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추풍검 - 5분 후 갈라져 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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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렉스
작품등록일 :
2023.05.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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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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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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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봉 전투 4

DUMMY

나는 다시 태어났다.


번개로, 바람으로, 물로, 불로, 온몸을 벗겨내고 새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월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를 바라고, 내가 상처입힌 루아에게 속죄하고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이월, 바로 나.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장 이 전장으로 찾아왔고, 루아를 지켜냈다.


"루아."


다시 만난 루아는 내 어깨높이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루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좀 귀여워졌다."


내 짓궂은 말에 루아가 까칠한 반응을 보이리라고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에 오히려 내가 놀라 손을 떼었다.


그러니 루아가 나를 올려다보는데,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나는 다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어."


루아는 입술을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게는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슬픔에 빠진 루아에게 미소를 돌려줘서 그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루아의 앞에 섰다.


루아와 싸우던 사내는 아까 당산봉에서도 보았던 병무상서라는 양반. 왜 갑자기 반란을 일으킨 건지는 모르겠다.


병무상서는 이미 루아와 한바탕 벌였는지, 피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반갑네, 천수상좌의 아들이여. 나는 제주도 무림 병부상서 전천이라네."


전천, 그가 검지를 휘둘러 푸른 불꽃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작별이라네. 내게서 태어난 허물이여."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검지를 휘둘렀고, 검지에 매달렸던 불꽃은 칼날이 되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추풍인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쇄태."


허공에서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불꽃의 칼날을 막았다. 불꽃의 폭풍이 전장 곳곳으로 퍼져 갔다.


아마도 이 싸움이 마지막이리라.


나와 전천을 제외한 전원은 멀리 떨어져서 이 전쟁의 행방을 결정짓는 생사결을 지켜보았다.


불꽃의 칼날은 바람의 칼날을 서서히 불태웠다. 기를 불태우는 효과도 있는 듯했다.


쇄태는 이내 완전히 불꽃에 침식되었고, 불꽃의 칼날이 쇄태를 통과하여 다시 내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칼날이 나를 물어뜯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을 움켜쥐었다. 푸른 불꽃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터져 나오고, 내 몸 곳곳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며 영역을 키웠다.


불꽃에 먹혀 가는 내 모습을 본 전천은 그걸 왜 잡냐느니 멍청한 짓을 사서 한다느니 비난했지만,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심지어는 내 몸 전체가 불꽃에 뒤덮였음에도 나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버틸만하다고.


뇌단법 8식 제화. 불의 재앙을 극복하는 초식.


내 몸을 뒤덮은 푸른 불꽃 속에서 조금씩 붉은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은 푸른 불꽃을 차츰 먹어 치웠고, 머지않아 붉은 불꽃만이 내 몸을 뒤덮게 되었다.


뇌단법 8식 진眞·제화. 불의 재앙을 구현하는 초식.


이 불꽃은 다름 아닌 나의 불꽃이었다.


"저, 저것은···."


전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하려는 일을 깨닫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당황을 금치 못하는 그를 향해 나는 삿대질했다.


그러자 내 몸을 덮고 있던 불꽃이 몸에서 벗겨져 나가더니 전천에게 날아가 그를 덮쳤다.


전천은 검지에 달린 불꽃의 검을 휘둘러 막아내려 했지만 같은 불꽃인데 의미가 있을 리가 있나. 그는 곧 온몸이 불꽃에 휩싸였다.


그 또한 불꽃에 저항이 있는지 크게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입속으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이···천."


그가 속삭인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


이천, 그 역시 이런 방식으로 전천의 화염을 파훼했었다.


그의 사부 요한의 뇌단법으로.


요한과 일대제자들.


전천은 재래식 무공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무공을 만들겠답시고 설쳐대는 그들이 꼴사나웠다. 기존 무공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어느 날 그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요한과 뇌단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요한을 비난하는 논조로 폭언을 쏟아내었다.


그는 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료들이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으면 그도 필사적으로 따질 생각이었으나, 놀랍게도 다른 동료들도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만인이 무공을 쓰게 하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밥그릇이 빼앗기지는 않을지 불안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뇌단법의 실체를 파악하고 깎아내리기 위해, 전천은 홧김에 동료들과 함께 요한의 생가로 찾아가 그곳에 있던 요한에게 비무를 청했다.


