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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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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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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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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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DUMMY

가져온 간식을 모두 치우니 봇짐이 가벼워졌다.

여전히 배가 고프지만, 그래도 주먹밥 하나라도 건져서 다행이다. 샘물도 한 병 남았고.


명부전에서 내려와 별빛바다를 마주하고 섰다.

예전에는 이곳도 아늑하고 풍요로웠다. 서로바다와 마찬가지로 많은 천인이 모여 살았다.


지금은 바다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황량한 벌판이지만. 지평선 끝까지 붉고 검은 땅이 이어졌다.


천인이 살던 곳은 집터만 남았다. 기둥과 벽 일부가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었다. 무너진 기둥 사이로 메마른 바람이 지나갔다.


혼이 쉬다가는 여각도 있었다는데, 완전히 무너져 형체도 없었다.

중천의 혼들은 집터와 바위 그늘에 숨어 염라부의 부름을 기다렸다. 차사가 오기만 마냥 기다리는 것이다.


여각이 있던 자리를 둘러보는데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혼마다 빛은 달라도, 모두 미련과 후회, 원망을 곱씹으며 하염없이 바닥에 붙어있었다.


“중천을 바꿀 만한 힘이라면···.”

한숨과 눈물이 이토록 강한 힘을 갖는다면 이 힘으로 다른 무엇이든 해낼 텐데.


“차사들이 도와주면 중천도 바뀌지 않을까요?”

“천인은 사람의 독기에 약합니다. 사람만큼이나 약점이 많더군요.”


“어딘가 희망이 있을 거예요. 보이지 않을 뿐이죠.”

손목의 어리화를 살피면서도 혼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릴까.


한얼은 한동안 말없이 붉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숨을 길게 삼켰다가 천천히 뱉었다. 지팡이도 덩달아 흔들렸다.

“그런데, 백하는 어떤 차사입니까?”


‘백하? 갑자기 상산대감은 왜?’

백하도 차사니까 중천을 살릴 방법을 알 거라는 뜻인가.


“상산대감은···, 대단한 차사예요. 빙천술의 대가이고, 책임감도, 의지도 엄청 강하죠.”

백하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무섭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아,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요.”


처음 마음숲에 왔을 때 보았던 날카로운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맑고 하얀 피부와 흰 머리카락까지, 서늘한 기운에 주눅이 드는데, 말투는 어찌나 쌀쌀맞은지.


그는 빙천술의 대가답게 빠르고 예리했다. 허공에서 뽑아내는 얼음칼을 본다면 한얼도 숨이 멎을 것이다.


습기를 불러 만든다는데 그가 만드는 얼음칼은 얇고 날카로우면서도 영롱했다. 빛을 받으면 투명하게 빛났다.

상산대원 몇 명도 빙천술을 수련했지만, 그의 얼음칼 만큼 예리하고 단단하지 못했다.


“처음 마고를 맡아 많이 무서웠을 때, 여러 가지 가르쳐주셨어요. 위험할 때마다 도와줬고요.”

여하튼 얼음대감 덕분에 정신을 바짝 차렸으니 고마운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분은 마음숲에 애정이 깊어요. 진심이 느껴지고요.”

요즘에는 백하의 눈빛도 많이 달라졌다.

뭐가 달라졌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도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좋은 분이죠.”

백하만큼 상산대감에 어울리는 차사는 없을 것이다.


“부부의 연을 맺을 만큼 좋습니까?”

“에에?”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가?


‘상산대감과 부부?’

가만, 갑자기 아날빛숨의 용희가 생각났다.


그녀는 백하를 무척 좋아해서 그가 오면 정성스레 차를 우리고, 그를 위해 새로운 차를 개발한다고 열심이었다.


‘그러느라 순백초도 다 써버렸지!’

도우미 혼이 마음숲에서 머무는 기간은 삼백 년이 고작이다.

용희는 곧 염라부로 돌아갈 것이다. 그 이전에 떠날 수도 있고.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요. 서로 애틋하게 사랑한다면요.”

백하가 용희의 마음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마음이 아름답잖아?

부부는 될 수 없어도, 그런 마음이 마음숲을 따뜻하게 하니 얼마나 소중한가.


“그렇습니까.”

한얼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응? 한얼이 어떻게 알았지?’

