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피아니스트의 영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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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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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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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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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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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범재

DUMMY

“우리 재은이 너무 잘 친다! 나중에 피아니스트 되는 거 아니야?!”


이재은.

그녀가 초등 1학년, 첫 콩쿨에 나가 대상 받았을 때 들은 말이었다.


“우리 딸은 천재야!”

“우와~ 재은아! 너무 잘 친다~”

“되게 피아니스트 같았어!”


기분을 좋게 해주는 주변의 칭찬들.


‘나, 엄청 잘 치나 봐!’


그것은 재은을 착각하게 했다.

자신이 제일 잘 친다고, 천재라고.


그다음 콩쿨에서도, 다다음 콩쿨에서도, 결과가 좋다면.


“역시, 재은이! 믿고 있었어!”

“우리 재은이가 제일 잘 쳐!”


무수한 칭찬 일색이 돌아왔고,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괜찮아, 우리 재은이는 천재니까, 다음엔 꼭 상 탈 수 있지?”

“그냥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었던 거야~ 컨디션만 좋았으면 더 잘 칠 수 있었잖아?”


위로와 함께 다음을 기대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기에 재은도 생각했다.


‘그래, 이번에만 실수한 거지, 다음엔 무조건 상 탈 수 있어!’


단순히 실수였을 뿐이라고.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어?”


초등 4학년, 제법 유명한 콩쿨에 나갔을 때 그녀는 상 하나 타지 못했다.

오직 관객석에 앉아 시상식이 열리는 무대 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체 대상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와 그 옆에서 무표정하게 학년 대상을 수여 받는 아이를.


‘나, 나도 잘 쳤는데···.’


그 콩쿨에서 실제로 재은은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피아노 선생님도 상을 탈 수 있겠다고 확신하며 칭찬해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정답은 단순했다.

콩쿨이란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였으니까.

더 잘 치는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었구나···.’


재은은 그동안의 착각에서 깨어났다.

그저 부모님과 선생님의 칭찬은 허울이었다고.

자신은 평범한 아이 중 한 명이었다고.


무대 위에 서 있는 두 사람.

이리나와 정하린.

저 아이들이야말로 천재라고.


공허하고 씁쓸한 기분이 재은을 덮쳤지만,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비록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건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아노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기에.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콩쿨에선 항상 리나와 하린을 마주쳤다.

그 둘은 언제나 그랬듯 엎치락뒤치락 전체 대상과 학년 대상을 나눠 가졌으며 천재라는 걸 증명했다.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그러나 재은은 상심하지 않았다.

1등도 2등도 될 수 없다면 3등이 되면 되는 거 아닌가.


‘천재가 될 수 없다면 평범한 사람 중 1등이 될 거야!’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늘 3등의 자리를 지켜왔다.

초등부까지는.


“중등부 3위는 205번 김준서 학생입니다.”


김준서.

그는 초등부 시절엔 항상 재은보다 아래 순위에 있던 남자애였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헤어스타일과 거만한 태도는 늘 눈에 거슬렸지만, 실력 자체는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었다.


‘말도 안 돼···.’


그랬던 그가, 중등부에 올라오자마자 재은을 제친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운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에도, 다다음에도 늘 3위는 준서의 차지였다.


재은은 그저 허탈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결국엔 3위에서도 밀려나고 만 자신의 처지가.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데··· 왜 너희들은 그렇게 쉽게 하는 거야?”


그때부터였다.

자신이 아닌 남을 깎아내리기 시작한 건.


“하, 이리나나, 너나, 아주 끼리끼리 노는구나?”

“네 실력으로 천예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얘네 둘이 맨날 상을 독차지하니까, 이젠 같은 콩쿨 참가하기만 해도 짜증만 나.”


노헌을 괴롭히게 된 것도 그런 탓이었다.


- “그게 왜 리나랑 정하린 탓이냐? 상을 타고 싶으면 노력을 더 하던지.” -


저번 콩쿨에서 노헌에게 들었던 말.

남에게 제일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재은의 역린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소리칠 뻔했다.


“네가 나에 대해 대체 뭘 아는데?!” 라고.


지금껏 쌓아온 내 노력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벽에 가로막혀도 언제나 포기하지 않았던 내 노력을.


