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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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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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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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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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DUMMY

아날빛숨 꼭대기, 아롱재에 따사로운 빛이 비쳐들었다.


잠든 사빈을 보살피듯 부드러운 빛이 방 구석구석에 머물렀다. 천장의 숨꼭지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믐 외출에서 돌아온 이후 사빈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벌써 이레가 지났다.


*


아날빛숨의 주방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찻잎을 정리하던 용희가 손을 멈추었다.

“초연님, 무슨 일 나는 건 아니겠죠? 벌써 여드레라고요. 마고님이 안 깨어나면 어떡해요?”


“걱정 마라. 사빈은 약한 아이가 아니야. 마고가 마음숲에서 죽는 일도 없어. 마고가 바뀐 다음이면 모를까.”

밝은 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초연은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빈의 천력이 계속 빠져나갈 텐데···.‘

모두가 걱정하는 일이었다.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소소공방 목예가 속삭이던 말이 은근하게 되살아났다.


어리화가 피고 그믐이 네 번 지났다.

아직도 다음 마고가 안 나타났으니, 마음숲에 서서히 변고가 생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를 뿐.


마고의 천력이 약해지면 마음숲의 기운도 흔들린다. 반계에서 알아차리기 전에 다음 마고를 세워야 할 텐데.


초연은 하얀 찻잔을 쓰다듬으며 아날빛숨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아롱재가 보이는 것처럼.


*


사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을 떴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니 천장의 숨꼭지들이 보였다.

보통 때는 빛 속에서 사그락 꼼실거리던 숨꼭지들이 천장에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던 사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 깨어났어.”


사빈이 소리를 내자 숨꼭지들이 사락사락 움직이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꼭지를 바라보다가 몸을 비틀어 천천히 일어났다.


바나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바나의 자리에는 커다란 방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얼마나 지났지?’

오래 누워있던 것 같은데,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팔을 올리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한긋장벽의 구름이 낮게 내려앉으면 푸르고 깨끗한 하늘이 펼쳐진다.


‘시간의 덫에 걸려서인가? 과거에 다녀와서?’

사빈은 힘겹게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다리와 발끝에 힘을 주기 위해 몇 걸음 가다 멈추어 숨을 들이마셨다.


창틀을 잡으려니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사빈은 입술까지 힘을 주었다.


색색의 혼알방이 바닷가 자갈밭처럼 넓게 펼쳐졌다. 샛강과 개울이 혼알판 사이를 유유히 흘러갔다.


어떤 혼은 놀뫼마당에 나와 빛을 쬐고, 어떤 혼은 휘나래를 타고 뱃놀이를 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혼알방 사이를 날아다녔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 위로 어린 시절의 어머니, 은솔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장터를 구경하며 즐거워하던 모습, 과자봉지를 끌어안고 좋아하던 표정, 백홍선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고 자랑하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운기정에서 마주 앉은 아버지의 모습도 또렷이 남아있었다. 부운거사와 아버지의 모습 모두 기억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잊지 않을 거야.’

사빈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믐 외출에서 겪은 인간세의 기억은 이내 사라지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고스란히 남았다. 그 시간을 또렷이 기억하는 건 처음이었다.


사빈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보고 싶을 때마다 떠올릴 수 있다니···. 기적 같아.’


*


사빈이 아날빛숨에 내려오자 용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마고님! 어흑, 마고님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용희는 사빈을 끌어안고 팔에 힘을 주었다. 사빈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켁켁거리자, 겨우 손을 풀고 물러났다.


“다들 얼마나 걱정하셨다고요. 이레 동안이나 내리 자는 게 어딨어요?”

“내가 이레나 잤다고?”

“예. 차사님들이 다 다녀갔어요. 숨만 쉬고 움직이지도 않는다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괜한 걱정 끼쳐드렸네.”


“지나실님과 요선님은 매일 오셨어요. 아, 대감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용희가 싱글거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 다정하세요.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분을 옆에서 모실 수만 있다면···.”

