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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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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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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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DUMMY

상산대감 백하는 샛강을 따라 혼알방을 살피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목적지는 한요재지만, 가는 길에 아날빛숨이 있으니 자연스레 몸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사빈님이 깨어난 지 얼마 안 될 텐데···, 벌써 장날을 준비한다니. 괜찮은지 모르겠군.’

어느새 마음도 아날빛숨으로 향했다.


그믐 외출에서 돌아오면 꼬박 사흘은 잠들던 사빈이 이번에는 일찌감치 깨어났다니.


상산대원인 차미와 부루는 그것 말고 다른 소식도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중천에 다녀왔다는데요? 새로운 인도자 한얼과 함께요.’


‘아따, 어째 둘이 허벌 친하더라니···.’

부루는 백하의 눈치를 살피며 눈썹을 씰룩였다.


한얼을 생각하자 백하의 이마가 불끈거렸다.

‘그 풋내기랑 중천에?’


걸음이 빨라졌다. 혼알방의 혼들이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날 듯이 바람을 불렀다.


아날빛숨에 닿기도 전에 뜰에 앉은 사빈과 한얼이 먼저 보였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놀뫼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하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뛰어올랐다.


사빈은 갑자기 나타난 상산대감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디서 나온 거야?’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새였다.

긴 반비를 겹쳐 입고 장화를 신었다. 모자는 쓰지 않고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 움직일 때마다 하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사빈이 일어서는데 백하가 먼저 소리쳤다.

“중천에 갔었다니, 사실이오?”


그는 인사로 한 말이지만, 사빈에게는 호통치는 소리로 들렸다. 날카로운 눈매를 부릅뜨니 화가 난 듯도 보였다.


사빈은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예. 찾을 혼이 있어서요.”

“말하지 그랬소? 내가 안내할 수 있건만.”


백하는 한얼을 흘끗 노려보았다.

“중천에 차사가 얼마나 많은데! 바쁜 인도자를 귀찮게 하면 되겠소?”


사빈이 일어나자 백하는 그녀와 한얼 사이에 버티고 앉았다.

“훼 대차사님과도 잘 아는 사이라오.”


“예···. 다음에 중천 갈 일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사빈은 망설이다 대답했다. 다시 중천에 갈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한얼이 벌떡 일어나 백하에게 고개를 숙였다.

“중천은 차사에게도 위험한 곳입니다. 숨을 쉬기도 힘든데, 귀물을 만나면 위험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귀물?”

백하가 사빈을 돌아보았다. 그는 사빈의 얼굴과 손, 다리를 빠르게 살펴보았다.


“괜찮으시오?”

“예. 아무 일 없었어요.”

사빈은 소맷자락으로 손을 덮었다. 상처가 보일 리 없는데도 소매를 끌어내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처가 남았다. 비뢰수들과 싸울 때였다.

날아드는 먼지와 자갈을 피하려다 돌멩이에 살이 찢겨나갔다. 그래도 다른 그믐에 비하면 상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중천에 귀물이 있소?”

“지금은 없습니다.”

한얼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인도자는 이만 가야 하지 않소? 배웅문에 혼이 모였을 텐데?”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만.”

한얼은 자리에 앉으며 삐죽거렸다. 백하 역시 고개를 돌리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빈은 가만히 서서 얼음대감 백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그는 이렇게 말이 많지 않았다. 까칠하고 말이 없었다. 가끔 웃더라도 소리 없이 미소 짓는 정도였고, 말할 때도 짧고 조심스러웠다.


지금은 아주 낯설었다. 말투도 달랐다.

‘이상해.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사빈은 그를 피해 놀뫼마당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에게 백하는 처음부터 두려운 존재였다.

흰 머리카락과 하얀 눈썹도 그렇고, 꿰뚫어 볼 듯한 연회색 눈동자도 숨을 멎게 했다. 맑은 물 같은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빈을 대하는 말투도 무척 차가웠다. 상산대원이나 차사들, 심지어 혼알방의 혼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


언제인가 그믐 외출에서 크게 다쳤을 때, 백하는 사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할 수 없지. 다른 마고를 찾는 것이 좋겠소.’


중간자의 몸인데다 무기도 없고, 싸울 줄도 모르니 산적이 쫓아오면 쫓길 수밖에. 절벽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괜찮았는데 그의 태도는 냉랭했다.


그때를 생각하자 목덜미에서 등까지 지끈거렸다. 상처보다 그의 눈빛이 더 아팠다.


사빈은 등을 꼿꼿이 펴고 고개를 들었다. 가슴에 응어리진 또 다른 말을 떠올렸다,

‘만년이 넘는 시간이 다 가겠소.’


정확히 무슨 말이었지 가물가물했다. 좋은 말일 리 없었다.

‘내가 만년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거겠지.’


사빈은 보이지 않게 흥흥 코웃음으로 웃었다.

‘이번에는 다르다고요. 어리화가 나타났으니 더 버티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가 중얼거리던 말이 하나 더 생각났다.

‘사빈님 같은 마고는 다시 없을 거요.’


