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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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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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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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부르는 소리

DUMMY

아롱재 창문으로 옅은 빛이 새어들었다.


사빈은 눈을 감은 채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천력이 빠져나가며 몸도 무겁고, 갈수록 깨어나기 힘들었다.


‘조금만 더 있자.’

눈을 질끈 감고 웅크리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사빈···.”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사빈···.”


소리가 들리자 사빈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바나, 아직 새벽이야. 가고 싶으면 혼자 나가.”


“불천수 강가에서 기다리겠다.”

이번에는 똑똑히 들렸다.


사빈은 이불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한 가지 소리가 아니었다. 여자 어른과 아주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마음숲에서 나오면 만날 수 있다.”

샘물이 또랑또랑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사빈은 이불을 걷어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바나는 문가에 누워 새근새근 숨을 내뱉었고 천장의 숨꼭지들도 깊은 잠에 빠져 어둑어둑했다. 문도, 창문도 열려있지 않았다.


“뭐지? 꿈인가?”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신비한 소리가 귓가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불천수 강가? 설마 예슬이 사는 그 대나무숲?”

사빈은 벽에 걸린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거기 매달린 향낭은 이미 홀쭉해졌다.


“환청인가?”

사빈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꿈인지 진짜인지! 확인해봐야 알지.”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숲을 나가야 한다.


‘어떻게 나가지? 불천수 강가에서 기다린다고?’

마고가 마음숲을 나갈 수 있는 건 그믐 외출과 신제의 허락이 있을 때뿐이었다.


‘불천수는 반계와의 경계야. 혹시 마고를 유인하려고?’

그럴 듯 했다.

‘마고가 없으면 마음숲은 힘을 잃을 테니까.’


벽에 걸린 헝겊꽃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가보고 싶어.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잖아?’


옥함 속 수명환이 달그락거렸다. 신비한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불천수 강가에서 기다리마.’


‘그믐 외출까지 기다려?’

그녀는 꽃수 열쇠의 문양을 쓰다듬었다. 도톰하게 수놓인 연보랏빛 꽃잎이 만져졌다.


‘꽃수 열쇠가 어디로 갈지 모르잖아? 열쇠 없이 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해.’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이즈막 광장에서는 혼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길놀이 가면을 구경하기도 하고 직접 만드느라 줄을 이었다.


저마다 마음대로 가면을 만들고 싶어 했다.

모듬공방이나 소소공방에서도 만들 수 있지만, 모든 혼이 달려드니 가면은 너나들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터 열림날이 아닌데도 너나들이에서 천막을 치는 건 처음이리라.


“왕, 주인님, 다음 그믐에는 거기로 가시어라. 거기.”

“그건 몰라. 꽃수 열쇠가 어디로 보내줄지.”

사빈은 바나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왜 맨날 못 가는 거시어라. 왈왈.”

바나는 코를 찡긋거렸다.


바나는 사빈의 품에서 뛰어내려 혼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너나들이 천막에 걸린 가면을 향해 짖어대자 상인 한 명이 바나에게도 가면을 보여줬다.


“이거 어떠냐? 도깨비 가면이야. 이걸 쓰고 다니면 피천귀도 무서워 도망갈 거다.”

“왈, 그거 주시어라.”

바나가 펄쩍펄쩍 뛰자 그가 바나의 머리에 가면을 묶어 주었다.


“멋지네!”

다른 상인이 소리치자 바나는 크게 짖으며 천막을 빙빙 돌았다.


“왕왕, 주인님! 순찰 도깨비여라. 팬들도 좋아할 거시여라.”

“아휴, 그래. 가서 팬 관리 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나는 이미 사라졌다.


너나들이의 부단장이 사빈에게 다가왔다.

“마고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다들 열심이네요. 마음숲의 혼빛이 밝아졌어요.”

“예. 이런 기회는 여간해서 없을 테니까요. 마고님도 가면 만드실 거죠?”

부단장이 반짝이는 종이를 보여주었다.


“지난번에 고마웠어요. 아이에게 집을 구해주시고.”

사빈은 부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뭘요. 마고님이 수명환을 건넨 아이이니 당연히 도와야죠. 마고님을 만난 것도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그믐마다 나갔어도 너나들이는 딱 두 번 봤어요. 부단장님과 서기님.”