용희는 몽롱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았다가 장난스레 사빈에게 눈을 깜빡였다.


“용희야, 날 걱정한 거 맞아? 보자마자 대감 타령이네.”

“어머나, 그러네요. 대감님께 알려드려야지요. 한달음에 달려오실걸요.”

용희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초연님은 어디 가셨어?”

“소소공방에요. 차사님들이 거기 다 모이신다고요.”

“그래? 그럼 바나는?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바나요?”

용희는 손을 들어 육 층의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바나는 손님들 옆을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혼들이 바나를 쓰다듬을 때마다 으쓱거렸다.

용희가 손짓하자 바나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보랏빛 꽃 한 송이를 물고 있었다.


“왈왈, 일어나셨어라? 주인님?”

입에 물고 있던 꽃을 내려놓고 자기 머리를 사빈의 치맛자락에 비벼댔다.


“한 송이씩 놓았어라. 팬서비스여라. 왕왕.”

바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팬서비스?”

“왈, 삽살이랑 참새한테 배웠어라. 인기 많은 사람은 다 그렇게 한다더라.”


바나는 몇 차례 목을 까딱거리더니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나도 인기 많아라. 귀염둥이여라. 왕.”


“허! 빌라에서 이상한 것만 배웠구나.”

바나가 꽃을 물고 꽃으로 사빈의 손을 툭툭 쳤다. 사빈은 혀를 차면서도 꽃을 받아 들었다.


“왕왕, 주인님이 일어나길 기다렸어라. 인제 일하러 갈 거라.”

“일? 네가 무슨 일?”


“위문공연이어라. 아시어라? 왈왈. 팬서비스 차원이여라.”

바나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발걸음도 가볍게 문밖으로 나갔다.

작은 몸통에 커다란 머리가 불안해 보이지만, 춤을 추듯 흥겹게 걸어 나갔다.


열린 문으로 세 개의 형상이 아른거리며 들어섰다. 사빈은 몽롱한 정신으로 일렁이는 형상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대감님!”

용희가 손뼉을 치며 뛰어갔다.


사빈은 용희의 환호에 눈을 크게 떴다. 백하와 차미, 초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하는 원래 하얀 옷에 흰 머리카락이라 눈에 띄기는 하지만, 지금은 유독 하얗게 빛났다. 어둠 속을 혼자 걷는 것처럼 보였다.


‘아름답구나···.’

사빈은 넋 놓고 백하를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뭔 생각이야? 정신 차려, 사빈!’


차미 뒤로 여러 개의 바구니가 허공에 떠서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고샅공방에서 요리를 나를 때 쓰는 바구니였다.


“사빈아! 깨어났구나.”

초연이 공처럼 통통 튀어 올라 사빈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사빈의 얼굴과 손을 살피며 팔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디 보자. 아이고, 얼마나 고생했기에 한번을 안 깨고 내리 잤어? 응?”

초연은 사빈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들 걱정했단다. 지금껏 마고를 세 명이나 겪었지만, 이런 일은 없었어. 그리 힘들었어?”

“아니에요. 힘들지는 않았는데···.”


“힘들지도 않았는데 못 깨어난 거면 그게 더 문제지!”

초연은 눈을 부릅떴다.


백하는 허공의 바구니를 탁자로 옮겼다.

“초연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기력이 약해진 탓이겠지요.”

“그야 그렇지만.”


초연은 백하가 내려놓은 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본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여하튼, 요선은 알아줘야 해.”


“이걸 들고 다니면 팔이 빠졌을걸요?”

차미가 손가락으로 신호하자 다른 바구니들도 나란히 탁자 위에 자리 잡았다.


“사빈님, 깨어나서 다행이오.”

백하는 의자를 빼고 사빈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초연은 바구니에서 눈꽃이 장식된 과자를 집어 들었다.

혀끝에 맛이 느껴지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빠르게 접시를 잡아 색색의 과자를 담았다.


