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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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정훈한
작품등록일 :
2023.06.02 10:11
최근연재일 :
2024.01.03 18:00
연재수 :
1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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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494

작성
23.12.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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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12. 운동장 Ⅱ

DUMMY

#112. 운동장 Ⅱ


운동장에서의 사건이 있고 난 다음 날. 고통스러웠던 지난 며칠들과 달리 모발과 소변 등 이상한 것들만 채취한 무난한 날을 보낼 수 있었다. 채취도 빨리 끝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거기다 체력 유지 시간 전에 전임님이 찾아왔는데, 전임님 말에 의하면 아마 유진이는 며칠 내로 본인이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날도 있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비교적 무난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감사하며 기다리자, 평소처럼 직원 하나가 안대를 들고 나타났다. 아마도 운동장으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운동장이 완전히 닫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도착한 붉은 철문 앞에서 평소와 달리 직원은 아무것도 내게 건네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오늘 하루는 건너뛰는 모양이었다. 대신에 직원은 나에게 “절대 문제 일으키지 마라.”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이제는 마치 천국과도 같이 느껴지는 운동장이 보였다. 운동장에는, 밤새 눈이 내렸는지 곳곳에 하얀 눈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전손을 넣고, 제일 먼저 민수 아저씨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어제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밤새 아저씨가 걱정됐다. 힘없이 축 늘어지던 모습과, 간신히 눈만 움직이던 그의 모습에, 혹시라도 뭐가 잘못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불현듯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해밀아!”


“아저씨!”


다행히 아저씨는 어제 우리가 메시지를 남겼던 곳에서 멀쩡히 손을 흔들며 서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런 아저씨를 향해 뛰어갔다.


“괜찮으세요?”


“어엄,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아저씨는 과장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가 어제 메시지를 남긴 벽을 가리켰다.


“자자, 그보다 이것 봐라. 아마도 유진이가 답변을 한 것 같구나.”


“정말요?!”


안 그래도 전임님에게 들은 유진이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마침 유진이가 어제 나와 아저씨가 벽에 새긴 메시지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음··· ‘다행이다.’라고 적혀있네요.”


“암 다행이지. 어찌 됐든 여기 다 살아있지 않냐.”


아저씨가 팔짱을 끼더니 웃어 보였다.


“아 참. 여기 오기 전에 말씀드린 전임님을 만났어요. 아마도 유진이를 빠른 시일 내에 직접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것도 참 다행이구나. 직접 보지는 못하겠지만, 소식이라도 전해 들을 수 있는 게 어디냐.”


“그렇죠? 그래도 보고 싶은데. 조금 아쉬워요.”


“언젠가 그럴 날도 있겠지, 우선은 메시지나 남겨보자꾸나.”


아저씨는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내게 건네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다행이다.’라는 글자 밑에 투박하게 ‘보고 싶어.’라고 새기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쿵]


‘보고 싶어.’의 ‘보고’ 글자가 거의 끝나갈 때쯤,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자연스레 나와 아저씨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고, 거기엔 어제 봤던 그 새로운 청년이 서있었다.


“역시···”


내가 글을 세기던 것을 멈추고 그 청년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아저씨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 청년이 걱정이라도 되는 게냐?”


“아니요. 그것보다··· 저 청년은 보균자가 아닌 것 같아요.”


“뭐?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거냐 해밀아.”


나는 뒤돌아 세기던 글자 작업을 이어가며 아저씨에게 나의 또 다른 이상한 능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게 아무래도 바이러스 균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붉은색으로 빛나는 먼지같이 생겼는데··· 아저씨도, 저에게도, 그리고 여기 있는 주황색 옷을 입은 모두가 그 붉은 균들을 몸 안에 품고 있거든요.”


“··· 그게 정말이냐?”


아저씨는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네. 정말이에요. 저도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 청년은 그런 균들이 몸에 없어요. 마치 일반 시민처럼 말이에요. 수석, 직원, 그리고 전임님 모두가 몸속에 균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저 청년처럼요.”


