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형사, 눈 떠 보니 무림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래몽래인
그림/삽화
배민기
작품등록일 :
2023.05.10 14:48
최근연재일 :
2023.08.02 23:37
연재수 :
6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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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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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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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63> 천 개의 봉우리가 몸을 떨다

DUMMY

*

누군가가 흰 천을 가져와 검무룡의 시신을 덮었다.

교도들은 한 명씩 시신에 다가가 교도들이라면 항상 지니고 다니는 붉은 끈과 노란 끈을 올리고는 기도했다.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끈과 달을 상징하는 노란 끈. 교도들이 일상을 함께하며 신을 향한 기원과 바람을 담은 끈.


산 자의 일상 속 바람과 기원이 죽은 이의 시신을 덮었다.

죽은 이를 보내는 산 자들의 마지막 축복 같은 선물이다.


로운과 취소연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일월교주, 아니 검무룡과 생사의 결투를 벌인 로운인데도 교도들 그 누구도 그를 겁박하지 않았다.


로운도 마음속으로 검무룡의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분노였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검무룡을 죽인 것은 아니다. 또한 죽이려는 마음도 없었다.

다만 지지 않으려 했고 나아가 그를 제압하려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고 사는 일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그가 살아남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로운이 죽는 것 뿐.

하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 로운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로운 심중에 드는 일말의 죄책감을 덮어주지는 못했다.


가슴 아팠다.

그가 확실히 악인이었다면, 연쇄살인범이거나 지명수배자이거나 하다못해 사기꾼, 강도라는 확증만 있었더라도 경찰의 책무를 다한 것이라는 합리화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틀림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들었고 그의 검에 거의 죽을 뻔 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를 악인이라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광경을 보고는 그가 악인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절대 악인이라면 스스로 종말을 맞는 것 보다는 죽는 그 순간까지 싸웠을 테니까.


그래서 분노하고 있었다, 로운은.


그를 대신 내 세운 자, 검무룡을 교주라고 여기게 만든 자. 배를 보내 이곳으로 모셔와 놓고는 자신은 숨어들고 다른 이를 방패 삼은 자.


교주.


그를 만나야 했다.

그를 만나 검무룡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묻는 것이 검무룡에 대한 ‘애도’일 것이다.

그를 만나 검무룡을 대신 내세운 것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것이 ‘분노’의 정당한 표출일 것이다


*

소격동은 시신으로 가득 찬 거대한 무덤이 되고 있었다.


사흘에 한 번 악령을 마시던 사내는 맹주와 편방주와 벽자룡을 하루에 하나씩 마셨다.

악령을 마시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는데 강력한 먹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루에 셋을 마시고 다음 날엔 여섯을, 그 다음 날에는 열둘을 마셨다.


사내는 악령을 마실수록 강해졌지만 초조함도 그만큼 커져갔다.

자신의 강해지는 만큼 그가 상대해야 할 자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격동에는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무덤이 된 소격동을 빠져나왔다.

더 강해지려면 더 강한 자들을 마셔야 했다.



*

로운에게 다가와 설산을 오르라 한 건 지밀원주 무영흔이었다.

설산을 오르면 교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설산 기슭, 백탑성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공간에 교주가 있었다. 일월신주와 함께.


로운과 소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교주는 그들을 등진 채 백탑성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당도한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말없이 백탑성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운과 소연도 교주처럼 백탑성을 내려다보았다.


백탑성에는 작은 불꽃과 함께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무룡의 영혼이 그들이 모시는 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듯 했다.


“내 아우라네.”


교주가 입을 떼었다. 마치 친구한테 얘기하듯 담담하게.


“검무룡이?”


로운이 놀라서 되물었다. 동생을 자기 대신 내세웠단 말인가?


“율리혁이네.”

“뭐라는 거야?”

“아우는 검무룡이 아니라 율리혁, 나는 율리납. 일월교의 교주이지.”


교주가 돌아서며 말했다.


“뭐, 뭔데? 너!”


교주의 얼굴을 본 로운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너 뭐야? 검무룡이잖아! 넌! 저, 저기 죽은 거 너 아니야?”

“아우와 나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났네. 그런데 나는 교주가 되고 아우는 나의 그림자가 되었지.”

“쌍둥이야? 둘이?”