“하, 뭐? 노력? 내가 안 했겠냐? 아 맞아, 너도 그 둘이랑 똑같은 부류였지? 그래, 너한테 이런 말을 해서 뭐하겠냐.”


그러나, 말해봤자 노헌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현재 노헌과 재은은 콩쿨 중.


“219번, 정하린···.”


재은의 앞 순서가 누가 됐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1등도 2등도 3등도, 아닌 이노헌, 그 녀석만 이기면 됐으니까.


“말이 통하지 않으면 연주로 보여줄게.”


자신의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또다시 무대 위에 올랐다.



♪♪♪



무대 위에 재은이 올라왔다.

앞서 펼쳐진 하린의 연주에도 꿀리지 않는 당당한 발걸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인데?】


현묵의 말대로 그녀의 표정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노헌의 눈에는 연주회장에 여전히 「겨울바람」이 남기고 간 여운이 맴돌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도 나한테는 잘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재은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천천히 들이마신 숨을 내뱉은 그녀는.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양손으로 시작된 빠른 템포.

낮음 음계부터 높은 음계까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배에 부딪혀 출렁이듯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좋은데?”


툭 내뱉는 준서.

그의 말대로 재은의 연주는 밋밋했던 저번 콩쿨과는 전혀 달랐다.


「겨울바람」에 맞서는 장엄하고 거대한 「대양」.

끝없이 펼쳐진 캄캄한 지평선에서 거친 파도가 밀려왔다.

그러나 물의 습격에도 끄떡없이 나아가는 항해.


바람과 파도에 뒤로 밀려날 때도 있었지만, 그 배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항해는 그들의 온 힘을 담은 생존의 발버둥이었다.


【쇼팽의 마지막 에튀드 「대양」, 끝내고 말겠다는 의지력이 중요한 곡이야.】


겹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주법, 아르페지오가 강하게 드러나는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쳐야 하기에 힘 조절이 몹시 중요했다.


【힘, 호흡 조절을 못 한다면 팔이 견디지 못해 끝까지 칠 수 없어.】


아쉽게 그런 현묵의 설명은 노헌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시선과 귀를 떼어놓을 수가 없었기에.


검은 파도를 뚫고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항해의 끝.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 거대한 「대양」에서 그들은.


희망의 닻을 내렸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재은의 연주.

끝까지 울리지 않은 종소리.


고요한 연주회장의 정적을 깬 것은.


“221번부터 240번까지는 10분 후까지 대기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다음 순서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었다.


그제야 소란스러워지는 연주회장.


“이재은이었나? 예전보다 성장했네.”


옛날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준서.

그가 어떻게 재은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노헌과 현묵, 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의 등장.


‘지, 질 수도 있겠는데?!’


갑작스러운 재은의 성장이었다.


【노헌아, 동요하지 마. 우리도 보여주면 되잖아.】


현묵은 지금도 노헌을 믿고 있었다.

오늘 아침 마지막 리허설도 괜찮았고, 긴장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런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노헌.


그 순간, 준서 방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여기 내 자린데.”


연주를 마치고 온 하린이었다.


“지금은 내가 앉았으니 내 자리 아니겠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꼬는 준서.

그를 보고 찡그린 하린은 이내 준서의 반대편,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둘 다 왜 내 옆에 앉는 거냐고.’


무표정한 하린과 흡족하다는 듯 웃는 준서.

그 둘 사이에 낀 노헌은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자리를 옮길까, 생각도 했지만, 곧바로 하린에게 막혀버렸다.


“그래서 이노헌, 왜 전공 안 하는 건데? 전공 안 할 거면 콩쿨은 왜 나온 거고? 피아노는 누구한테 배웠던 거야?”


그녀가 대기실로 떠나기 전,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던 탓이었다.


“이봐, 정하린. 노헌이가 불편해하잖아.”


하필이면 다섯 손가락 중 중지만 펴고 안경알 사이, 금빛 안경테를 들어 올리는 준서.


‘심지어 내 이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하린이 부르는 걸 듣고 자연스럽게 노헌의 이름을 부르는 준서였다.


“혹시 불편해?”


준서의 가운뎃손가락을 무시하고 묻는 하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째서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 궁금했다.


“괜찮아.”

“다행이다.”

“칫.”


혀를 차는 준서.

오히려 노헌은 그가 하린과 무슨 사인지 궁금했다.