“그럼 네 말은··· 네가 붉은색으로 빛나는 균들을 볼 수가 있는데, 저 청년에게선 그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 청년은 일반 시민일 것이다··· 이 말인 게냐?”


“맞아요. 어제 처음 봤을 때부터 무슨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균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아저씨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너를 못 믿는 건 아니다만, 그것 참 이상하구나··· 일반 시민이 집중 검사소에 끌려올 수 있다는 게 가능한 건지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일반 시민을 치안대에서 잡아올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건··· 저도 이상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저 청년의 몸속에선 어떠한 붉은 것도 보이지 않아요.”


“흠, 저 청년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알게 되겠지.”


아저씨는 멀리서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청년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던 불량배들은 지급받은 물건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어제의 일 때문인지 몰라도 청년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아저씨 어때요? ‘보고 싶어.’라고 보이죠?”


“그래, 아주 잘 보이는구나.”


‘보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세긴 나는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투박하고 거칠게 적혀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엔 문제가 없었다.


“저 청년과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 너도 같이 갈 테냐 해밀아?”


뿌듯해하는 나에게 아저씨는 청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청년은 이제 혼자서 운동장 구석에 앉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희가 가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감염되면···”


“허허 그것 참 재밌는 얘기구나.”


“재밌다니요···? 잘못하면 저 청년을 죽일 수도···”


“네가 균을 볼 수 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멀찌감치 떨어지면 될 거 아니냐.”


아저씨는 걱정 말라는 듯 내 어깨를 쳐주더니 먼저 청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저씨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아저씨의 몸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붉은빛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를 따라 걸었다. 확실히, 안정된 모습의 아저씨처럼 몸속 안의 균들도 어제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지는 않고 있었다.


‘그래, 전임님 말처럼 이 능력을 어떻게든 써먹으려면, 좀 더 면밀히 봐야 해.’


나는 아저씨뿐만 아니라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며 그들 몸속의 균들을 살펴보았다. 덩치가 작은 사람인데도 균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덩치가 비교적 큰데도 균이 없는 사람 등, 어떠한 기준 없이 천차만별로 몸속에 균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콜록, 콜록, 으··· 죽겠네.”


“괜찮아? 어제 맞은 마비약 같은 것 때문인가?”


“모르겠어··· 몸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어느새 우리는 불량배 무리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그의 입을 통해 붉은빛이 빠져나왔다. 몸이 병약해져서 인지 몰라도 그런 그의 몸속에는 붉은빛이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뭘 봐?”


“아, 아니에요.”


내가 그들을 유심하게 보자 무리 중 하나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의 몸속에서 붉은빛이 조금씩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파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네. 신경 쓰지 말게.”


“칫.”


아저씨가 앞에서 그런 무리를 노려보며 말하자, 불량배들은 그제야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의 몸속에 있는 붉은빛들도 방금 전 불량배처럼 서서히 파도가 일어나다 잔잔해졌다.


“저 녀석들한테도 보이는 게냐? 그 균이라는 게?”


불량배 무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아저씨가 뒤돌아보며 조용히 내게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저씨는 “흠···” 소리를 내며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저 청년에겐 아직도 안 보이고?”


“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청년은 눈이 묻지 않은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짙은 눈썹에 여기저기 멍이 든 얼굴이 그가 어제 얼마나 힘든 순간을 보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슬슬 얘기를 시작해 볼까.”


아저씨는 옅게 미소를 띠더니 그런 청년을 향해 다가갔다. 나도 그런 아저씨 뒤를 조심스레 따라 걸었다.


“흠흠, 어제 새로 온 청년 맞지요?”


아저씨가 다소 어색한 말투로 묻자,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청년의 시야가 그런 아저씨로 향했다.


“맞아요. 근데 그게 왜 궁금하죠?”


