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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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정훈한
작품등록일 :
2023.06.02 10:11
최근연재일 :
2024.01.03 18:00
연재수 :
1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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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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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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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푸른 가운 Ⅲ

DUMMY

#110. 푸른 가운 Ⅲ


주황색. 내가 받은 옷의 색깔이었다. 물세례를 받고 소독제인지 뭔지 이상한 가루까지 뒤집어쓴 나에게, 푸른 가운을 입은 사람이 건네준 옷이었다.


“어서 입어라, 꾸물거리지 말고.”


나는 옷을 건네준 그를 살짝 노려본 뒤, 마지못해 옷을 주섬주섬 껴 입었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재질인지 살갗에 닿는 느낌이 불쾌한 옷이었다.


“다시 안대 착용해.”


그리고 나는 그에게 다시 안대를 건네받았다. 여기선 이동할 때마다 이렇게 안대를 착용시키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할 속셈이겠지 싶었지만, 애초에 그런 게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내부의 분위기는 엄청나게 폐쇄적이고, 경직돼 있다는 걸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나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끼이익]


수 분 동안 간수 아닌 간수가 건네주는 줄을 잡고 걸어 도착한 곳에는 검은 철문이 양 옆으로 나 있는 복도였다. 내가 좌우를 살피며 두리번거리자 이 푸른 옷의 간수는 내 앞에 활짝 열린 철문 뒤의 초라한 방으로 나를 떠밀었다.


“으윽···”


방 안에 떠밀리듯 들어오자 이상한 악취가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이곳에 방금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습관적으로 마스크를 올려 쓰려 손을 턱과 귀 주변으로 가져가는데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간수로 보이는 그는 내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 아닙니다.”


나는 괜스레 얼굴을 긁적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고, 작디작은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가 수석님이 오실 테니 그때까지 얌전히 대기해.”


‘수석? 연구원을 말하는 건가?’


아마도 그 수석이라는 작자가 이곳의 책임자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나는 별다른 대꾸 하지 않은 채 벽에 기대었고,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한 간수는 문을 닫고 방을 빠져나갔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건가··· 도소매지구 가축 시장도 이것 보단 클 것 같은데.’


암담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 쌓인, 차나리 감옥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조그마한 방에는 악취의 근원 중 하나로 보이는 조그마한 변기와, 그 위에서 빛을 안으로 들이고 있는 작은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벽에 계속 기대어 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민상혁’은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됐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는, 보균자와 같은 처지로 취급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최악이었다. 자유 따위는 하나도 누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끼이익]


그렇게 방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벽에 기대기도 하면서 하루아침에 뒤바뀐 현실을 받아들여가고 있을 때, 검은색 철문이 다시 열리며 이번엔 흰색가운과 흰머리가 가득한 중년의 남성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기분 나쁜 미소를 마스크 속으로 옅게 짓고 있었는데 상당히 보기가 불쾌했다.


“새 집은 마음에 드는가 ‘본31’?”


“···’본31’이 제 이름인가 보군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이제부턴 ‘본31’이 내 이름인 듯했다. 나의 말에, 아마도 수석으로 추정되는 양반은 기분 나쁜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네. ‘피시험체’들은 각각의 고유 코드들을 가지고 있지. 자네는 코드가 ‘본31’인거고.”


이런 상황이 재밌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우선은 아무 대꾸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 생활은 앞으로 우리 직원들이 안내해줄 거라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수석님이라 부르게.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직원들한테 물어보고.”


“그러죠.”


“보균자치고 굉장히 억세구먼? 허허.”


수석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등 뒤에 있는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문서를 몇 장 그에게 건네주었다.


“흠··· 특이하네. 치안대 본부에서 데려왔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관리번호 빼고 아무런 정보가 없구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내 프로필인 듯했다. 아마도 치안대에서 보균자들 개인정보를 관리하고 있으니, 진압 중 실수로 죽은 보균자나 탈주자들의 관리번호를 찾아 내게 붙인 것 같았다.


“이 녀석은 신체검사 먼저 진행하도록 하게. 아무 데이터가 없으니까 어디다 써먹을지 모르겠어. 그다음에 어디로 배치할지 확정 짓자고. 우선은 여기 2급 일반실에 있어도 크게 문제없겠어.”