요한은 비무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전천의 상대로 나선 것은 요한 본인이 아닌 이천이라는 젊은 제자였다.


전천은 감히 자기를 상대로 제자 따위를 내놓다니 무시하는 거냐며 역정을 냈지만, 요한은 우선 그를 먼저 상대해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짜증이 난 전천은 이천을 단숨에 일도양단하고자 곧장 창명신검을 펼쳤다.


이천은 불꽃의 칼날을 대놓고 맞아주었는데, 온몸을 태우는 불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불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거꾸로 전천에게 날리는 게 아니겠는가.


전천이 불꽃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는 동안 이천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와 안면에 정권을 날렸고,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전천은 동료들 앞에서 꼴사납게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창명신검이라고 했나. 별 대단한 건 없군."


이천은 손을 털며 전천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사부에게로 돌아갔다.


비록 요한이 이천에게 말조심하라는 투로 주의를 주긴 했지만, 이날의 치욕은 전천을 포함해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구무림인들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전천은 여전히 요한이, 뇌단법이 미웠다.


'무공을 쉽게 만든다고? 그럼 내가 수십 년간 노력해서 만든 무공은 뭔데?


요한, 너도 우리 덕에 무공이란 걸 배운 거잖냐.


그런데 보답은 못 할망정, 우리의 밥그릇을 빼앗으려 들어?


네가 뭔데 우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거냐···!'


요한이 신무림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영 달갑지 않았다.


전천을 포함해서 신무림의 뇌단법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적잖이 있었다. 물론 그들도 겉으로는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요한에 대한 열등감은 느끼고 있었다.


'우리 등쌀에 밀려서 도망친 놈이 우리 무림보다 더 거대한 무림을 만들었다고?'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내륙에서는 제주도 무림을 구무림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오래되고 도태된 무림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신무림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전천은 언젠가 구무림의 맹주가 되어 신무림을 뒤엎기로 마음먹었다.


신무림인들에게 자신들의 저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구무림 무공의 힘을, 수백 년 전 대륙 무림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륙 무공들의 위대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전천은 급진파로서 사람을 모으고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보았다.


그 결과 먼 훗날 그는 이 죽고 죽이는 전장에 서게 되었다. 지금 그와 대치하는 저 소년··· 아니, 청년은 그의 적.


그날의 이천과 똑 닮은 청년.


신무림인 주제에 건방지게도 무림맹주인 철존과 독대하여 그에게 비무를 신청하고, 5분 뒤에 죽는다느니 뇌까리며 철존에게 굴욕을 안긴 자.


철존이 좀 더 유해지기를 바라는 무림인들이 많았지만, 천만에, 전천은 철존이 오히려 지금보다 선을 넘기를 바랐다.


관아를 뒤엎을 준비는 진작 되었지만, 그래도 철존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철존은 폭정을 하는 와중에도 신무림으로 쳐들어간다는 선만은 절대로 넘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전전대 지존이 노요한에게 굽신거리며 받아들였던 신·구무림 불가침 조약을 철존은 정말 끔찍이도 잘 지켰다.


'전대 지존이 싫다고 그를 때려죽이고 본인이 지존의 좌에 올랐으면서! 전대의 유산은 고분고분 인정하겠다는 거냐!'


게다가 그는 신무림에서 찾아온 내방자 이월에게 감화되어 순해지기까지 했으니, 신무림에 대한, 노요한에 대한 앙갚음은 더욱 머나먼 나라의 일이 되었다.


'철존이여, 내륙 무림인의 말에 홀랑 넘어가다니, 반도 무림의 발상지인 제주도의 무림맹주로서 자존심마저 잃은 것이냐!'


전천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


"내륙의 오랑캐들아."


전천이 두 팔을 휘적였다.


"우리에게서 태어난 무공을 쓰는 주제에, 감히 부모의 위상을 넘보려 들지 마라!"


그는 온몸에서 푸른 불을 뿜어 붉은 불을 다시 뒤덮으려 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기세였지만, 나는 그가 느끼는 공포를 읽었다.


