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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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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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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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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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혜존각 고운방

DUMMY

위즐증가의 북쪽에는 크고 굵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아름드리나무가 즐비한 숲이 그림터였다.


상생농장에서 가까워 꽃과 풀을 마음껏 볼 수 있고, 멀리 솟은 달해산과 거세게 물결치는 반다강을 내려다보는 자리였다.


그림터는 모두 나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몇 그루는 천인들의 집이었다. 작은 나무 한 그루에 한 명씩 돌봄차사와 키움차사들이 머물렀다.


가장 높고 거대한 나무가 천인들의 쉼터, 혜존각이었다.

살아있는 잎과 가지가 기둥과 벽이 되어 방을 만들었다. 숨 쉬는 방이 사 층이나 되니 더없이 크고 싱그러웠다.


예사달을 위한 방도 혜존각에 있었다.

그는 가장 아래층 구석, 고운방을 좋아했다. 마음숲에 머무는 일은 거의 없어도 사빈은 스승을 위해 고운방을 항상 깨끗이 정돈해두었다.


다훤은 예사달과 마주 앉아 고운방을 둘러보았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작은 방이 두 개 있으니 하나는 자연히 그의 자리였다.


예사달은 여전히 할머니의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사빈도 알지 않겠나. 자네의 진짜 모습?”

“후후, 내게 모습이 있었나? 난 그저 기운 덩어리일세.”


“그러니까, 그 덩어리 말이야. 할머니가 아니라.”

다훤은 장난스럽게 소매를 펄럭거렸다.


“사빈은 이 모습을 좋아하니 내버려 두게.”

할머니와는 어울리지 않는 굵은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다쳤던데···.”

“중천이었다며? 인간세에서만 다치는 것이 아니었나?”

“돌에 긁힌 상처였어. 중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한얼이 함께 갔다니 별일 아닐 거네. 그보다···.”

다훤은 자세를 고치고 앉아 차를 따랐다.


아날빛숨에서 가져온 샛바람물이었다. 차와 약의 중간쯤으로 북방흑천의 천사들이 좋아하는 맛과 향이었다.


다훤은 예사달에게 차를 건넸다.

“사빈이 중간자가 되면서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네.”


“잃어버린 것?”

“한얼도 그랬잖나. 중간자가 되자 천력을 담지 못했어. 인간세에 있을 때는 날고뛰던 녀석이었는데. 학문과 무예 모두 출중한 사람이었지.”


다훤은 인간세에서 보았던 한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름도 달랐고, 모습도 달랐다. 서른이 넘은 나이였으나 중간자가 되자 열 몇 살 정도로 어려졌고, 힘도 줄었다. 무엇보다 천력을 익히지 못했다.


“한얼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사빈은 반인반천이니.”

예사달의 얼굴에서 조금씩 주름이 사라졌다.


“나도 그런 줄 알았네. 중간자가 되고도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네.”

다훤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사라진 거지. 사랑을 느끼는 감정 말일세.”

“으흠···.”

예사달도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옅어지던 주름이 다시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백하가 달라진 걸 차사들 모두 아는데 정작 사빈은 모르고 있으니.”

“한얼도 사빈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고···.”

다훤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예사달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주름이 희미해지며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이제야 다훤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재미있게 됐구먼.”


“재미? 어허,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다훤이 예사달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어찌해야 하나?”


예사달은 빙긋 웃었다.

“그 아이에게 필요 없으니 사라졌을 테지. 필요하다면 다시 생길 거고. 한얼처럼 말이야.”

“그도 그렇군. 잉걸둥지가 한얼을 선택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다훤은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던 한얼을 떠올렸다.

그의 몸이 빛에 둘러싸여 허공으로 떠오를 때 다훤도 심장이 찌릿거렸다.


몸 안에서 천둥과 번개가 요동치며 두렵고 불안했다. 태어나 그런 충격은 처음이었다.


죽은 듯 쓰러졌던 한얼이 깨어났을 때 그는 천인보다 강한 천력을 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갑자기 생겨난 지팡이와 밧줄도 스승인 다훤이 준 것이라 굳게 믿었고, 자신의 몸이 바뀐 것도 그의 도움이라 믿었다.


예사달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자네, 예언자 이름표는 떼어버리게. 자기 제자에게 일어날 일도 모르다니. 쯧쯧.”


“그러는 자네는 어떤가? 어리화가 이리 빨리 나타날 줄 몰랐잖나?”

“그거? 이상하지도 않네. 그 아인 소명이 있으니까. 그게 무언지 모를 뿐이지.”


예사달은 탁자 위에 손을 올리고 검지와 중지를 걷는 것처럼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 길로 걸어가지.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닫히고, 나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서 길이 열리네. 때로는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지.”


