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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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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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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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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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새로운 인도자

DUMMY

아날빛숨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인도자들은 여느 때처럼 검은 저고리에 짙푸른 반비 차림이나, 대취와 산여, 두 차사만 다닐 때와는 사뭇 달랐다.


대취와 산여는 검은 옷을 입어도 밝은 기운이 넘쳤는데 뒤따라 들어오는 검은빛은 더 짙고 힘이 있었다.


소매 없는 반비의 등과 가슴, 저고리 밑단에 황금색 해태 문양이 없다면 그야말로 어둠의 분신이었다.


대취가 타원형 공과 비슷하다면 그 옆의 산여는 젓가락 같았다. 그들 뒤를 따라 들어서는 인도자는 곧은 장작과 닮았다.


초연은 사뿐히 대취에게로 날아갔다.

“이분이?”


대취가 고개를 끄덕이자 초연은 새로 들어온 인도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며 살짝 입이 벌어졌다.

“소문대로네.”


초연이 새 인도자에게서 눈을 못 떼자 대취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초연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쓰러질 듯 그의 어깨에 기대어 섰다.


사빈은 웃음이 나와 이빨을 앙다물었다. 천인이라도 연인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구나.

용희는 참지 못하고 쿡쿡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사빈도 새 인도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얼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알던 한얼이 아니었다.

생김새는 비슷한데, 예전의 기운 없고 주눅 들어있던 중간자가 아니었다.


새 인도자는 떡 벌어진 어깨에 키가 컸다. 날렵한 콧대와 도톰한 입술까지 탄탄한 조각 같았다.


흑록색 머리카락, 연갈색 눈동자의 청년이었다. 눈매는 서글서글하지만, 빛을 뿜어낼 듯 힘이 넘쳤다.


그가 들고 있는 긴 지팡이와 허리띠에 달린 하얀 밧줄에서도 웅숭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사빈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아날빛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새로 온 인도자라오. 이름은 한얼이요.”

산여가 사빈을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사빈은 고개를 들어 한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 한얼이라고?’


과거가 어떻든 지금의 모습이 그의 혼빛에 더 잘 어울렸다.


사빈이 한얼에게 손을 내밀자 그도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입니다. 마고님.”


서늘한 기운이 사빈에게서 한울로, 한울에게서 사빈으로 넘어왔다. 사빈은 움찔 손에 힘을 주었다.


천선계에 없는 기운, 사람의 혼이 갖지 못한 기운이었다. 삼도천이 역류할 때 일으키는 거센 물보라와도 같았다.


‘같은 중간자라서인가?’

사빈은 황급히 손을 뺐다.


“둘이 아는 사이였소?”

산여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잘 되었군. 인도자는 마고와 잘 지내야 하는데 걱정 안 해도 되겠구먼.”

산여는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출입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난 볼일이 있어서. 혼이 준비되면 돌아오겠네.”


산여가 바람같이 나가자 초연은 대취의 팔에 손을 끼고 생글거렸다.

“위즐증가에 가는 걸 누가 모를까?”


“지금은 다담님이 바쁜 시간이잖아요? 정신없을 텐데···.”

용희가 고개를 쑥 내밀고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도와주겠지. 가만히 보고 있겠니?”

“그러네요. 아, 초연님, 칠 층으로 가실 거죠? 차를 준비할게요.”


“고마워. 그럼···.”

초연이 대취를 바라보자 대취도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응. 화평탕으로 부탁해.”

초연이 대취의 생각을 읽고 용희에게 전했다.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용희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초연과 대취는 칠 층 창가로 날아올랐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대취가 올 때마다 그곳에 앉아 광장을 내다보며 차를 마셨다.


‘뭐야? 한얼은 나더러 맡으라고?’

사빈은 주방과 칠 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얼은 그런 사빈을 보며 싱글거렸다.


‘할 수 없지.’

사빈은 가까운 자리를 가리켰다. 일 층에는 손님이 없으니 마고의 응접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얼님? 내가 아는 그 한얼 맞아요?”

“예. 저 맞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너무 달라져서 몰라봤어요.”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사빈님은요? 마고가 되고는 처음 뵙지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군요? 대답 안 하는 걸 보니.”

사빈의 물음에 한얼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상대가 숨기려 하는 것을 억지로 묻고 싶지 않았다.

“다훤 아저씨는 잘 지내시죠? 워낙 방랑을 좋아하셔서 못 뵌 지 오래되었어요.”


“잘 계십니다. 지금은 북방흑천에 계세요.”

다훤이 돌아왔다는 말에 사빈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도 오시겠네요. 예사달 할머니를 엄청 좋아하시거든요. 븍방흑천에 있는 날보다 예사당에 계실 때가 더 많아요.”

“예. 그랬지요.”


한얼은 웃음 띤 얼굴로 아날빛숨을 둘러보았다.

“마음숲에는 도우미가 있다더니 일을 잘하는군요.”

“예. 혼들이 알아서 잘 지내지만, 도우미가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져요.”


“도우미 역시 사람으로 태어날 혼 아닙니까?”

한불마로는 차를 나르는 용희를 바라보았다.


“씻김을 일찍 끝내고 마지막 수련이예요. 씻김의 방법이기도 하고요. 다른 혼처럼 쉬다 가는 것이 아니니 특별한 보상이 있어요.”


“보상이라니? 어떤 겁니까?”

한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빈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을 보자 사빈이 움찔거렸다.

‘저 눈. 어디서 본 것 같아. 아주아주 오래전에, 아주 가까이에서. 엄청 즐거웠던 것 같은데···.’


사빈은 턱에 힘을 주었다.

‘그럴 리 없어. 그때 한얼을 만났을 리 없잖아.’


