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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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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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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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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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2)

DUMMY

“울산 지역의 상황이 사측과 조정국면에 들어간다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현세 엔진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요구는 결코 하루 이틀 만에 갑자기 튀 나온 게 아닙니다. 그건 대를 이어 목숨 바쳐 현세그룹을 일궈왔던 노동자들이, 6월을 거치면서 이제야 제대로 된 처우와 임금을 요구하게 된 사건이다, 이 말이지요. 사측도 그걸 모르지 않기 때문에 노사의 협상안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건데.. 그게 조정국면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노무연의 표정이 그새 다시 엄격해 졌다.


예나 지금이나, 직원들을 무슨 노비정도로 여기는 재벌들과 이에 대한 소송들을 도맡아온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네. 이미 그에 대한 요구는 현세그룹 본사에 전달됐습니다. 남은 건 왕회장님의 결단 정돈데.. 아마도 왕회장님은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실 겁니다.”



나는 차분하게 내가 정주열에게 건넸던 제안의 일부를 공개했다.



“그 왕회장님이라는 분이.. 현세그룹의 정주열 회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질문을 하는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요. 그럼 그 분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결국 이 상황에 대한 책임도, 해결책도 전부 그 분이 아니면 답이 없는 것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노무연의 말을 받았다.



“누굽니까? 그 요구를 정주열 회장에게 했다는 사람이. 김영산 총재입니까? 아니면, 김대종 의장이나 민통당의 다른 의원입니까?”



그의 눈빛이 의심으로 가득했다.


솔직히 범국본에 합류함으로써 극적인 통합을 이루긴 했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YS와 DJ는 이미 노동자들이나 학생들의 개별 투쟁에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학사건 때부터 학생들과 노동자, 서민들의 억울한 사건들을 주로 맡아왔던 인권변호사 노무연에겐 YS와 DJ는 물론, 정치인들 자체가 믿지 못할 족속들이었으리라.



“민통당은 물론, 김영산 총재나 김대종 의장조차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얘기들은.”



나의 대답에 노무연의 표정이 혼란스럽다.



“그럼 대체 누가..”


“제가 했습니다. 솔직히 그 요구도 제가 정주열 회장에게 제안한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



놀라움을 지나 그의 눈이 어느새 다시 호기심과 나의 속내를 읽으려는 의지로 반짝였다.



“아까츰에.. 일단 김영산 총재가 보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근데, 그 거하고는 별도로 혹시 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음.. 그러니까 일단 말고, 이단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노무연이 웃었다.


내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단순히 YS의 심부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그가 이해한 것 같다.



“후후.. 네, 변호사님. 당연히 이단이 있습니다. 그건..”



그가 뭔가 중차대한 일임을 직감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범국본의 거리대표로 8인회담에 합류하셔야겠습니다. 뭐, 아직까지는 저를 믿기 힘드실 테니, 그 시기는 어떤 식으로든 정주열 회장의 결단이 내려지는 그 날로 하지요. 그동안 저는 변호사님이 합류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노무연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하.. 좋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정주열 회장의 결단이 현실적인 조치로 가시화만 된다면, 그리 해봅시다. 다만, 제가 알기론 이미 개헌 문제는 범국본의 손을 떠났는데, 저의 합류가 가능하겠습니까? 정부 측에서 민통당 쪽으로 의결권자가 늘어나는 걸 합의해 주겠느냐, 이 말입니다.”



핵심만 짚어내는 직설화법. 역시 노무연이다.


하긴, 갇혀있는 태근이 형님도 꿰뚫어 보고 있는 사안을 승부사라고 불리던 그가 모를 리 없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특단의 방법도 필요할 테고. 하지만, 그 문제는 저에게 맡겨두시죠. 어차피 정주열 회장의 결단부터 변호사님의 8인회담 합류까지, 어떤 것도 쉬운 일은 없습니다. 확인되고 성사되지 않으면 변호사님이 움직이실 일도 없고요. 다만, 저도 분명히 할 것은 변호사님이 8인회담에 합류하셔야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8인회담에서 결선투표제의 도입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못해도 최소한 여론조사 공표 금지조항만이라도 삭제해야 하고요.”


“?!!”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그의 눈매가 그 의미를 살피느라 비상하게 꿈틀 거렸다.



“지금 그 말씀은.. 혹시 양김의 단일화가 실패할 수도 있다..”


“네. 맞습니다. 애석하지만,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만일을 대비해야만 합니다. 합류해보시면 아시겠지만, 민통당 쪽이라도 결코 우리와 생각이 같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결선투표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고요. 그게 제가 변호사님을 범국본의 거리대표 자격이라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노무연의 표정이 기가 막혔다.


