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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정훈한
작품등록일 :
2023.06.02 10:11
최근연재일 :
2024.01.03 18:00
연재수 :
1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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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36
글자수 :
659,494

작성
23.12.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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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22. 낯익은 기억 Ⅱ

DUMMY

#122. 낯익은 기억 Ⅱ


“움직이지 마!”


1번 직원은 경계심 가득한 눈과 함께 해부용 가위를 손에 든 채로 서 있었다. 나는 꼼짝달싹 못하는 기하를 힐끗 바라본 뒤 그런 직원에게 말했다.


“이봐요, 아무래도 그때 내가 1번 직원이냐고 물어봤던 그 사람 같은데 맞죠? 저희는 그냥 탈출만 하려는 거예요. 누구도 해칠 의도가···”


“그 입 다물어! 당신들 때문에 지금 여기가 얼마나 개판이 된 줄 알아?! 피시험체들이 전부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직원들 전부가 녀석들과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고!”


직원은 해부용 가위를 앞으로 찌르듯이 내밀며 나를 위협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구매하려는 물품이 마치 마취제를 만들려는 것 같아 보여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일까지 계획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그는 우리의 계획을 일찌감치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옆에 놓인 책상에는 기하와 내가 그동안 작성한 계획과 복원한 지도, 조직도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양손을 든 채 내게 아무런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런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다가오지 마! 바로 찔러버릴 테니까!”


“진정해요. 나에겐 아무런 무기도 없어요! 마취제도 모두 사용했고요. 전 그저 저기 묶여있는 한기하 전임만 데리고 가면 돼요. 당신을 해칠 의도는 없어요! 기하도 마찬가지고요.”


나와 직원은 내가 들어온 출입문 앞을 천천히 돌며 서로를 경계했다. 잠긴 출입문은 직원이 가로막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그 문을 열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달려가 묶여있는 기하를 풀어주고 이 사람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하는 밧줄과 테이프로 단단히 묶여있어 보여서 내가 달려가서 그걸 풀려고 한다고 한들, 직원이 그전에 내 등에 가위를 꽂아 넣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직원에게는 마취제를 다 사용했다고 했지만, 주머니에는 아직 마취제가 하나 남아있었고 최악의 경우엔 내가 이 직원과 싸우면서 어떻게든 그 마취제를 투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우리와 같이 탈출해요. 통제과장님도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통제과장이? 그 사람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1번 직원은 통제과장이라는 말에 격하게 반응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설득한 건가? 같이 탈출하자고?”


“맞아요. 어차피 그 사람도 갇혀있는 신세였잖아요 당신처럼. 그러니까 당신도 우리와 같이 탈출해요! 아직 시간이 있어요.”


나의 말에 직원은 동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손에 든 가위가 조금씩 그의 눈동자와 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 통제과장은 어디 있지? 그자가 탈출을 돕고 있나?”


“그건···”


“사실대로 말해!! 나에겐 중요한 일이니까!”


직원은 거의 울부짖듯 내게 소리쳤다. 나는 순간 거짓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진실을 말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직원은 통제과장이 우릴 따리 다닐 리가 없다고 거의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분은 저희를 따라 이동하다 갑자기 저희를 공격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어쩔 수 없이···”


“죽였나?”


“네?”


“죽였냐고···”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수갑이 풀리자마자 저희를 공격해서···”


나의 말에 직원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멈추는 것이 보였다. 그는 또렷이 나를 응시하며 마치 과거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듯 힘겹게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내게 ‘1번’이냐고 물었지? 맞아. 난 ‘1번’ 직원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직원들 중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생기지 않아? 이 미친 검사소가 자리 잡은 지 수십 년이 넘었는데, 내가 처음부터 1번이었을까? 여태 있던 1 번들은 어디로 갔을까?”


1번의 호흡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들추는 것이 괴로운 듯 눈가를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오는 직원들은 전부 부랑자 출신이야. 길바닥에서 쓰레기나 주워 먹던, 보균자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었지. 몇몇은 실형을 살기도 한 범죄자이고 말이지. 나도 그런 녀석들처럼 이곳에 끌려왔어. 그리고 이곳에 온 첫날 박수석은 내게 얘기했어, 1번이 돼서 일정 기간 의무를 성실히 마치면, 그동안의 보상과 함께 사회로 다시 나가게 될 거라고. 그때부터 내 목표는 단 하나 ‘1번’이 되는 것이었어.”