“사람으로 사는 동안 큰 고난 없이 살 수 있어요. ”

“씻김을 일찍 끝낸 건 이전 생에서도 맑았다는 뜻이니···. 가능하겠군요.”

한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욕심내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재물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거예요. 긴 병치레 없이 살고요.”


“그야말로 신선이군요. 도우미로 지원할 만하네요.”

한얼은 풍경을 감상하듯 아날빛숨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천천히 둘러보았다.


용희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사빈이 부르면 찻주전자뿐 아니라 찻잎 통까지도 날아오는데 직접 온 것은 새 인도자가 궁금해서였다.


쟁반을 내려놓고 용희는 생글거리며 한얼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사빈에게로 몸을 돌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주방으로 돌아갔다.


사빈은 호기심이 일었다.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한데···.’


어떻게 다훤의 제자가 되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제자라고만 들었지 어디서 어떻게 스승을 만났는지는 듣지 못했다.


구부정하게 숙이고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그사이 엄청난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사빈은 오랜만에 만난 한얼을 위해 정성스레 차를 우렸다.

투명하고 맑은 찻물이 찻잔을 채웠다.


찻잔을 들려고 손을 올리니 소매가 흘러내렸다. 그녀에게는 손목 안쪽의 어리화가 또렷이 보였다. 가장자리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선대 마고 아란의 목소리가 지나갔다.

‘마고가 바뀌는 시기에 마음숲은 가장 약해져. 흔들리고 구멍이 생겨. 어떤 일이 생길지, 무엇을 잃을지 알 수 없어.’


사빈은 손을 내리고 슬며시 소매로 손목을 가렸다.

‘알리지 말아야지. 아직은.’


어리화를 보고 나니 마음이 온통 어리화로 쏠렸다. 빨리 다음 마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생각에 잠겨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맑고 서늘한 기운이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눈과 얼음처럼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상산대감 백하였다.


“사빈님, 이쪽이 새로운 인도자요?”

백하는 점잖게 웃으며 사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빈은 백하를 보고 놀라 인사도 못 했다. 얼음대감 백하가 웃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귀찮다며 길고 흰 머리카락을 목덜미 뒤쯤에서 한 번 묶는 것이 다였는데, 깔끔하게 올리고 복건까지 쓰고 있었다.


백하가 한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음숲을 지키는 상산대감, 백하라 하오. 사빈님과 아주 친하지.”


한얼은 백하와 사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얼입니다. 대감.”


그는 백하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내려놓았다.


“다훤님이 적극 추천하셨다고?”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소문이 그렇다는 거요.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오.”

백하는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사빈은 백하의 낯선 모습에 어리둥절해졌다.

‘얼음대감이 농담을 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시오. 한요재를 찾아와도 좋소. 이즈막 광장 남쪽 끝에 집무실이 있소.”

“대감을 귀찮게 해드릴 수야 없지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빈님께 물어보겠습니다.”

한얼은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백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사빈님보다 더 오래 이곳에 있었소. 위즐증가가 세워질 때부터 있었으니까. 아날빛숨과 위즐증가의 가장 큰 차이를 아시오?”


“아날빛숨은 찻집이고, 위즐증가는 식당이 아닙니까?”

한얼의 대답에 백하는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위즐증가에는 계단이 있소. 방도 있고, 무대도 있다오.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오. 완전히 다르지.”

백하는 눈썹을 실룩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위즐증가의 내부는 섬세하고 화려했다.

공방을 거쳐 간 혼들이 수련 삼아 조각도 하고, 장식을 붙였으니 아날빛숨과는 많이 달랐다. 천인과 선인들이 자신들의 집을 비슷하게 꾸밀 정도였다.


‘이상하네?’

사빈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상산대감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이었다. 시합을 앞두고 들떠있는 아이 같았다.


‘식구가 새로 와서 기분 좋은가?’

사빈은 어렵게 내린 결론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빈님, 누가 귀찮게 하면 알려주시오. 바로 잡아드리겠소.”

백하는 다짐하듯 사빈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한얼을 노려보았다.

‘감히 사빈님께 접근하다니.’


한얼도 백하와 사빈을 번갈아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사빈님을 먼저 만난 건 바로 접니다.’


웃는 표정과는 다르게 눈빛에 힘이 들어갔지만, 사빈에게는 그것이 뜨거운 환대로 보였다.


‘둘이 친구가 되었으니 자리를 비켜줄까?’

상산대감이든 새로운 인도자든, 사빈은 어리화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칠 층 남쪽 창으로 산여가 날아들었다.

그는 곧장 대취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산여가 뭐라고 속삭이니 대취도 일어나 그를 따라 나갔다.

그 모습을 보자 한얼도 탁자 옆에 놓아둔 지팡이와 밧줄을 들고 일어섰다.


잠시 후, 산여와 대취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장 한얼에게 다가왔다.

“인간세로 내려갈 혼이 모였다네.”


한얼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습니까? 모두 모였나 보군요.”


“고것이···. 다섯은 이미 배웅문에 가 있는디, 하나가 사빈님을 꼭 만나야 한다믄서···.”

대취가 설명하자 산여가 문밖을 가리켰다.


“지금 문밖에 있네. 사빈님에게 드릴 것이 있다고 버틴다오.”

“저한테요?”

“검새공방의 산돌이라면 알 거라던데.”


‘산돌? 산돌은 이미 바림창고에 유물을 맡겼는데?’

사빈은 서둘러 아날빛숨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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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6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6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6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7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8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6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5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9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5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43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44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9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7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8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43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8 2 12쪽
»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44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7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52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6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3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70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9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81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9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96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718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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