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으로 보아도 확실한 것이니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아우가 기다리네. 내가 가던가 자네가 가던가, 한 명은 아우의 길동무나 되어야겠지.”


대답 대신 한 말이었다. 대화는 길게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와! 쓰레기네 진짜! 동생을 대신 내세운 거냐? 네가 죽을까 봐 동생을 방패 삼았다고? 쌍둥이 친동생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로운의 분노에 게이지가 있다면 바늘이 빨간 위험표시를 넘어 몇 바퀴 빙빙 돌았을 것이다.


“너, 내가 좋게 말로 하려고 왔거든. 맹주 대 교주로 만나서 서로 윈윈하는 결말 보자고 맘 먹고 온 거라고. 근데 지금 막 마음이 변했다. 교주? 일월교? 너네 신이 그렇게 가르치디? 동생 목숨으로 니 목숨 연명하라고? 와, 완전 싸패네! 아니 쏘시오패슨가? 표창투 교수나 권이룡 경감님한테 진단 한 번 받아야겠다. 일월신은 개뿔! 그 따위가 신이라면 차라리 처녀귀신을 믿겠다!”


로운이 펄쩍펄쩍 뛰었다.

성질 나는대로 막 내뱉은 말은 반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반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뭔지는 율리납도 알 수 있었다.


“신의 뜻이다. 아우가 죽은 것도, 내가 너를 죽이는 것도,”

“그러니까! 그런 게 신이라면 씨댕! 도를 아십니까, 제삿돈 쌤쳐먹는 놈들 보다 하나도 나을 거 없다고! 도를 아십니까엔 진짜 도인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교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대답 대신 일월신주의 중간을 잡고 팔과 나란히 아래로 뻗었다.

역시 대화를 길게 이어 나갈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순간 뒷춤의 단봉이 찌릿 반응했다.

로운도 얼른 단봉을 꺼내들었다.


단봉을 본 교주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교주와 검무룡이 똑같이 생긴 것처럼 일월신주와 단봉도 닮아 있었다.

둘은 길이가 확연히 달랐지만 재질과 빛깔, 풍기는 느낌까지 똑같았다.


- 지이이이잉---

- 징-징-징-


일월신주가 긴 울음소리를 냈고 단봉은 짧게 끊어 울었다.

마치 오래 헤어졌던 쌍둥이 형과 동생이 만난 것처럼.


“잠깐만! 딱 하나만 묻자! 너 그 물건 어디서 났냐? 그거 만든 거 아니지? 어디서 줏은 거지?”

“신의 뜻!”


교주가 아주 짧게 대답했다.


“뭔 말만 하면 신 핑계네! 사이비 교주 주제...”


- 콰아----


말이 끝나기 전에 교주가 일월신주를 들어올렸다.

검은 빛 신주에서 신령스런 광채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일월신주가 천천히 움직였다. 광채가 점점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교주는 느리게, 너무 느리게 신주를 움직였지만 일대가 모두 신주의 권역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취소연이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로운이 검무룡과의 싸움에서 가슴에 일검을 내주었던 지라 그 상처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래서 소연도 한 손으로 철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언제든 뛰어들 수 있게.

만에 하나 로운이 교주한테 당한다면 자신도 이 설산에 로운과 함께 뼈를 묻겠다는 각오였다.


일월신주를 천천히 움직이자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백색의 설산에 불이라도 난 듯 거대한 붉은 원이 점점 커져나갔다.

거대한 태양이 설산 가운데 내려온 듯한 광경이었다.


백탑옥에서 설산을 올려다보던 무영흔과 소유흔이 동시에 외쳤다.


“일광개천(日光蓋天)”


드디어 율리납과 로운의 일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교주와 맹주의 일전이.


- 휘유우우웅------!


교주가 붉게 타오른 일월신주를 휘둘렀다.

일대에 쌓인 눈이 모두 그 열기에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분해되었다. 수목이 다 타버리고 바위가 으스러졌다.


로운도 견디기 힘든 열기였다.

하지만 견뎌야 하는, 견뎌야만 아우를 죽게 한 싸이코를, 신을 빙자한 사이비를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낙! 장! 불! 입---!”


로운도 힘껏 고함을 지르며 맞받아쳐갔다.

이제껏 로운의 고함이 음공이 된 경우는 여러번 있었다. 처음 몇 번은 그냥 놀라 지른 고함이었고 소격동에서는 분노에 자신도 모르게 내지른 고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도가 분명한, 목표가 확실한, 상대를 타격하려는 고함이었다.


