가베 차 냄새에 이끌려 온 것이오!”
가베 차, 그것도 좋은 품종의 가베 차 한 잔이 나온다.
야외에서 맛보는 가베차 맛이야 말 할 것도 없다.
철사 수염이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뭐라고 한다.
로시 이 놈이 그 새 사고를 쳤다.
나는 급히 말들을 메어둔 곳으로 갔다.
“로시! 이 새끼 안 내려와!”
이 자식이 그래도 안 내려오고 푸풋, 히히힝 거린다.
저런 남세스러운 놈!
“이 새끼 당장 안내려오면 너 그거 자른다.
나는 검을 뽑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그놈은 급히 내려와 저 멀리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저놈이 저러다 복상사 하려고...나이도 많은 놈이!”
말들을 닦아주고, 마구를 챙기던 나이 좀 든 무사가 내 말에 손을 내젓는다.
“아이고, 공자님 저 말이 나이가 많다니요, 생긴 건 저래도 이제 한창 청년기입니다. 저놈이 좀 노안이라 나이 들어 보이지만...”
헐,그렇구나! 내가 단단히 잘못 보았다.
이 사람이 아마 말을 관리하는 전문가인 모양인데,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거참, 암말들이 발정기도 아닌데, 뒷 발길 질 안하고 저 못 생긴 놈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통 하네..여기 말들이 다 잘난 말들이라 도도하기 짝이 없는 놈들인데...”
“말들이 말이오, 본능적으로 혈통 좋은말을 알아 본다 말입니다, 이 정도 반응이면 저 놈이 아주 명마라는 이야기지요.”
“저놈이 씨가 좋은 것 같긴 한데...혈통 좋고 힘 좋은 말들이 동시에 임신하면 말 운용이 곤란해지지요! 하하.. 비연 소저의 말도 두 놈 다 당했으니, 동시에 임신하면 골치 아픈데.”
‘푸훗! 로시 저놈이 주인은 파혼 당했는데..제가 먼저 조 비연의 말을 점령해 버렸네...’
로시의 행각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중식을 먹고 가베 차까지 마신 일행은 다시 출발한다.
나도 그 일행에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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