그는 눈앞의 불을 끄는 데에만 집착했지만, 나는 더 넓은 곳을···


이곳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보았다.


나는 입속말로 바람을 불러들였다.


"천상천하··· 만휘군상··· 삼라만상··· 모든 바람이여 휘날려라."


전장의 바람이 일제히 사라지고 모든 인간의 머리칼, 옷자락, 깃발 따위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바람은 단 한곳으로 모였으니, 바로 진천이 발을 딛고 있던 장소였다.


"6식 진眞·비람."


회오리가 일어나 단숨에 전천을 휩싸고, 그를 불꽃과 함께 통째로 공중에 띄웠다.


전천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회오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온몸에서 불을 뿜어댔지만, 바람은 바람. 불로 바람을 쫓아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회오리 속에서 나를 노려보며,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추잡한 욕지거리들을 내뱉었다.


나는 잠자코 있다가 그에게 물었다.


"병부상서여, 두려운가?"


이곳은 전쟁터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미안하지만 네 사정을 물을 생각은 없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나는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세웠다.


"범람."


생사결을 끝내는 최후의 언령言令.


회오리를 이루는 바람 한 줄기 한 줄기가 모조리 바람의 칼날로 화하여 전천의 온몸을 범했다.


전천은 두 눈을 까뒤집고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멀리 날아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그가 일으킨 전쟁의 사상자들처럼, 피로 흙바닥을 젖게 만들며 절명했다.


그의 주검을 향해 나는 읊조렸다.


"자식은 언젠가 부모를 뛰어넘고 독립해야 한다. 그것 하나는 확실하니까."


반군의 우두머리인 전천, 그가 죽으니 반군 병력 전원이 경악에 빠졌다.


그들은 저들끼리 돌아보며 쑥덕거렸고 싸움을 주저했다. 몇몇 투지가 남은 자들도 있는 듯했지만, 그들은 모두 전천을 죽인 내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기세를 타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전쟁을 멈추고 해산해라! 그리하지 않으면 나 이월과 검을 맞대어야 할 것이다!"


내 말에 반군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전쟁을 포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개죽음당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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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동맹 23.08.31 39 1 13쪽
84 천수살법 이천 3 23.08.30 44 1 18쪽
83 천수살법 이천 2 23.08.29 44 3 16쪽
82 천수살법 이천 1 +2 23.08.28 47 3 15쪽
81 이가살수문 2 +1 23.08.25 46 1 12쪽
80 이가살수문 1 23.08.24 45 2 13쪽
79 재정비, 그리고 신무림으로 23.08.23 56 2 16쪽
» 당산봉 전투 4 23.08.22 46 1 12쪽
77 당산봉 전투 3 +2 23.08.21 59 2 14쪽
76 당산봉 전투 2 23.08.18 49 2 15쪽
75 당산봉 전투 1 23.08.17 53 1 15쪽
74 항쟁의 두 번째 여명 23.08.16 54 3 13쪽
73 뇌단법과 호걸들 7 - 무존 강하나 2 +1 23.08.15 58 3 11쪽
72 뇌단법과 호걸들 6 - 무존 강하나 1 23.08.14 56 3 13쪽
71 뇌단법과 호걸들 5 - 천공광 소유 23.08.11 85 3 13쪽
70 뇌단법과 호걸들 4 - 산명조 단호 23.08.10 57 1 12쪽
69 뇌단법과 호걸들 3 - 불괴신 옥근 23.08.09 62 3 12쪽
68 뇌단법과 호걸들 2 23.08.08 67 2 14쪽
67 뇌단법과 호걸들 1 +2 23.08.07 63 4 12쪽
66 노요한과 사람들 3 +1 23.08.04 68 4 12쪽
65 노요한과 사람들 2 +1 23.08.03 73 5 12쪽
64 노요한과 사람들 1 +2 23.08.02 67 4 12쪽
63 무존과 세존 3 23.08.01 73 4 11쪽
62 무존과 세존 2 +2 23.07.31 61 3 13쪽
61 무존과 세존 1 23.07.28 64 4 12쪽
60 교환 +1 23.07.27 74 2 14쪽
59 광변발도공 영힐 2 23.07.26 60 3 11쪽
58 광변발도공 영힐 1 23.07.25 64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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