1번은 자신이 들고 있는 가위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눈가는 불게 충혈되어 있었다.


“11, 10, 9, 8··· 그리고 마침내 1번이 되기까지 수많은 선배들이 보상과 함께 사회로 떠나는 것을 보았지. 적어도 난 그렇게 믿었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의문이 들더라고. 항상 직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박석환 수석이 어째서 통제과장은 늘 혼자서 만나는지, 그리고 어째서 2번 직원에게만 용도를 알 수 없는 열쇠를 가지고 있게 했는지 말이야. 우리는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열쇠를 말이야. 우린 그걸 ‘황금열쇠’라고 불렀어. 그걸 한 번이라도 만졌던 직원은 고참이라는 인증 아닌 인증이었으니까.”


‘황금열쇠··· 황금색은 아니었지만 설마···’ 직원의 말에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들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그런 나의 의심을 더 증폭시킨 건, 박수석이 우리에게 일러준 제한 구역 때문이야. 소장실, 집무실과 동급으로 통제실에 직원들의 단독 접근을 제한했지. 그 근처의 붉은 선만 넘어가도 우리는 징계 대상이었어. 그것에 대해 다른 직원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겼지만··· 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항상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었어···”


그는 숨을 크게 고르더니 조금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까의 적대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딘가 간절한 어투로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통제과장이라는 사람. 혹시 별자리가 새겨진 가방 같은 걸 가지고 있었나?”


“맞아요··· 때가 묻긴 했지만 아끼는 가방 같아 보였어요. 그걸 어떻게···”


나의 말에 1번 직원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충혈된 그의 눈에서 마치 그간의 모든 슬픔이 확신이 되어 흘러내리듯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석호 선배··· 석호 선배가··· 그럼 전부 다 그렇게 된 거야? 전부 다?”


그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는지 아예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마지막 남은 마취제를 잡았다. 이대로 지금 틈을 보인 직원의 목덜미에 주사를 꽂아 넣으면, 그러면 기하를 구해서 바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젠장··· 뭐 하는 거야 이태리!’


속으로 정신을 차리라며 외치고 입술을 꽉 깨무는데 1번 직원이 흐느끼며 말했다.


“이석호, 유태환, 김주영, 우형환, 선호영···”


그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읊어대며 흐느꼈다. 아마도 그전의 1 번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더니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나를 바라보곤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내게 내밀었다. 나를 찌르려는 게 아니라, 마치 쓰라는 듯 거꾸로 돌려서 그렇게 나에게 가위를 내밀었다.


“이제 다 의미 없어. 여기서 나갈 방법은 애초에 없었던 거야··· 석호 선배는 밤하늘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내가 처음 왔을 때 반 병X이나 다름없던 나를 따뜻하게 지도해 주고··· 저녁 후엔 밤하늘을 같이 바라보며 자신이 가진 별무늬 가방을 지도 삼아 내게 하늘의 별자리에 대해 알려주던 사람이었는데··· 사회에 돌아간다고 그렇게 함박웃음을 지었던 사람이었는데···”


1번은 차오르는 슬픔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이 가위로 저 사람을 풀어줘. 그리고 탈출한다고 했지? 내가 도와줄게. 어차피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은 당신들이 벌인 이 방법 밖에 없을 테니까.”


“고마워요··· 그리고 유감이에요.”


나는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준 뒤, 가위를 받아 기하 쪽으로 달려갔다. 기하는 “으으으으”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묶여있는 의자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봐!’


나는 기하의 몸에 묶인 밧줄과 테이프를 직원이 준 가위로 잘라냈다. 입에 물린 재갈도 잘라내자 기하는 그제야 숨을 가쁘게 고르며 말했다.


“저 미친놈은 다 알고 있었어 태리야! 빨리 없애야 돼!”


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뛰어나갈 기세였다. 나는 그런 기하를 막아서서 그의 어깨를 잡고 1번 직원과 나 사이에 무슨 대화 있었는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기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직원들이 1번이 되고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밖으로 돈과 함께 보내준다고 박수석이 약속을 하는데, 그게 다 거짓이고 오히려 네가 말한 통제과장으로 만들어서 계속해서 가둬둔다 이 말이야?”