낙.장.불.입.

단순히 한 번에 외친 것 같지만 낙장불입 네 번 발성에 각각 다른 공격을 실었다.


낙을 외쳐 일월신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벽을 쳤고

장을 외쳐 벽 너머 열기를 받아내는 방패로 삼았으며

불을 외쳐 열기를 뚫어 틈을 만들었고

입을 외쳐 틈을 타고 교주를 직접 노렸다.


로운의 음공 못지 않게 교주 역시 고강했다.


낙과 장은 의도대로 되었으나 불은 열기를 쪼개지 못해 틈을 만들 수 없었고

갈 길을 잃은 입은 일월신주에 부딪혀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에 교주의 일광개천 초식은 로운이 음공으로 세운 방패와 방어벽을 한꺼번에 뚫고 들어왔다.


로운이 낙장불입 세번 째 초식과 일곱 째 초식을 섞고 열아홉 째 초식을 연결해 교주의 일광개천을 막았다.


- 꽈릉---!


설산이 흔들렸다.

백탑성도 지진을 만난 듯 우르르 흔들렸고 거대한 호수가 마차 안의 물잔 처럼 거대한 파도가 뒤집혀 일어났다.

천 개의 봉우리를 담은 산맥 전체가 몸을 떨었다.


로운과 율리납이 단 한 번 봉을 부딪쳤을 뿐인데.

낙장불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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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66> 이게 죽음인가, 생각보다 편안해..... +4 23.07.31 44 3 10쪽
65 <65> 희망은 평행우주 저 편의 진파란. +3 23.07.26 40 2 10쪽
64 <64> 일광개천(日光蓋天) 대 일광개천(日光蓋天) +2 23.07.25 37 2 10쪽
» <63> 천 개의 봉우리가 몸을 떨다 +5 23.07.24 43 3 10쪽
62 <62> 교주와 검무룡, 율리납과 율리혁 +6 23.07.21 41 2 10쪽
61 <61>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 +4 23.07.20 43 2 9쪽
60 <60> 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하루만큼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2 23.07.19 46 2 9쪽
59 <59> 불령산 소격동의 마지막. +3 23.07.18 47 2 9쪽
58 <58> 소격동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내 +2 23.07.14 66 2 10쪽
57 <57> 마음으로 죽이는 것, 실제로 죽이는 것. +2 23.07.13 59 2 10쪽
56 <56> 죽고 죽이고, 또 죽이고 죽는 +1 23.07.12 68 2 11쪽
55 <55> 그 영화의 그 대사 '좋아해요', '나도 알아' +5 23.07.11 55 2 9쪽
54 <54> 로운이 취소연의 양 빰을 후려치고 +1 23.07.10 60 2 10쪽
53 <53> 사흘에 한 번, 악령의 식사를 하는 자 +1 23.07.07 67 2 9쪽
52 <52> 고맙다...... 라는 말 +3 23.07.06 67 2 9쪽
51 <51> 원한과 복수의 고리를 끊는 일 +2 23.07.05 68 2 10쪽
50 <50> 세상에는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2 23.07.03 59 2 10쪽
49 <49> 그녀의 낙장불입은 입맛이 쓰네 +3 23.06.30 66 2 9쪽
48 <48> 새꺄! 나 왼손잡이야. +3 23.06.29 71 2 9쪽
47 <47> 나한테 코피 내면 너는 피똥 싸는 거다. +2 23.06.28 69 2 10쪽
46 <46> 유유곡의 결전 +4 23.06.27 74 2 9쪽
45 <45> 임독양맥. 생사현관. 환골탈태. +4 23.06.26 74 2 9쪽
44 <44> 진심을 다해 죽음을 입에 담는 이 +2 23.06.23 69 2 9쪽
43 <43> 열빙지(熱氷池)에서 사흘 낮 밤을. +5 23.06.22 68 3 10쪽
42 <42> 죽어도 죽지 않는 자의 오로지 죽기 위해 사는 운명을... +3 23.06.21 66 3 9쪽
41 <41> 백발의 나체 노인, 생의선. +2 23.06.20 69 3 10쪽
40 <40> 멀고 아득하고 그윽한 곳, 유유곡(幽幽谷) +3 23.06.19 64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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