잔뜩 주눅 들어있거나 의기소침할 것 같던 예상과는 달리 청년은 어딘가 날이 서있는 모습을 보였다.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런 청년에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아, 그냥 새로왔으니 얘기나 해보려 했지요. 이곳에서 유일하게 누군가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밖에 없으니까.”


“아~ 그렇군요. 전 혹시 어제일로 감사인사를 받으러 왔나 했죠.”


“그런 소리 듣자고 한일 아니니 감사는 됐습니다.”


아저씨의 계속되는 노력에도 청년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의 옆에 서서 그런 청년을 바라보다가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잠깐이지만 청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친구는 당신의 아들입니까?”


청년이 나를 가리키며 묻자, 아저씨는 “허허.”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치고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나요? 동네 삼촌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해밀이라고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에서 만나게 된 근무지 동료입니다.”


“아··· ‘해밀’”


청년은 내 이름을 말하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아저씨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감사는 드려야죠.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하하,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한건 아닌데.... 뭐, 잘 지내봅시다. 제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 아 참, 해밀이 너도 일로 와서 인사해라. 앞으로 계속 볼 텐데.”


아저씨는 한 걸음 물러서있던 내 팔을 잡아끌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어딘가 꺼림칙했지만, 이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해밀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청년이 마주 잡은 손에서 순간 강한 힘이 느껴졌다. 순간 내가 “윽” 소리를 내자,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니 해밀아?”


아저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청년은 슬그머니 손을 빼며 나에게 말했다.


“저도 반가워요. 저는 ‘성우’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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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0. 회의 : 에필로그 24.01.03 28 1 10쪽
129 #129. 지옥 Ⅱ 24.01.02 22 1 18쪽
128 #128. 지옥 Ⅰ 23.12.29 17 1 12쪽
127 #127. 터널 Ⅱ 23.12.28 24 1 12쪽
126 #126. 터널 Ⅰ 23.12.27 21 1 12쪽
125 #125. 시험대 Ⅱ 23.12.26 20 1 12쪽
124 #124. 시험대 Ⅰ 23.12.22 20 1 12쪽
123 #123. 낯익은 기억 Ⅲ 23.12.21 19 1 12쪽
122 #122. 낯익은 기억 Ⅱ 23.12.20 18 1 12쪽
121 #121. 낯익은 기억 Ⅰ 23.12.19 16 1 12쪽
120 #120. 마지막 탈출로 Ⅲ 23.12.15 20 1 12쪽
119 #119. 마지막 탈출로 Ⅱ 23.12.14 17 1 12쪽
118 #118. 마지막 탈출로 Ⅰ 23.12.13 15 1 13쪽
117 #117. 돌멩이 23.12.12 20 1 12쪽
116 #116. 계획 Ⅲ 23.12.08 25 1 12쪽
115 #115. 계획 Ⅱ 23.12.07 18 1 12쪽
114 #114. 계획 Ⅰ 23.12.06 19 1 12쪽
113 #113. 운동장 Ⅲ 23.12.05 20 1 12쪽
» #112. 운동장 Ⅱ 23.12.01 23 1 12쪽
111 #111. 운동장 Ⅰ 23.11.30 20 1 12쪽
110 #110. 푸른 가운 Ⅲ 23.11.29 19 1 12쪽
109 #109. 푸른 가운 Ⅱ 23.11.28 17 1 12쪽
108 #108. 푸른 가운 Ⅰ 23.11.24 18 1 12쪽
107 #107. 재회 Ⅲ 23.11.23 16 1 12쪽
106 #106. 재회 Ⅱ 23.11.22 18 1 12쪽
105 #105. 재회 Ⅰ 23.11.21 17 1 12쪽
104 #104. 낯선 실험실 Ⅲ 23.11.17 20 1 12쪽
103 #103. 낯선 실험실 Ⅱ 23.11.16 17 1 12쪽
102 #102. 낯선 실험실 Ⅰ 23.11.15 2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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