“알겠습니다 수석님.”


수석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빠져나갔고, 뒤이어 바로 건장한 체격의 직원들이 들어와 내게 안대를 씌우고는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신체검사를 하러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으아아악!!”


“그만!!!”


수 분 정도 걷다 보니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들려오는 그 비명소리는 잘 걷고 있던 나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계속 이동해!”


끌려가듯 이동하는 방향에 한 걸음 한 걸음 더 내딛을수록 공포스러운, 그리고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들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 미친놈들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집중검사소가 베일에 싸인, 굉장히 비밀스러운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명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곳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안대를 벗어.”


직원의 말에 안대를 벗자, 내가 치안대에 처음 들어갈 때 검사를 받던 곳과 비슷한 모습의 신체검사 도구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키부터 몸무게, 시력, 청력, 혈액 검사까지 모두 받아야 했는데, 치안대에서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확인하고 기록하는 듯했다.


그렇게 검사를 마친 뒤, 나는 다시 안대를 쓰고 직원들에게 끌려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에는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순간 혹시 죽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점심이다.”


나를 방에 넣고 바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무표정한 얼굴의 직원 하나가 쇠그릇을 하나 내게 건네주었다. 미지근한, 그리고 오묘한 냄새의 수프였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것처럼 생긴 수프에는 감자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건더기들이 조금 있었는데,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런 수프마저 맛있게 느껴졌다.


거지 같은 점심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그러다 문득 아까의 비명소리가 떠올랐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이곳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게 많이 없었다. 그냥 증상발현을 했거나 할 가능성이 다분한, 위험한 보균자들을 수용하는 장소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검사라는 말은 그저 핑계이고, 그저 보균자들을 교도소처럼 가둬두는 장소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는 몰랐지만, 만약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라면, 시간이 없었다. 아까 그 비명소리를 지른 보균자들처럼 고통받다가 지쳐서 해밀 그 새끼는 보기도 전에 내가 죽거나, 반대로 해밀 새끼가 먼저 죽어버릴 수 도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라는 자신을 세상에서 없애면서 까지 이곳에 들어왔는데, 내가 그런 개죽음을 당하거나 녀석이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녀석은 꼭 데려가야만 했다.


한참 마음이 초조하며 다급해지고 있을 때,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직원 두 명이 들어오며 “체력 유지 시간이다.”라고 말하며 내게 다시 안대를 건넸다. 나는 속으로 ‘이럴 거면 그냥 안대를 하나 주지.’라고 생각하면서 안대를 받아 든 뒤, 다시 그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안대 벗어.”


계단을 오르내리고 몇 번을 돌고 돌아 도착한 내가 안대를 벗자 이번에는 붉은 철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은 안대를 벗은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문 바로 옆 스피커폰 같은 것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특식이다. 뺏기진 말고.”


직원은 ‘뺏기지 말라.’는 이해 못 할 소리를 하며 내 손에 따끈따끈한 감자를 하나 건네주었다. 어느새 붉은 철문은 완전히 개방됐고, 그 문을 통해서 찬 바람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이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 발자국 문 밖으로 나섰고, 그러자 회색 콘크리트의 거대한 벽들에 둘러 쌓인 조그마한 운동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운동장에는 나처럼 주황색 옷을 입은 보균자들이 여기저기 그룹을 지어 모여있었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둔탁하게 닫히는 소리가 순식간에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보균자들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집중된 이목에 순간 압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녀석들이 보균자들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그런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대충 적당한 자리를 잡아 운동이나 할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느샌가 내게 꽤나 가까워져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순간 내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 확인했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녀석들은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요즘은 새로오는 것들이 많구만.”


딱 봐도 무리의 대장행세를 하는 듯한, 어딘가 모르게 일그러진 인상의 남자가 반쯤 먹은 고구마 하나를 손에 들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뭐야 당신은.”


딱 봐도 적대적인 태도로 나를 대하는 그와, 그의 뒤에서 실실 웃고 있는 녀석들에게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대장 놈은 자신의 손에 들린 고구마를 가리키며 답했다.