“다른 이들도 마고님 부탁이라면 물불 안 가릴 겁니다. 저희도 마음숲이 참 좋거든요.”

부단장은 마음숲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싱글거렸다.


“실증계에서는 체면도 차려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죠.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인간세에서 너나들이들은 대부분 높은 직책을 맡고 있다. 하지만 여기 들어서면 그들도 어리디 어린 사람이었다.


가슴까지 가벼워지는 공기,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바람, 복잡하게 생각할 일도 없었다.


요즘은 반인반천이 태어나지 않으니 가장 어린 반인반천이 백육십 세 정도였다.

그래도 겉모습은 청년이라, 이름과 신분을 바꾸어 처음과는 다른 사람이다.


사빈은 천막 주위의 너나들이를 둘러보았다.

밀려드는 혼을 상대하느라 쉴 틈 없었다. 그래도 얼굴에는 즐거운 빛이 가득했다.


“단가람은 안 왔나요?”

“그 친구···.”

부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안 옵니다. 아니, 못 오죠. 아무래도 오래 못 버틸 겁니다.”


사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중천에 들어가기 전에 보면 좋을 텐데.’


“그런 녀석까지 신경 쓰시니···, 역시 마고님이십니다. 그 친구가 나쁜 짓을 하기는 했어도 막상 그렇게 되니 착잡합니다.”


손님이 몰려들어 부단장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예. 삼도천을 건너기 전에 다시 보면 좋겠어요.”

사빈은 인사하고 돌아섰다.

부단장은 혼들에 밀려 고개만 까딱하고 돌아섰다.


“바나는 어두워져서야 돌아올 테고. 온천은 어떤지 가볼까.”

사빈은 모로매 온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몇 십 개의 혼알판을 지나고 개울과 강도 건너야 하지만, 오늘은 천천히 걷기로 했다. 강가와 빈터에 나와 있는 혼들을 보고 싶었다.


혼들은 옹기종기 모여 축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빈이 지나가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가면을 만들면 자연스레 거기 맞는 옷과 장신구를 꾸미게 되니, 축제가 끝날 때까지 마음숲은 계속 들떠있을 것이다.


사빈도 기분 좋게 다리를 건넜다.

다리 근처에서 배 모양의 휘나래가 물결에 흔들거렸다.


분명 빈 배였는데, 사빈이 다리를 다 건넜을 때 배 위에 상산대감 백하가 서 있었다.


“사빈님, 어디 가시오?”

“대감이셨군요. 온천에 가볼까 해요.”


“온천이라면 지금 다녀오는 길이오.”

백하는 휘파람을 불어 휘나래를 움직였다. 그의 생각에 맞춰 휘나래는 사빈에게 다가갔다.


“뱃놀이 좋지 않소?”

“저는···.”

핑계를 대려고 했지만 좋은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숲은 마고가 있기만 하면 스스로 돌아가니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있겠는가.

‘아날빛숨에 일에 생겼다고 해? 아우, 지금 온천에 간다고 했잖아?’


백하는 사빈의 몸을 허공에 띄워 올린 다음 휘나래 위에 앉혔다.

“마고도 가끔 쉬어야 한다오.”


휘나래는 좁은 강물을 유유히 떠내려갔다.

샛강은 마음숲 구석구석을 지나 제자리로 돌아오니 어느 방향으로든 상관없었다.


“바나는 도깨비 가면을 쓰고 뛰어다니더군. 으르렁거리는 모양이 귀여웠소.”

“피천귀도 도망갈 거라는 말을 믿나 보네요.”


“아, 어둠이 짙어져야 돌아간다고 하더군. 여기서는 팬들이 더 소중하다나. 하하하.”

백하는 웃으며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에 반사된 빛이 그의 하얀 머리카락에 닿자 눈부시게 빛났다. 눈처럼 하얀 옷자락까지 더해져 백하는 오려 붙인 그림 같았다.


사빈은 백하에게서 눈을 돌려 강둑을 바라보았다.

“온천은 어떤가요?”


“무슨 문제가 있겠소. 물빛이 바뀌었어도 아무렇지 않다오. 색깔이야 무지갯빛이면 어떻소? 효능은 그대로이니.”


