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_예사달 할머니
아날빛숨에 들어서자마자 사빈은 할머니부터 찾았다.
“할머니!”
사빈은 예사달을 와락 끌어안았다.
할머니는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그동안 사빈은 열여섯 소녀에서 스물예닐곱의 여인으로 모습이 바뀌었지만, 예사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인간세 시간으로 따지면 이천오백여 년이나 흘렀건만.
이마에는 몇 가닥 옅은 주름이 있고, 입가의 주름은 깊이 파였다.
잿빛이 조금 섞인 흰 머리카락, 작고 가녀린 몸집과 굽은 허리도 그대로였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빈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할머니의 인자한 웃음이었다.
언제부터 할머니였는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할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사빈은 의자를 당겨 예사달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바짝 당겨 앉았다.
꽃 냄새가 나자 사빈은 코를 킁킁거렸다. 동녘뜰 사빈재에서 약초를 말릴 때 나던 은은한 향기였다.
“언제 오셨어요? 황제님이 알려주셨지만, 다움성에 갈 수 없어서···.”
“괜찮다. 내가 보러왔잖니?”
예사달은 사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빈의 소매 아래로 붕대가 살짝 드러났다. 예사달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팔은 왜 이러냐? 어디 다쳤니?”
“중천에서···.”
사빈은 똑바로 앉으며 소매를 걷어 내렸다. 할머니의 관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다들 몰라보던데···. 역시 할머니야.’
“중천에 갔었니?”
“예. 그믐 외출에요.”
사빈은 비뢰수와 고사목에 대해 말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예사달은 사빈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녀석, 뭔가 속이는 게 있구나.’
“열심이구나. 다움성까지 네 칭찬이 자자하더라.”
“좋게 봐주시니 그런 거죠. 아직도 많이 부족해요.”
사빈은 예사달의 주름진 손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안 보이냐? 험!”
다훤이 탁자 건너편에서 큼큼 기침 소리를 냈다.
“어? 다훤 아저씨도 계셨네요?”
“허어, 이제 보이냐?”
“고맙습니다. 할머니 모시고 와주셔서···.”
사빈은 인사하면서도 예사달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훤의 입꼬리가 여간해서 내려가지 않았다.
예사달을 보고 있으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사빈과 함께 있을 때는 영락없는 할머니였다.
사빈이 예사달의 손을 흔들었다.
“잔별차 드릴까요? 그거 좋아하시죠?”
“그래. 네가 주는 건 뭐든 맛나더구나.”
예사달이 온화한 미소를 짓자 다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용희가 사 층 손님에게 차를 갖다주고 빠르게 내려왔다.
“마고님, 제가 갖다 드릴게요. 말씀 나누세요.”
용희는 주방까지 뒷걸음으로 들어갔다.
다훤과 예사달은 차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천인들이었다. 자신이 직접 차를 대접할 영광을 놓칠 수 없었다.
‘내가 차를 대접하다니, 완전 감동!’
용희는 주방에 들어가서도 다훤과 예사달을 흘끗거렸다.
다훤은 북방황제이자 천사장인 전욱의 아들이고, 예사달은 중앙황제 현원의 눈이니 도우미들에게도 신비한 존재였다.
사람의 혼은 그들의 탄생에 얽힌 신비를 이해할 수 없으니 오묘하게만 느껴졌다.
용희가 멀어지자 예사달은 사빈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았다. 손목을 돌리니 선홍색 꽃무늬가 드러났다.
가늘고 긴 여섯 개의 꽃잎과 네 개의 초록빛 술, 물결처럼 휘어진 줄기. 어리화는 처음 나타났을 때 그대로였다.
“어리화구나.”
예사달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빈에게는 벼락처럼 느껴졌다.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리화라고?”
다훤도 의자를 당겨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자네 알고 있었나?”
다훤이 말하자 예사달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는 당황하며 말을 바꾸었다.
“아, 어르신, 알고 계셨습니까?”
“현원님이 가보라 하기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짐작은 했다. 이거였구나.”