“내가 요즘 입맛이 없어서 그런데, 네 특식을 내게 줬으면 해서 말이야.”


“싫다면 어쩔 건데.”


내가 손에 든 특식을 한 입 베어 물며 녀석을 노려보자, 뒤에서 웃고 있던 졸개들이 눈치를 봐가며 천천히 나를 둘러싸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대장행세를 하던 보균자 새끼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내 앞에 침을 뱉었다.


“퉤! 재수 없는 게 꼭 그 덩치새끼랑 똑같네. 뭐 해 다들, 이 새끼에게 여기 질서가 뭔지 가르쳐주자고.”


“오케이!”


대장 보균자가 손을 풀며 내게 한 걸음씩 다가오자, 이런 짓이 처음이 아닌 듯 나머지 녀석들도 서서히 내게로 거리를 좁혀왔다. 순간 고구마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인가 싶었다.


[퍽]


뒤에서 누군가가 내 등을 강하게 후려친 듯했다. 찌릿한 고통이 몸의 중앙에서 위아래로 퍼졌고, 곧이어 또 다른 누군가의 발차기가 내 무릎 뒤를 강타해 나는 순식간에 땅으로 고꾸라졌다.


[퍽 퍽 퍽]


그다음부터는 일방적이었다. 온갖 욕설과 함께 여기저기서 발길질이 시작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그 발길질을 견뎌내는 것뿐이었다.


“씨X···”


하루아침에 이런 꼴이 됐다는 사실에 욕이 저절로 나왔다. 보균자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욕을 하며 내게 발길질을 해댔다.


“당신들 그만하지 못해?!”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발길질은 누군가가 소리치자 그제야 멈추었다. 나는 멍든 몸과 얼굴을 간신히 돌리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은 건지 뭔지 몰라도 그곳엔 거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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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0. 회의 : 에필로그 24.01.03 27 1 10쪽
129 #129. 지옥 Ⅱ 24.01.02 22 1 18쪽
128 #128. 지옥 Ⅰ 23.12.29 17 1 12쪽
127 #127. 터널 Ⅱ 23.12.28 24 1 12쪽
126 #126. 터널 Ⅰ 23.12.27 21 1 12쪽
125 #125. 시험대 Ⅱ 23.12.26 20 1 12쪽
124 #124. 시험대 Ⅰ 23.12.22 20 1 12쪽
123 #123. 낯익은 기억 Ⅲ 23.12.21 19 1 12쪽
122 #122. 낯익은 기억 Ⅱ 23.12.20 18 1 12쪽
121 #121. 낯익은 기억 Ⅰ 23.12.19 16 1 12쪽
120 #120. 마지막 탈출로 Ⅲ 23.12.15 19 1 12쪽
119 #119. 마지막 탈출로 Ⅱ 23.12.14 17 1 12쪽
118 #118. 마지막 탈출로 Ⅰ 23.12.13 15 1 13쪽
117 #117. 돌멩이 23.12.12 19 1 12쪽
116 #116. 계획 Ⅲ 23.12.08 25 1 12쪽
115 #115. 계획 Ⅱ 23.12.07 17 1 12쪽
114 #114. 계획 Ⅰ 23.12.06 19 1 12쪽
113 #113. 운동장 Ⅲ 23.12.05 19 1 12쪽
112 #112. 운동장 Ⅱ 23.12.01 22 1 12쪽
111 #111. 운동장 Ⅰ 23.11.30 20 1 12쪽
» #110. 푸른 가운 Ⅲ 23.11.29 19 1 12쪽
109 #109. 푸른 가운 Ⅱ 23.11.28 16 1 12쪽
108 #108. 푸른 가운 Ⅰ 23.11.24 18 1 12쪽
107 #107. 재회 Ⅲ 23.11.23 16 1 12쪽
106 #106. 재회 Ⅱ 23.11.22 18 1 12쪽
105 #105. 재회 Ⅰ 23.11.21 17 1 12쪽
104 #104. 낯선 실험실 Ⅲ 23.11.17 20 1 12쪽
103 #103. 낯선 실험실 Ⅱ 23.11.16 16 1 12쪽
102 #102. 낯선 실험실 Ⅰ 23.11.15 2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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