예사달은 손을 흔들어 고운방의 공기를 데웠다. 이내 공기가 훈훈해졌다.


“사빈이 지금은 감정을 잃었어도 누군가 정성을 다하면 녹을 수 있지. 한얼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이 생길 수도 있고.”

예사달은 말을 마치고 찻잔을 들었다.


다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때 중간자로 만들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죽어가고 있었으니, 혼을 데려와도 되는데.”


“전에 말하지 않았나? 환영을 보았다면서?”

“맞아. 그 소리를 사빈도 같이 들었지. 할 일이 남았다면 할 거냐고 묻더군.”


다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중간자를 만든 것이 아니란 거야. 누군가 내 손을 빌린 거지. 그 후로는 중간자를 만들지 못했으니까.”


“수리마루 정명이 아닐까 의심하나?”

“어쩌면 우리 곁에 있을지도 몰라. 이계의 요물이 정명님일 수도 있지 않나?”


“이계의 요물은···. 이쪽 차원의 것이 아닐 거야. 목격자가 있다니 내가 알아보겠네.”

예사달이 찻잔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다훤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울창한 나무 기둥과 푸른 잎이 무성해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예사달, 어리화를 보니까 그 예언이 생각났다네.”


“검은 꽃말인가? 자네가 태어날 때 천사장이 들었다는?”

“음.”


‘검은 꽃이 태어나면 넋과 몸 사이를 홀로 서성이는 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으리라.’

사빈의 손목에 있던 무늬는 선홍색인데도 다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홍색이라도 그 모양은 환영으로 본 것과 똑같았다. 허공에 떠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검은 꽃.


그즈음 예사달은 한얼이 죽는 환영을 보았다고 했다.

‘몹시 어두웠어. 계곡이었나, 동굴이었나. 온통 피에 젖었더군. 숨도 끊어지고.’


“내가 본 꽃이 정확히 어리화였네.”

그도 어리화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피었나 했더니만···.”

예사달은 생각에 잠겨 눈을 감았다.


다른 마고에 비해 너무 일찍 피었다. 천계의 시간으로 따지면 이제 겨우 마고를 시작한 거나 다름없는데.


“다음 마고가 와서 마고의 힘이 사라지면···. 사빈은 그저 중간자야. 언제 수명이 다할지 알 수 없네. 이미 수명을 넘겼을 수도 있고.”


다훤은 찻잔의 물결 위로 사빈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을 아저씨라고 따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다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나는 사빈을 지키겠네.”

예사달의 대답에 다훤도 주먹을 쥐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 끝이 몹시 궁금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소명원에 가보게.”

“그 의미는 뭐고, 소명원은 뭔가? 내가 왜?”

“천사장의 아들이니 북방흑천에 자주 가야지!”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다훤은 대답하지 않았다.


“요즘 이런 생각이 드네. 새아가 없었다면 전욱이 마백북존이 되었을지도···.”

“어허, 부모님을 그리 부르면 안 되지. 그들이 없었다면 자네는 태어나지도 못했어.”


“그저 그렇다는 얘기일세.”

다훤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여하튼! 자네가 있는 동안 나도 여기 있겠네. 소명원은 그 후에 가겠네.”

“허, 자네도 참···.”

예사달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앞에 환영처럼 넓은 삼도천이 펼쳐졌다. 검푸른 빛으로 넘실대는 삼도천 위를 누군가 헤매고 있었다.


“응? 자네 제자는 삼도천에서 뭘 하는 건가?”

“왜, 뭐가 보이나?”


“뭘 찾고 있구먼. 아주 샅샅이 뒤지는데?”

“삼도천이라면 사람의 혼밖에 없을 텐데?”


예사달이 갑자기 눈을 떴다.

“쉿! 여기 왔네.”


그의 말을 신호로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스승님, 계십니까? 한얼입니다.”


“들어와라.”

다훤과 예사달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예사달의 모습은 조금 전과 비슷하지만, 수염이 더 짙어졌다.


“마음숲에 오셨다기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한얼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래, 인도자 일은 어떠냐? 잘하고 있다 들었다.”

“예. 별 어려움은 없습니다.”


“회향미곡은?”

“그곳에도 자주 갑니다. 잊지 않고 정리해놓았습니다.”

“잘했다.”


스승과 제자의 인사가 끝나자 예사달이 손짓했다.

“이번 그믐에 사빈과 함께 중천에 갔었다고? 그 얘기 좀 해주게.”


한얼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들 옆에 앉았다.


다훤과 예사달이 사빈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중천에서 처음 겪은 일이 많았다.


혜존각 고운방에는 풀 향기와 함께 한얼의 목소리가 조근조근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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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6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6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6 2 13쪽
»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5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7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8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6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6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9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5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44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44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9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7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8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43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8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44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7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52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6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3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70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9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81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9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96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71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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