그걸 묻기 위해선 일단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피아노는 그냥 취미일 뿐이고, 오늘 콩쿨은 네 뒤 순서였던 애랑 내기해서 나온 거야.”

“내 뒤 순서? 아··· 그 애구나.”


재은을 떠올린 하린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아니, 애초에 지금까지 다른 표정을 지은 적이 있나?’


지금껏 노헌이 봐왔던 하린의 표정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였다.

무표정에서 살짝씩 변형된 것들.


“알아?”

“그냥··· 콩쿨에서 여러 번 봤었지.”


하린에게 있어 재은의 이미지는 천예중학교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예전에 눈치챘었기에.

그러나 그걸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그것보단 노헌을 가르친 피아노 선생님이 누군지 궁금했다.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건 최소한 교수님이나 피아니스트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녀가 유력하게 뽑는 한 명의 후보가 있었다.


“혹시, 강현묵 피아니스트한테 배웠었어?”


대답을 듣는 순간, 노헌은 심장이 철렁 가라앉을 뻔했다.


‘어떻게 안 거지?’


올라가는 심박수,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

애써 아닌 척 딴청을 피웠지만, 그녀는 여전히 노헌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저번에 선생님··· 스카우트하러 온 천예고등학교 선생님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그 영상 속 연주에 내 느낌이 너무 많이 났나 봐.】


예를 들어 소설가에겐 특유의 문체가, 요리사에겐 고유의 맛이 있듯 피아니스트에게도 자신만의 소리가 있었다.


“추궁하려는 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노헌이 대답하지 못하자, 조그맣게 말하는 하린.

그 와중에 호기심을 못 참았는지, 준서 역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경청하고 있었다.


【그냥 어렸을 적에 잠깐 배웠다고 해.】

“그냥 어렸을 적에 잠깐 배웠어.”

【고민도 없이 말해버리네?!】


그의 말을 들은 노헌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똑같이 내뱉었다.


“어쩐지, 네가 영상에서 친 「겨울바람」, 어쩐지 강현묵 피아니스트가 치는 것 같았어.”


정곡을 찌르는 하린의 한마디.

노헌은 애써 웃으며 넘어가려 했지만.


“정하린이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들어보고 싶네. 어디에 검색해야 해?”


흥미를 보이는 준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영상의 제목을 알려주었다.


‘뭐야? 조회 수가 언제 이렇게 올랐지?!’


어느샌가 150만 회가 된 영상.

부담감이 몇 배는 늘어난 기분이었다.


“이제 다시 시작하니까, 이따가 들을게.”


준서의 말을 듣고 무대를 보니 221번 학생이 들어서고 있었다.

재개되는 콩쿨.

여럿의 순서가 지났지만, 이번 조에선 하린과 재은처럼 특출난 연주를 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끝낸 240번.


【이제 우리 차례야.】

“241번부터 260번은 10분 후까지 대기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현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

그제야 노헌은 자신의 차례가 다가온 것이 실감 됐다.


“갔다 올게.”


하고 노헌이 일어서자.


“나도.”


곧바로 따라 일어나는 준서.


“잘 다녀와.”


손을 흔드는 하린의 배웅을 받으며 노헌과 준서는 대기실로 향했다.

이미 어느 정도 꽉 차 있는 대기실의 의자.

그중 맨 마지막, 260번 노헌의 자리에 다가가자, 앞 순서, 비어있는 259번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지막 순서야.”


말하며 노헌이 자리에 앉자.


“어, 나돈대?”


바로 옆자리에 앉는 준서.

둘은 서로를 끔뻑끔뻑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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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 번째 콩쿨 +2 23.05.18 219 10 13쪽
8 천예중, 정하린 +2 23.05.17 218 12 11쪽
7 콩쿨 견학 +3 23.05.16 221 9 13쪽
6 뒷걸음질 +1 23.05.15 229 12 12쪽
5 천예고등학교 +1 23.05.14 235 10 12쪽
4 88명의 친구 +2 23.05.13 260 11 12쪽
3 시작의 아라베스크 +1 23.05.12 318 13 12쪽
2 피아니스트와 중학생 +1 23.05.11 397 10 12쪽
1 하늘에서 떨어진 피아니스트 +2 23.05.10 689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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