당대에 그 누구도 양김의 분열을 이 시기부터 우려하진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노무연은 80년 양김의 분열 때엔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계형 변호사가 아니었던가.


덕분에 그가 이 시기 누구보다도 순수한 투사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권력의 속성에 대한 감각은 동급대비 탁월하진 못한 것 같았다.



“흠.. 그렇다면, 현재 김위원장님은 민통당에 있지만 민통당 분이 아니군요. 혹시 제게 또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그가 가까스로 현 정국을 씹어 삼킨 듯 내게 물었다.



“글쎄요. 더 할 얘기가 있다면..”


“이 얘기가 정부쪽은 당연하고, 민통당에도 흘러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겠지요. 저는 오늘 단지 김영산 총재의 영입 제안을 듣고 사양한 것으로 해야 하고요.”


‘허! 이 양반 보게. 그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선.. 뭐?’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일은 양김의 분열을 막아 6월의 핏 값을 제대로 받아내는 게 첫 번째 목적이지만, 만약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의미 있는 씨앗을 심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나는 그가 순간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내가 권력의 속성에 대한 그의 감각을 탓하자마자, 그가 현장에서 보여준 대처가 거의 즉각 조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다음은 뭡니까? 핏 값도 받고, 씨앗도 심은 그 다음 말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음을 묻는 그의 질문에 이번엔 나의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




노무연 변호사는 기가 막히게도 태근이 형님과 닮아 있었다.


아니, 보통 그 정도의 거물들이 되는 대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가 지금 나를 긴장시키는 것처럼, 항상 다음에 그 다음을 보고 준비하는 혜안 같은 이유 말이다.



“다음은.. 저의 정치적 동지가 되어주시라는 겁니다.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그가 힘주어 묻는 물음을 정면으로 되받았다.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언제나 이런 상대에게는 담백한 승부가 최선이기 때문이다.


앞뒤 없이 오로지 하나만 보고 직진하는 상대는 그렇게 맞서는 거다.


지금 이 시절의 노무연처럼 말이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그의 눈빛이 수많은 상념들로 젖어갔다.


아마도 그는 나의 말을 통해서 평소 자신이 생각해왔던 신념과 그 신념대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떠올렸으리라.



“위원장님의 정치적 동지가 되면, 말씀하신 그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까? 위원장님의 민통당과 그 당의 어른들도 아직 만들지 못한 세상을 말입니다.”



노무연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 또한 끝나지 않는 기득권과의 싸움에서,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내고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인물이다.


물론, 그의 죽음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건, 그가 자신의 가족과 최측근들조차도 기득권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봤고, 그 과정에서 괴로워하며 스스로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사실만큼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거다.



“저의 원칙과 상식이 변호사님의 그것과 일치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님도 그래서 민권운동의 연장선으로 정치권의 참여를 고려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국회의원이 된다면 변호사와는 비교가 안 될 영향력으로 민중운동을 지원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저의 원칙과 상식이 꼭 당신 같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당신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깨끗한 척 하지도 않을 거라서.’



나는 이 시절 변호사 노무연이 품었던 생각을 기억해냈다.


당대의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제도 정치 참여를 놓고 의견이 달랐을 때,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의 그는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내년 총선에서 YS에 의해 영입되어 부산 동구에 출마한다.


그의 평생 꿈이자, 유업이 된 ‘가자! 노무연과 함께, 사람 사는 세상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좋습니다. 그 정도면. 그럼 그 문제는 제가 8인회담의 임무를 마치는 시점에서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요. 뭐, 그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제가 8인회담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문제일 것이고.”



그의 표정이 그제야 비로소 개운해 졌다.


반면, 그의 미래를 알고 있는 나의 속내는 애써 가라앉혀 보아도 못내 씁쓸했다.


나는 내가 있는 한 절대 그의 미래를 똑같이 반복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을 내려오는 복도에서 서류 뭉치를 잔뜩 품에 않은 잘 생긴 청년이 보였다.



‘훗. 이 양반도 감회가 새롭네. 거, 참 인물 한 번 훤하다. 훤해.’



35살의 청년, 아니 이 시절 분위기에선 장년이라고 불러야 할.. 변호사 문재민이었다.


그가 서글서글한 눈매로 나와 눈을 맞추며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았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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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46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3) 23.06.04 108 3 10쪽
» 45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2) 23.06.03 112 3 10쪽
45 44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1) 23.06.02 120 3 9쪽
44 43화 다른 나라 DNA (6) 23.06.01 130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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