예사달은 어리화 무늬 위에 손을 얹었다.
“언제 피었니?”
“그믐이 한 번 지났어요.”
“앞으로 여덟 번이 지나기 전에 다음 마고를 찾아야 하는구나. 그렇지?”
“예.”
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사달은 손을 놓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다훤은 등받이에 기대앉아 팔짱을 끼고 탁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용희가 차를 가져오고, 찻잔에 차를 따라 놓을 때까지 그들은 말이 없었다.
“현재의 겹이 얽혀있을 텐데···.”
다훤이 중얼거렸다.
“시간의 층도 마찬가지일 거다.”
예사달도 대꾸했지만, 늘 그렇듯 인자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걱정 마라. 반드시 찾을 테니.”
“할머니, 혹시 알고 계세요? 다음 마고가 어디 있는지?”
“그걸 어찌 아누? 하지만 이건 안다. 어딘가 반드시 있을 거야. 마고가 없으면 마음숲이 무너질 테니까.”
예사달은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왜 그믐 아홉 번인가요?”
“글쎄다. 이야기가 되려면 한계가 필요해서? 호호,”
예사달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대부분 두 번이나··· 서너 번의 그믐 안에 찾아냈으니. 수많은 마고가 지나갔지만 말이다. 다섯 번이나 여섯 번째 그믐은 한 번이었어.”
예사달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다훤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섯 그믐을 넘긴 마고가 없었지. 너도 그럴 거다. 조심하기만 하면.”
“예? 뭘 조심해야 하나요?”
“이것저것.”
다훤은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정 안되면 천인 중에서 아무나 맡아도 되잖아?”
천인이 마음숲을 맡은 적도 있었다. 처음 마음숲을 세운 나빛과 여섯 번째 마고인 누림, 둘 뿐이지만.
그때는 중앙황제 현원이 임명했다. 사람에게 애정을 가진 천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어리화가 피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리화가 찾는 혼, 마고가 되기를 기다리는 혼이 있기 때문이다.
예사달이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중천에 갔었구나? 다음 마고가 있는지 보려고.”
“예. 한얼이 안내해주었어요.”
사빈은 한얼의 이름을 말하며 다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봤을 때와는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요.”
“그럴 거다. 일이 좀 있었거든.”
다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중천에는 없었어요. 바림창고도 둘러보았는데, 신호가 없어요. 다음 그믐부터는 인간세를 둘러보려고요.”
“수명환도 건네야 하니···, 마고를 찾아다니기가 어렵겠구나.”
“예. 그게 걱정이에요.”
사빈이 힘없이 대답하자 다훤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그거 말고 걱정할 것이 또 있지.”
“예? 뭐요?”
“어리화의 기운이 강해지면 반계에서 알게 될 테고, 피천귀들도 움직일 거다.”
다훤은 예사달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네도 미아가 되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말투를 바꾸었다.
“어르신도 겹과 층에서 길을 잃은 적 있으시죠?”
예사달이 으음 목으로 소리를 냈다.
“사빈아, 어리화를 품고 다니면 지금과는 다를 거다. 전혀 다른 곳에 닿을 수 있어.”
“다른 곳요?”
“현재의 겹과 시간의 층이 만든 미로란다.”
이쪽 차원의 현재에도 수많은 공간의 겹이 있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섞인 시간의 층이 있었다. 그것을 동방청천과 남방홍천에서 관리했다.
동방청천에서는 현재의 겹을, 남방홍천에서는 시간의 층을 관리한다. 그 외에도 별을 만들고, 하늘을 지키느라 능사와 위사들은 언제나 분주했다.
‘두 성천에서 지키는 데 미로가 생긴다고?’
사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비록 태우와 금천이 즉위하지 않았어도 신제의 힘은 있을 텐데.
“문제는 반계의 양존이 더 강력하다는 거야.”
다훤은 사빈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마백북존 마눙은 이전의 남방홍제였고, 이암남존 이루는 동방청제였으니 태우와 금천이 아무리 천력이 뛰어나도 그들을 넘지 못할 거다.”
