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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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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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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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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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공존의 조건 (5)

DUMMY

노무연 변호사의 분석은 그렇게 날카롭다 못해 베어진 자리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알고 있던 역사에서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태근이 형님과 민통련도 있고, 그의 생각이 전부 그에게서 나온 것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긴. 나도 그래서 국민 경선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결선투표제를 밀어 붙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합의를 못하면, 국민들의 힘으로라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니까.’



나의 개입으로 개헌의 시계는 조금씩 늦춰지고 있었다.


본래 8월까지 마치기로 했었던 전문과 조항의 합의가 결선투표제라는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9월 15일까지 끝내기로 했던 부칙의 합의일정도 틀어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것은 결국 9인회담에서 9월 15일까지 합의하기로 했던 개헌안이 국회의 ‘헌법개정 특별위원회’를 통해 본회의에 상정되는 일정 또한 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 앞으로 연쇄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국민투표와 새 헌법의 공포, 대통령 선거까지 줄줄이 차질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20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에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노 변호사님께선 노 변호사님의 캐스팅보트를 결선투표제에 던지실 테니, 저희 두 어른이 협조하길 바라신다는 거지요? 말씀하시는 걸로 봐선.. 이미 정민당 쪽은 결선투표제의 가결 쪽으로 결정이 난 것 같습니다만.”



나는 더 늦기 전에 짜고 치는 고스톱의 ‘스톱’을 외쳤다.


어려운 자리의 노무연 변호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그를 편하게 해주고자 나를 참석시킨 두 어른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아주 조심스럽고 송구스럽게 말이다.



“흠.. 노 변호사님과 민통련의 입장이 정 그렇다면, 저와 총재님도 좀 더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 봐야겠군요. 단지.. 이럴 경우, 우린 정민당의 저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결선투표 전에 우리의 분열을 부추기는 공작을 할 겁니다.”



박통에 이어 신군부까지, 오랜 세월 음해와 공작정치로 시달렸던 DJ의 음성에 짙은 한숨이 묻어 있었다.



“마, 좋다. 어차피 가부동수에서 노밴 표는 캐스팅 보트 아이가. 미리 막았다면 모르겠지만 서도.. 훗! 이 판국에 노밴캉 민통련캉 그래 맘을 굳혔으면, 우야겠노. 대신, 내도 노태후 글마가 우짤지가 걱정이데이. 글마 그기.. 또 무신 쌩쑈를 할지 모른다 아이가. 아, 참! 그라고 노밴. 우리는 적이 아니데이. 알제? 민통련 동지들께도 고마, 잘 전해 주고.”



DJ 못지않게 군부독재에 시달린 YS의 표정에, 그가 노무연 변호사에게 건넨 훈훈한 당부와는 달리 짜증이 가득했다.


그도 DJ도 자신들의 속내를 그대로 표정에 드러내는 것으로 나와 노무연 변호사의 대의에 승복하는 것이리라.



“이를 말이겠습니까, 총재님.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 오신 존경하는 두 어른이, 설마 단순히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볼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리가 남입니까? 우리들은 함께 폭압의 시대를 넘어온 동지가 아닙니까.”



노무연 변호사가 YS와 DJ에 이어, 이심전심 나와 서로 시선을 맞췄다.




***




“대체, 어디까지 말씀들을 하신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민통련의 창당 준비까지 말씀하신 건 과했습니다.”



얼마 뒤, 노무연 변호사를 태운 나의 차가 공덕동 로타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양김과의 일전을 끝낸 그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다.



“왜요? 위원장님에 대한 얘기는 해도 괜찮고, 진보정당의 창당 얘기는 하면 안 됩니까? 어차피 알려질 사실보다야 위원장님이 프락치로 몰리실 상황을 더 걱정해야 하는 게 순서일 텐데요?”



노무연 변호사가 특유의 짓궂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여유를 부렸다.



“그거야 변호사님이 말씀하시지 않을 줄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보다 민통련에선 어떻게 그리 빨리 움직인 겁니까?”



달리는 차 속에서 나는 내가 직접 개입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따져 물었다.



“문 목사님하고, 민통련 상임위원들이 번갈아가며 민청련의 김태근 전의장을 만났답니다. 마침, 양김의 단일화가 범국본의 손을 떠나 불안불안 하던 그분들에게, 김 전의장이 자결이라도 할 것처럼 압박을 했다지요? 김 전의장의 결기야 재야 쪽에선 이미 정평이 나 있고.. 재야의 제도정치 참여도 워낙 오래된 화두다 보니, 그래 됐습니다.”


‘문익한 목사? 허.. 그래. 민통련 의장이신 그분과 산하의 주력인 민청련 초대의장 태근이 형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내가 노무연 변호사를 준비시키고, 그분들이 곤란해 하시던 9인회담 합류까지 성사를 시켜놨으니..’



나는 운전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만 남겨두고서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나저나,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대체.. 위원장님은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개입되어 있는 겁니까?”



나름 협상내용에 만족한 듯, 차를 탈 때부터 내내 싱글거리던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비밀이라면 비밀인 나의 말 못할 사연을 감추기 위해, 그저 무표정하게 전방을 주시했다.


당장 그를 납득시킬만한 마땅한 핑계거리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딱히 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민통련에서 지금의 논의에 다시 불을 붙인 사람이 김태근 전의장이고, 이 사안으로 김 전의장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김 위원장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좀 소름이 끼칩디다. 과연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데, 이래 할 수가 있을까? 또 대체 어디까지 개입이 된 걸까.. 뭐, 오만가지 생각들이 들었지요.”



힐끗 그의 모습을 살피는 내 눈에 그새 미소를 머금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근데..”