대취가 말했나 보다.

아날빛숨의 초연 차사와 사랑하는 사이이고, 한얼과 같은 인도자이니 그 정도는 알려줬겠지.


한얼은 성큼성큼 앞장서 갔다. 갑자기 걸음이 빨라져 나도 빨리 움직였다.


집터를 돌아 별빛바다의 가장자리까지 왔지만, 손목의 어리화는 조용했다. 여기서 마른호수를 거쳐 임천문까지 가면 중천의 여정도 끝나는데···.


빛이 들어서고 어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믐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위숲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혼은 아닌데 누구지?’

또 다른 비뢰수들인가. 솜털이 삐죽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무슨 소리가 나요.”

“소리요? 어디서요?”


한얼은 지팡이를 고쳐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이 튀어나오든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자세였다.


“이 소리 안 들려요? 저기서···.”

어둠 속에 죽은 나무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하얗게 말라죽은 나무에 비틀린 껍질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나무를 보고 있으니 소곤대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우리 소리가 들리나 봐.’

‘쉿, 들키면 안 돼. 장작으로 쓸 거라고.’

‘차사는 아닌가 본데?’


마른 가지들이 삐거덕거리며 흔들렸다. 언뜻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지만, 바람이 아니었다.


‘죽은 나무가 나와 공명하나?’

마음숲의 그 많은 나무와 풀 중 어느 것도 이렇게 공명하지는 않는다. 물을 주고, 손질해주면 좋아하는 느낌은 있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


‘고사목도 귀물씨앗을 삼켰구나.’


나는 나란히 둘러선 하얀 고사목들에게 다가갔다. 바위숲을 따라 서른한 그루나 되는 고사목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얼은 여전히 지팡이를 창처럼 세워 잡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고사목의 소리를 못 듣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지키고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마음 놓고 고사목을 살펴볼 수 있겠어.


나는 가장 가까운 고사목을 쓰다듬었다.

‘너희는 누구니?’


‘고요산맥에 살던 나무들이에요. 숲이 무성했는데 다 말라 죽었어요. 물도 마르고, 숨도 쉴 수 없게 되었어요.’


‘너희들, 어떻게 공명하니?’

‘모르겠어요.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었어요. 뿌리는 다리가 되고 가지는 팔이 되었어요.’

나무는 뿌리를 움찔거리고 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 고사목들을 살펴보았다.


무심코 지날 때는 죽은 나무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마른 뿌리가 모두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그렇게 걸어서 물을 찾아다니는구나.


‘커다랗고 맑은 호수가 있었어요. 지금은 물이 없어요. 저기 계곡 끝자락에 옹달샘이 하나 남았는데, 차사들이 다니고, 비뢰수가 있어서 못 가요.’

옆에 있는 다른 고사목이 가지를 살랑거렸다.


‘거기까지 걸어간다고?’

뿌리로 걷기에는 먼 거리였다.


서른한 그루나 되는 고사목들이 차사의 눈을 피해 걷는 모습을 상상하니 안타까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새맘계곡으로 자리를 옮기지 그래?’

‘여기가 우리 자리인걸요. 우리까지 떠나면 여긴 아무것도 안 남아요.’


사납던 비뢰수들이 달라졌으니 길을 비켜주겠지만, 가까운 곳에서 물을 마시면 좋을 텐데.

나는 다른 고사목의 기둥을 쓰다듬었다.


‘도와주세요. 당신은 우리 말을 알아들어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세게 흔들었다.

다른 나무도 똑같이 따라 했다. 폭풍이 부는 것처럼 모든 가지가 힘차게 흔들렸다.


‘뿌리가 너무 많아서 걷기 힘들어요.’

‘별빛바다에서 물이 나오게 해주세요.’

‘이대로면 땔감이 되고 말 거예요.’

고사목들이 일제히 외치자 귀가 멍멍해졌다.


한얼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중천에 이렇게 바람이 세다니, 이상합니다. 빨리 지나가시죠.”


그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비뢰수를 상대로 날아다니던 검과 창이었다.

‘저걸로 뿌리를 정리하면 될 거야.’


한얼이 알든 모르든 그 일은 그의 몫이었다. 마고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으니까. 무기도 없거니와, 싸우지도 못한다.