“맛나구나. 어서 먹어봐라. 요선이 널 생각해서 밤새 만든 거야. 며칠은 두고 먹겠어.”

초연은 사빈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젓가락을 받으려던 사빈이 잠시 주춤했다.

힘이 빠져 손을 들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아득해서 초점이 흐려졌다.


사빈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주문을 외우며 간신히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 용희가 접시에 과자를 덜어 백하와 차미, 초연 앞에도 내려놓았다.

“잠시만요. 제가 차를 준비할게요.”


용희는 백하를 돌아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빈에게도 백하를 좀 보라며 눈짓했다.


사빈은 그런 용희를 보면서 미소 짓고 싶었지만, 입술을 움직이는 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몸은 어떻소?”

“좋아요. 이 정도면 대명천을 쓸고 다닐 수 있어요.”


사빈은 씩씩하게 웃었지만, 백하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하얀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니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아서라. 대명천을 쓸어 무엇하누. 그냥 마음숲이나 쓸어.”

초연이 입술을 쌜쭉거리자 사빈도 힘겹게 따라 웃었다.


“바나는 어디 갔소?”

백하는 아날빛숨을 둘러보다가 탁자 밑도 살펴보았다.


“팬서비스 나갔어요.”

“팬··· 서비스?”

백하의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자 사빈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요즘 인간세에서 쓰는 말이에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거지요. 있는 그대로는 아니고,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왜 그런 일을 하오? 거짓으로 꾸민 모습 아니오?”

백하가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고, 조금 과장된 정도?”

“인간세에서야 그렇다 해도 바나는 그럴 필요 없잖아?”

차미가 과자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믐에 나가서 배웠나 봐요. 혼들에게 귀여움받는 스타의 의무라나.”

사빈은 숨을 들이마시며 간신히 웃음을 지었다.


“혼알방 순회공연라면 되겠어요. 한동안 바나를 만나기 어려울 거예요. 여기서는 저를 지킬 일이 없으니 혼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한다는데···.”


“암만 바빠도 밤에는 들어오겠지. 아롱재만큼 좋은 잠자리가 없을걸?”

초연이 바구니에서 떡을 꺼내 빈 접시를 채웠다.


차미가 갑자기 탁자를 내리쳤다. 쩌렁 소리가 아날빛숨을 울렸다.

“참! 내 정신 좀 봐. 다움성에서 전갈이 왔어요.”


차미가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편지요?”

사빈은 종이로 된 편지를 보고 허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얄리장터에서 종이를 내놓은 다음부터 천인들 사이에서 종이 편지가 유행이었다.


종이에 빛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빛글 말고도 깃털구름도 있건만 구태여 종이를···.

가까운 거리는 여전히 전언을 쓰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편지를 펼치니 종이 위에서 글자가 빛났다.


- 중앙황제 현원과 북방흑제 전욱, 이번 얄리장터 열림날, 방문 예정 -


“현원님과 전욱님이 오신대요.”

사빈은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현원님이? 그거 좋구나. 지난번에 못 뵈었는데, 이번에는 인사드려야지.”

초연이 사빈의 빈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사빈은 찻잔 속에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황제님과 흑제님이 오신다고?’


반계의 대나무숲으로 떨어지기 전, 사빈은 소용돌이 속에서 두 신제도 보았다.

무슨 일인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것 때문일까.


사빈이 생각에 잠긴 사이 초연과 차미는 다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뭘 어떻게 대접하지?”

“늘 하던 대로가 좋아요. 아무리 애써도 다움성과 소명원이 여기보다 훨씬 좋으니까요.”

“그건 그래.”


사빈은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소매를 들추니 어리화 무늬가 보였다. 선홍색에서 이제는 검붉은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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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5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4 2 11쪽
88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5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6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6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7 2 12쪽
»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4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7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6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4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6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7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7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8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50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55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4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2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6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7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7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64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60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60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3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6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71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7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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