순간, 하던 말을 끝내기 위해 잠시 나를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나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황급히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최대한 무표정하게, 마치 훔쳐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까 이곳에 오면서 들었던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김 위원장님의 그림이더라, 이 말이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주열 회장부터, 울산에, 철거민에, 노태후 얘기까지 들은 저로선 그래 생각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이해하시죠?”



나는 그가 하는 말들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상 그가 알고 있는 대부분이 나로부터 시작된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 그가 이 애기를 통해서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있었다.



“자, 그럼.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직선제 쟁취와 군부독재의 종식을 알리는 6.29가 민주주의의 완성이 아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뒤따른 민주진영의 분열을 분열이 아닌 다양한 민주적 요구로 수용하기 위해, 양김의 현실적인 단일화를 기획했다. 또..”



날카롭게 파고드는 그의 말에 입술이 타들어 갔다.


그러나 그는 내가 미처 입술을 축일 새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울산과 같은 노조문제와, 철거민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만드는 한편, 재벌의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고, 최종적으론 그 모든 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진보정당의 진출까지 기획했다. 이 거죠. 야, 이거 참.. 말이 쉽지, 이게.. 위원장님. 저 같이 평범한 사람이 이런 당신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조금만 말씀을 해 주시면 안 됩니까?”


‘젠장. 이 양반과 최대한 많은 것들을 공유하기로 했던 내 생각이 건방이었구나! 그 짧은 시간에 모든 상황들의 연결점을 정확하게 파악해버렸다. 어쩐다..’



나는 이생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거하는 수밖에..’ 같은 개소리마저 떠오르는 걸 보면, 너무 당황해도 미칠 수 있나보다.


하지만, 나는 한숨을 가장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어쩌면, 지금이 앞으로 이 양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에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변호사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변호사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제가 알고 기획했다는 것은 과찬이십니다. 일례로 솔직히 민통련에서 진보정당의 창당을 준비하고 있으며, 백기환 선생이 그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셨다는 건, 저도 오늘 변호사님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거든요.”



내가 짐짓 운전에만 열중하는 척, 무심코 하는 대꾸에 그가 침묵했다.


정말로 몰랐던 것들을 모른다고 하는 거니까, 조금은 먹혀들어가고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더더욱, 두 어른의 단일화 실패에 대한 것은 제가 아니더라도 재야의 많은 분들이 우려하기도 했고, 또 실재로 확신했던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 그렇습니까? 그걸 누가 또 확신했습니까? 저도 그렇고 민통련의 대다수 어른들도 설마설마 했던 일을 말입니다. 혹시 정주열 회장이나, 노태후가 확신을 하던가요? 아니죠. 그걸 확신했다면, 위원장님의 가장 큰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었을 테니, 협상은 힘들었을 테고.. 궁금하네요. 그 사람이.”



그의 표정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 양반이 정말.. 뭘 그렇게 뻔히 다 안다는 표정으로..’


“하.. 일단, 김태근 전의장이었습니다. 제가 이 사안으로 문의 차 그분을 만난 것도 맞고요. 그에 따른 결선투표제를 제안한 것도 그 분입니다.”



나는 싱글거리는 노무연 변호사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재경구 선생과의 대화에서도 그저 ‘당신들이 모르는 비상한 재주’ 정도로 넘어가셨던 형님이면, 그 모든 얘기의 진원지가 나라는 것을 밝히진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더더욱, 태근이 형님의 성격상 본인조차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선 함구할 가능성이 크다.


현실적으로 어린 내가 곤란해 질 상황은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예. 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사실, 제가 위원장님께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내 답에 대한 나의 시시콜콜한 합리화가 무색하게 노무연 변호사가 말을 돌렸다.


왠지 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를 향해 그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 그가 이어갈 미지의 대화에 나의 온 신경이 곤두서고 있던 그때.



“고생하셨다는 겁니다.”


그의 차분한 음성에 내 가슴이 놀란 것처럼 덜컥 내려앉았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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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화 공존의 조건 (7) 23.06.16 65 3 11쪽
58 57화 공존의 조건 (6) 23.06.15 70 2 9쪽
» 56화 공존의 조건 (5) 23.06.14 67 3 11쪽
56 55화 공존의 조건 (4) 23.06.13 58 3 10쪽
55 54화 공존의 조건 (3) 23.06.12 65 2 10쪽
54 53화 공존의 조건 (2) 23.06.11 75 3 9쪽
53 52화 공존의 조건 (1) 23.06.10 88 3 10쪽
52 51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8) 23.06.09 97 4 11쪽
51 50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7) 23.06.08 93 5 11쪽
50 49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6) 23.06.07 94 3 9쪽
49 48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5) 23.06.06 106 4 9쪽
48 47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4) 23.06.05 105 3 10쪽
47 46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3) 23.06.04 108 3 10쪽
46 45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2) 23.06.03 111 3 10쪽
45 44화 잠룡들을 움직이다. (1) 23.06.02 120 3 9쪽
44 43화 다른 나라 DNA (6) 23.06.01 130 3 9쪽
43 42화 다른 나라 DNA (5) 23.05.31 139 5 9쪽
42 41화 다른 나라 DNA (4) 23.05.30 150 7 10쪽
41 40화 다른 나라 DNA (3) 23.05.29 154 7 9쪽
40 39화 다른 나라 DNA (2) 23.05.29 150 6 10쪽
39 38화 다른 나라 DNA (1) +1 23.05.28 172 6 9쪽
38 37화 설계된 엔딩 (5) 23.05.28 164 4 11쪽
37 36화 설계된 엔딩 (4) +1 23.05.27 164 6 10쪽
36 35화 설계된 엔딩 (3) 23.05.27 156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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