“한얼님, 여기 나무뿌리를 정리해주세요. 서너 가닥만 남기면 될 거예요. 물을 빨아들일 실뿌리도 조금 남겨주세요.”


“이 죽은 나무말입니까?”

한얼은 어리둥절하여 고사목을 바라보았다.


서른한 그루나 되는 나무가 슬금슬금 움직여 가까이 모여들었다.


뿌리로 어정어정 걷는 나무를 보자 한얼도 미소 지었다.

“귀물씨앗이군요. 그래도 나무는 천성이 달라 괴물이 되지는 않았네요.”


한얼은 지팡이를 허공으로 던졌다.

지팡이는 칼날처럼 번뜩이며 고사목의 뿌리를 싹둑싹둑 잘라나갔다. 머리카락을 손질하듯 가볍게 움직였다.


고사목들이 끼루룩거리며 웃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가지를 흔드는 모습이 장터를 기웃거리는 구경꾼과 똑같았다. 눈이 없는 데도 눈을 빛내는 것 같았다.


‘고사목이 모여 있는 건 물의 기운이 올라온다는 건데···.’

물의 기운이 있으니 그 먼 거리를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정작 그들은 모르겠지만.


거대한 바위숲을 바라보았다.

별빛을 받아 별빛바다가 환하게 빛났다. 중천에서도 여기서 보는 별이 가장 아름다워 별빛바다라고 불렸구나.


이곳 바다에 천인들이 살았다면 물이 흘렀을 테고, 나무가 모여 있으니 여기 어딘가 샘이 나올 것이다.

‘중천에도 맑은 샘이 많았어. 이 아래로 물줄기가 이어져 있을 거야.’


나는 낮게 날면서 흙과 바위의 모양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나왔을 만한 땅을 찾아냈다.


오래전 바위 사이로 물이 솟았던 구멍이 보였다. 흙이 쌓여 입구가 막혔지만, 찾으려고 하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흙 위에 내려앉아 손을 갖다 대었다. 구멍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가늠하는데 손이 쑥 빨려 들어갔다.


‘어엇!’

숨을 내뱉을 사이도 없이 어깨까지 땅속으로 빠져들었다.


주먹을 쥐고 손에 힘을 주니 팔은 쉽게 빠져나왔다.

‘뭐야?’


손바닥이 축축했다. 알갱이가 묻어있는데, 축축하다니···.

‘물방울이 모래처럼 굳었나? 그렇다면!’


손으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손톱 끝에 흙이 배겨 따가웠지만, 손이 먼저 움직이니 멈출 수 없었다.


‘여기야, 틀림없어.’

정신없이 땅을 파는데 고사목 한 그루가 휘적휘적 다가왔다. 뿌리를 손질해서 사람처럼 빨리 걸었다.


“뭐 하세요?”

“여기서 물이 나올 거야. 구멍을 파려고.”


“그런 거라면 우리가 할게요.”

고사목이 가지를 부딪쳐 소리 내자 다른 나무들이 무리 지어 다가왔다.


대여섯 그루가 뿌리를 휘둘러 흙을 파냈다. 뿌리가 삽과 막대기처럼 움직였다.

몇 번의 삽질 만에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됐어. 마중물을 넣으면 물방울이 깨어날 거야.”

나는 술병 뚜껑을 열었다.


고사목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다. 가지 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술병의 물을 가장 안쪽 구멍에 쏟아넣었다. 새맘계곡 옹달샘에서 받아온 물이니 중천의 기운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남아있던 고사목들까지 깔끔한 모습이 되어 모여들었다.


한얼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도와드릴까요?”


한얼과 눈이 마주치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예. 여기 잠든 땅을 깨워주세요.”

나는 웅덩이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물이든 땅이든 잠들었으면 흔들어 깨워야지.


“잠시 저쪽으로 피하십시오.”

내가 고사목 뒤로 돌아가자 한얼이 지팡이 끝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얍!”

지팡이 솔찬이 힘차게 땅을 두드렸다.


땅바닥이 우르르 떨리더니 모래와 자갈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흙먼지가 털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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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6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6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6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5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3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7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3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9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6 3 12쪽
»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7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9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5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44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44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9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7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8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44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8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44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7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53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6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4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71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9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82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9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9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71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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