사빈은 찬믈과 산돌을 떠올렸다. 그 사기꾼이 반인반천이라지만, 피천귀가 둔갑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숲에 사기꾼이 나타났어요. 혹시 반계에서 보낸 첩자 아닐까요?”
사빈은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지만, 예사달은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양존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마눙은 현원과 같은 알에서 나왔지. 첩자 따위는 필요 없단다.”
예사달의 설명에 다훤은 싱글거렸다.
“그 얘기 말고 미아가 되었던 이야기나 해주게. 사빈에게 도움이 될 걸세.”
다훤은 차를 따르다 말고 손을 움찔거렸다.
“될 것입니다. 어르신.”
예사달은 어린 동생을 대하듯 다훤을 쳐다보다가 사빈에게로 눈을 돌렸다.
“여러 번 빠졌었지. 어디가 함정인지도 모르고, 그것이 덫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단다. 우주에도 여러 겹과 층이 있으니까.”
“어떻게 나오셨어요?”
“오래 헤매다 보면 틈이 보인단다. 하지만, 너는···. 그믐 시간을 맞춰야 하니 마냥 기다릴 수는 없겠구나.”
예사달이 주름진 손으로 사빈의 어깨를 다독였다.
“한 번은 숨 쉬는 빛을 본 적도 있단다. 빛나는 알이었던 것도 같고. 그것이 내게 소리를 보내주었어.”
“그 알도 공명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그 알이 그러더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여기 온 이유를.”
“그래서 알아내셨어요?”
“아니. 아직 모른단다.”
예사달은 눈을 감고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수리마루 정명이 아니었을까?”
다훤도 허리를 틀며 자세를 바꿔 앉았다.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전혀 다른 존재이거나.”
예사달은 찻잔을 들어 찰랑이는 물을 바라보았다.
‘수리마루 정명.’
사빈은 입속으로 되뇌었다.
그녀 역시 궁금했다.
누구도 수리마루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천사장조차 환영을 통해 들을 뿐 직접 보지는 못한다.
다훤이나 예사달만큼 우주 곳곳을 누비는 천인이 없는데 그들 역시 보지 만나지 못했다니.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사빈도 차를 한 잔 따랐다.
‘어쩌면 모래 알갱이보다 작을지도. 아니면 천선계를 뒤덮는 대기보다 넓을지도 몰라. 바람인가?’
그것도 말이 된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으니.
‘아니지. 바람은 머물지 못하잖아? 생각이나 기억은 어떻게 하고?’
사빈은 수리마루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론은 늘 같았다.
‘아무래도 모르겠어.’
차를 다 마시고 예사달이 사빈을 불렀다.
“어려운 시험을 만났구나. 인간세도 다녀야 하고, 시간과 공간의 덫도 피해야 하니.”
“사빈은 잘 해낼 걸세. 내가 알아본 아이가 아닌가.”
다훤은 소맷자락을 털며 아날빛숨을 둘러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하하하.”
“그래. 네가 이겨내지 못할 시련이 없지. 의미 없는 시련도 없고 말이다.”
예사달과 다훤은 별일 아닌 것처럼 웃었지만, 사빈은 웃지 못했다.
‘어리화.’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마고의 힘이 약해지면, 피천귀가 모를 리 없어. 반계의 힘은 갈수록 강해지잖아. 사람이 있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테고.’
사빈은 예사달과 다훤을 돌아보았다.
스승은 조언해주지만,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결국 그녀가 찾아야 할 일이었다.
“할머니, 곧 얄리장터 열림날인데, 보고 가실 거죠?”
“아니.”
예사달이 장난스레 웃었다.
“이번뿐 아니라 다음 장날도 봐야지. 한동안 여기 있을 거다. 온천도 하고. 혜존각에 내 방도 있지 않니?”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럼 나도!”
다훤은 손을 번쩍 들었다.
사빈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할머니와 아저씨가 마음숲에 머문다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답 없는 숙제라도 할머니와 아저씨가 계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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