“무지갯빛이오?”

사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근사하네요. 이번에는 온천물을 무지갯빛으로 바꿔야겠어요. 축제 때마다 빛깔을 바꾸는 거예요. 등불과 어울려 아주 아름답겠죠?”


“사빈님이 한다면 뭐든 좋소.”

백하는 기뻐하는 사빈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나래가 방향을 틀어 왼쪽 샛강으로 들어섰다.


“그 후로 구멍을 찾았소? 한긋장벽과··· 반다강에 갔을 때처럼 말이오.”

백하는 품 안에서 작은 새처럼 떨던 사빈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소리만 가고, 떨림은 닿지 않았다.


사빈은 한긋장벽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한긋장벽! 불천수가 아니라 강가라고 했잖아?’


한긋장벽 끝에 서면 멀리 불천수가 내려다보인다. 까마득히 멀기는 해도 어쨌든 불천수가 보이는 곳이다.


‘멀리 갈 필요 없어. 어쨌든 보이니까 따지고 보면 불천수 강가잖아?’

사빈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혼자서는 배웅문을 나갈 수 없고, 누군가 동행이 필요해. 피천귀의 공격을 막아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백하를 바라보았다. 그 정도면 훌륭하다.


“부탁이 있어요.”

“무슨?”

백하는 사빈이 진지하게 바라보자 웃음을 삼켰다.


“한긋장벽 뒤편도 살펴봐야겠어요. 안에서는 보이지 않잖아요? 바깥에서 봐야죠. 그들은 장벽 바깥에서 구멍을 내니까요.”


“그렇군. 피천귀들이 다니니.”

백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빈은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배웅문만 나가면 삼도천을 따라 불천수로 이어져. 한긋장벽에서 멀어지지만 않으면 돼.’

사빈은 벌떡 일어났다. 휘나래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지금 바로 가시죠.”

그녀는 다급하게 날아올랐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황망히 서 있던 백하도 그녀를 따라 남쪽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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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천계_중앙황천 대차사들 23.07.21 45 2 11쪽
89 천계_한긋장벽을 따라 23.07.20 44 2 11쪽
» 천계_부르는 소리 23.07.19 46 2 10쪽
87 천계_마음이 가는 곳 23.07.18 46 2 11쪽
86 천계_영진촌 낭원 23.07.17 46 2 11쪽
85 천계_변경된 일정 23.07.16 41 2 14쪽
84 천계_백하의 고민 23.07.15 47 2 12쪽
83 천계_어리화는 짙어지고 23.07.14 44 2 13쪽
82 그믐_그리운 아버지 +2 23.07.13 47 2 14쪽
81 그믐_한 번뿐인 나들이 23.07.13 46 2 13쪽
80 그믐_새로운 일꾼 23.07.12 44 2 10쪽
79 그믐_거리의 소녀 23.07.11 46 2 12쪽
78 그믐_중간자의 사연 2 23.07.10 47 2 9쪽
77 그믐_중간자의 사연 1 23.07.10 47 2 11쪽
76 그믐_운기정 서재에서 23.07.09 48 2 11쪽
75 그믐_흉흉한 소문 23.07.08 50 2 12쪽
74 그믐_백홍선원 부운거사 23.07.07 55 2 11쪽
73 그믐_창성곡의 산적 23.07.06 54 2 13쪽
72 천계_온사랑 팔찌 23.07.05 52 2 13쪽
71 천계_회향미곡 잉걸둥지 23.07.04 51 2 13쪽
70 천계_이상한 편지 23.07.03 57 2 11쪽
69 천계_온천 물빛이 바뀌다 23.07.02 57 2 13쪽
68 천계_두 번째 구멍 23.07.01 57 2 13쪽
67 천계_피하지 못할 고백 23.06.30 64 2 10쪽
66 천계_뜻밖의 만남 23.06.29 60 2 14쪽
65 천계_다시 시작된 수색 23.06.28 60 2 12쪽
64 천계_천인의 기억법 23.06.27 63 2 12쪽
63 천계_인연이라는 끈 23.06.26 66 2 12쪽
62 천계_마음을 전하는 일 23.06.23 71 3 12쪽
61 그믐_옥구슬의 사연 23.06.22 7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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