사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중간자가 마고가 된 것이 처음이긴 해도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모르잖아?’


그때도 고민은 잠깐이었다.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르니 둘 중에 선택해야 했다.

‘좋아. 난 칭찬으로 듣겠어.’


그날 사빈은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찔러댔다.


*


사빈은 씩씩거리는 백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과 달라지기는 했어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차사였다. 투명한 얼음벽이 둘러싸인 듯했다.


백하는 일어나 사빈 옆에 나란히 섰다.

“아무래도··· 다음 그믐부터는 같이 다녀야겠소.”


한얼이 벌떡 일어섰다.

“상산대감이 어찌 마음숲을 비웁니까? 인간세에서는 인도자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마고를 지키는 건 상산대의 임무라오. 인도자는 혼에 집중하시오.”

“마고가 마음숲에 있을 때는 그게 당연합니다. 허나, 인간세는 다릅니다.”


백하의 눈에 핏발이 서며 붉어졌다. 한얼도 입을 꾹 다물고 백하를 노려보았다.


사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닌데···. 선아님을 위해 술도 담가야 하는데. 그만 돌아가시지. 두 분 모두.’

장날을 준비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귀물을 상대하는 건 대명천의 지킴차사에게 맡기시오.”

“저야말로 북방흑천의 천사들과 함께 수련했습니다. 중앙황천의 인도자 수업까지 받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두 분 모두 바쁘실 텐데 이만 가시지요.”

사빈이 가라고 손짓하는 데도 백하와 한얼은 눈에 힘을 주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튈 것만 같았다.


‘아이도 아니고, 그렇게 귀물을 만나고 싶을까?’

사빈은 혀를 끌끌 찼다.


‘피천귀나 귀물이나 인간세에 많잖아? 거기 가면 될 텐데···.’

마고는 그믐에만 나갈 수 있지만, 그들은 아무 때나 나갈 수 있었다.

백하는 차사이고, 한얼은 인도자이니 근본부터 달랐다. 그들에게는 제약도, 한계도 없었다.


“저기, 두 분은 마음대로 가시면 되잖아요?”

사빈이 소리쳤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곧 먼지처럼 사라졌다.


한얼은 사빈을 돌아보았다.

‘이제 겨우 옆에 섰는데. 놓칠 수 없어!’


“천계에 중간자는 우리 둘뿐입니다. 사빈님과 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형제만큼 진한 관계이지요.”

한얼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럼, 한얼 인도자는 형제를 맡으시오. 난 다른 걸 맡겠소.”

힘을 주니 백하의 하얀 낯빛이 발그레해졌다.


“뭐 말씀이십니까? 자매 맺으시렵니까?”

한얼은 손을 까딱이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백하는 뻐끔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감은 마음숲과 대명천을 못 떠나지만, 저는 어디든 다닙니다. 황천 경계부터 숨겨진 계곡까지 닿을 수 있습니다.”


“허! 그렇소? 회향미곡에도 드나드는군?”

백하는 흥분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만, 회향미곡이라는 말에 한얼은 움찔 숨을 멈추었다. 발그레하던 낯빛이 창백하게 바뀌었다.


한얼이 말을 못 하니 백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인도자라도 암연층과 시실루는 모르겠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들어갔다 나온 천인이 없으니.”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하는 후회했다.

그것은 반계의 남북양존이 만든 감옥이었다. 반계를 떠올리자 혀가 굳었다.


암연층은 어둠의 결정체였다.

바람도, 소리도 닿지 않는 바닥이라고 했다. 어디든 나타나고 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곳에 들어가면 몸이 돌처럼 굳어 혼을 가두는 형틀이 된다고 했다.


지금의 이안남존이 동방청제였을 때 만든 감옥으로, ‘현재’의 수많은 겹을 다루는 동방청천의 신력이 그대로 녹아있을 것이다.


시실루는 지금의 마백북존이 남방홍천이었을 때 만들었다. 시간을 잃어버린 탑으로 보이지 않는 감옥이었다.

떠도는 말로는 반계와 우주 사이, 천계 바깥쪽 어딘가 있다지만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암연층은 누군가 다른 천인이 희생하면 꺼낼 수 있지만, 시실루는 스스로 나와야만 문이 열린다. 방법도 혼자 찾아야 한다.


사빈은 소문으로만 들은 암연층과 시실루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지만, 곧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이럴 시간이 없어. 샛바람물과 세련수를 만들어야 해.’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아 올리고 주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놀뫼마당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세 차사가 보였다. 상산대원 중에서도 백하를 가까이 따르는 삼인행이었다.


운와가 앞장서고 차미와 부루가 날듯이 빠르게 지나갔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들이 바람처럼 움직이는 건 혼알방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백하가 먼저 뛰어올랐다. 한얼도 지팡이를 잡고 그 뒤를 따라 날아올랐다.


‘세련수고 뭐고 일단 저기부터!’

사빈도 가볍게 울타리를 넘어 삼인행이 지나간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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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6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6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6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5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3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7 2 13쪽
»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3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8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6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6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9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5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44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44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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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7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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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7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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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6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4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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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9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81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9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96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71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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