“응, 그런 것 같아. 고문도 하고··· 심리적으로 세뇌 같은 것도 했겠지. 그 통제과장이라는 사람···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얘길 다 듣고 보니 죄책감이 드네.”


내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자 기하가 그런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이태리. 어쩔 수 없었잖아? 누가 됐든 그 상황에 그렇게 했을 거야. 우선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하자. 알았지?”


“응···”


“앞으론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기하는 믿어보라는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실험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전임님!”


“해밀인가 보다.”


나와 기하는 출입문 쪽으로 달려갔다. 직원은 자신이 입고 있던 푸른 가운을 벗어던지곤 그런 나와 기하를 바라보다 자기 스스로 실험실 문을 열었다.


“어?”


문이 열리자 해밀이는 이 알 수 없는 조합에 적잖이 당황한듯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그를 뒤따라온 민수 씨와 성우 씨도 마찬가지였다.


“설명하자면 길어. 아무튼 이제부터 우리랑 같이 나갈 거야. 여기 직원이었으니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나의 말에 해밀이와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뒤따라 이어지는 기하의 요약된 설명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전임님. 근데 유진이가 여기 없어요··· 아무래도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봐야 할 것 같아요.”


“유진? ‘윌 1’을 말하는 건가?”


해밀이가 유진이에 대해 말하자 1번 직원은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 되묻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 ‘윌 1’ 아니··· 유진이라는 친구는 지하 특수실에 있을 거야. 박수석 지침으로 그곳으로 어제부터 이송 됐거든. 지침상 심신이 불안정한 피시험체들··· 사람들은 지하 특수실로 보내게 돼있어.”


“지하 특수실이라면···”


“통제과장이 가면 안 된다고···”


나와 해밀이가 혼잣말하듯 얘기를 꺼내자 1번 직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아마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을 거야. 거기는 폐기하기 직전에 잠시 사람들을 보관하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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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0. 회의 : 에필로그 24.01.03 27 1 10쪽
129 #129. 지옥 Ⅱ 24.01.02 22 1 18쪽
128 #128. 지옥 Ⅰ 23.12.29 17 1 12쪽
127 #127. 터널 Ⅱ 23.12.28 24 1 12쪽
126 #126. 터널 Ⅰ 23.12.27 21 1 12쪽
125 #125. 시험대 Ⅱ 23.12.26 20 1 12쪽
124 #124. 시험대 Ⅰ 23.12.22 20 1 12쪽
123 #123. 낯익은 기억 Ⅲ 23.12.21 19 1 12쪽
» #122. 낯익은 기억 Ⅱ 23.12.20 18 1 12쪽
121 #121. 낯익은 기억 Ⅰ 23.12.19 16 1 12쪽
120 #120. 마지막 탈출로 Ⅲ 23.12.15 19 1 12쪽
119 #119. 마지막 탈출로 Ⅱ 23.12.14 17 1 12쪽
118 #118. 마지막 탈출로 Ⅰ 23.12.13 15 1 13쪽
117 #117. 돌멩이 23.12.12 19 1 12쪽
116 #116. 계획 Ⅲ 23.12.08 25 1 12쪽
115 #115. 계획 Ⅱ 23.12.07 17 1 12쪽
114 #114. 계획 Ⅰ 23.12.06 19 1 12쪽
113 #113. 운동장 Ⅲ 23.12.05 19 1 12쪽
112 #112. 운동장 Ⅱ 23.12.01 21 1 12쪽
111 #111. 운동장 Ⅰ 23.11.30 20 1 12쪽
110 #110. 푸른 가운 Ⅲ 23.11.29 18 1 12쪽
109 #109. 푸른 가운 Ⅱ 23.11.28 16 1 12쪽
108 #108. 푸른 가운 Ⅰ 23.11.24 18 1 12쪽
107 #107. 재회 Ⅲ 23.11.23 16 1 12쪽
106 #106. 재회 Ⅱ 23.11.22 18 1 12쪽
105 #105. 재회 Ⅰ 23.11.21 17 1 12쪽
104 #104. 낯선 실험실 Ⅲ 23.11.17 20 1 12쪽
103 #103. 낯선 실험실 Ⅱ 23.11.16 16 1 12쪽
102 #102. 낯선 실험실 Ⅰ 23.11.15 2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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