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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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정훈한
작품등록일 :
2023.06.02 10:11
최근연재일 :
2024.01.03 18:00
연재수 :
130 회
조회수 :
5,139
추천수 :
136
글자수 :
659,494

작성
23.12.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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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13. 운동장 Ⅲ

DUMMY

#113. 운동장 Ⅲ


성우 씨와 인사를 나눈 뒤 일주일이 지났다. 성우 씨를 만나던 날처럼 운 좋게 모발이나 소변 정도만 채취하는 일은 그 이후론 없었다. 고통스러운 피부 채취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사기로 주입하는 등 끔찍한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회복능력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매일 새로이 나는 상처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민수아저씨와 성우 씨에게 물어보니, 둘도 피부채취를 하긴 하지만 매일 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간격이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아무래도 나에게 있는 회복 능력 때문에 나는 매일 채취를 당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나아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도 나로 인해 아저씨와 성우 씨가 매일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걸로 괜찮았다.


“해밀 씨 무슨 생각해요?”


“그냥, 이런 일이 언제 끝날까 싶어서요.”


“곧 끝날 거예요. 너무 걱정 마요.”


성우 씨는 옅게 미소를 보이며 내게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땐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이상해서 꺼림칙한 사람이었는데, 얘기를 몇 번 나누다 보니 그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나에게는 아직 그에 대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것이 있었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붉은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민수아저씨가 대놓고 보균자냐고 물었는데, 성우 씨는 예전에 준호 씨가 그랬던 것처럼 미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네요.”라고 하며 “당연하죠.”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믿어주었고, 내게는 아마 성우 씨가 특별한 케이스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 그럼 이제 해밀이는 슬슬 메시지를 새겨야지?”


“네, 안 그래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저도 도와줄까요 해밀 씨?”


“아니야~ 그건 해밀이 혼자 하게 둬. 성우는 나랑 계속 얘기나 하자.”


“네. 좋아요.”


성우 씨는 나를 도와주고 싶었는지 커다란 돌멩이를 들고 일어섰다. 그 크기가 글자를 새기기엔 지나치게 큰, 마치 손도끼처럼 생긴 돌멩이었다. 민수 아저씨는 내 눈치를 한 번 보더니 그런 성우 씨의 어깨를 잡고 그를 돌려세웠다.


“그러고 보니 제3 매립지에서 근무했다고 했지? 그런데 어떻게 한 번을 못 봤지.”


“하하. 그거야 사람이 조금 많은 것도 아니고 무지하게 많잖아요. 거기다 전 늘 쥐 죽은 듯이 숨어 지냈어요. 사람들하고 얘기도 잘 안 할뿐더러, 항상 머리를 길게 길러서 얼굴을 가리고 다녔죠.”


“오~ 그래? 그렇게 얘기하니까 머리가 길었던 사람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너였나보구나.”


“네 아마 맞을 거예요. 그래도 전 아저씨를 기억해요. 너무 덩치가 크셔서 거인 같았다고 항상 생각했거든요.”


“거인? 하하! 그건 내 군시절 별명인데. 다시 들으니 재밌구먼.”


성우 씨와 민수 아저씨는 웃음소리를 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민수 아저씨가 그를 한번 믿어보기로 마음을 먹은 뒤, 둘의 사이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나와 아저씨만큼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힘든 상황에서 만났으니 서로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어딘가 찝찝하긴 했지만, 그냥 기우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디 보자··· 이건가? ‘안 아파?’”


‘안 아파?’ 유진이가 내게 남겨놓은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애써 손으로 꾹 누르며 나는 ‘너는?’이라고 돌멩이로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름 노하우가 생겨서인지 처음 보다 글자를 새기는 것이 순조로웠다. 성우 씨와 아저씨가 돌멩이도 미리 몇 개 갈아 놓아서 굳이 찾으려 애를 쓰지 않아도 됐다.


“휴··· 그래도 손은 여전히 아프네.”


저린 손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가 웃으면서 흘러나온 조그마한 붉은빛 하나가 성우 씨의 목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 안돼!”


내가 멀쩡히 앉아있던 성우 씨를 밀쳤지만 이미 붉은빛은 성우 씨의 입 안으로 들어가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해밀 씨?


“무슨 일이냐 해밀아?”


성우 씨는 놀란 모습으로 나에게 물었고, 민수 아저씨는 나를 뒤에서 잡아끌으며 물었다.


“그, 그게···”


나는 순간 내가 본 것을 모두 말하려다, 아직은 무언가 찝찝한 느낌의 성우 씨를 바라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벌레 같은 게 달라붙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벌레?”


아저씨와 성우 씨는 나의 이야기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둘이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해밀아. 그깟 벌레가 뭐라고 그렇게 까지 사람을 밀치냐. 나는 또 큰 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하하하하. 그러게요. 해밀 씨 왜 그랬어요? 벌레는 그냥 잡으면 되죠. 어차피 저희 지내는 방에도 매일 찾아오는데.”


“아··· 죄송해요.”


나는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행히 성우 씨의 기분은 크게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까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 붉은빛은 떨어지다가 멈추어서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소량은 소멸하는 건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바이러스가 소량으로 몸에 침투하는 것은 크게 위험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만약 소량 만으로도 모두 감염됐다면 일반 시민들 대부분은 아마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터였다. 그것도 아니면··· 성우 씨는 정말 그냥 특별한 보균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잠깐 동안 의도치 않게 웃음바다를 만들어버린 나는,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성우 씨와 아저씨 옆에 나란히 앉아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나저나, 저 불량배들 중에 한 명이 최근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아, 그 키 작고 목소리 큰 그 놈이요?”


“응. 얼마 전에 기침을 계속하는 모습을 봤는데 말이지··· 어제부터 안 보이는 것 같아.”


아저씨와 성우 씨는 멀리서 운동을 하고 있는 불량배 무리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들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들이 말하는 불량배 하나가 무리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동장의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흠··· 재수 없는 놈이긴 했지만,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민수 아저씨는 어느새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불량배들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불량배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인원이 조금 줄어든 것 같기도 해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기분 탓이 아니에요.”


나의 말에 성우 씨가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제가 처음 와서 두들겨 맞은 다음 날, 민수 아저씨랑 해밀 씨를 만나기 전에 운동장에 앉아 숫자를 세봤어요. 생각보다 많아서 40명까지 세고 그만뒀거든요. 그런데 지금 다시 세보니 40명이 안 넘어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사람이 몇 명이 사라진 거죠.”


“허허··· 그걸 다 세고 있었단 말이야? 성우가 은근히 꼼꼼하구먼.”


“꼼꼼하다기보단··· 습관이랄까요? 매립지에서 쌓인 그런 습관.”


성우 씨는 그렇게 말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들 어디 간 걸까요···? 아파서 못 나오는 건지··· 아니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저씨가 무거운 목소리로 덧 붙였다.


“죽었을 수도 있어.”


“···”


아저씨의 말에 나와 성우 씨 모두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아니라고 믿고 싶은 현실이었다.


“저희는 얼마나 남은 걸까요?”


성우 씨가 침묵을 뚫고 말했다. 아저씨는 길게 한숨을 내시며 퍼져나가는 희뿌연 입김을 바라보았다.


“글쎄다. 내 생각엔 녀석들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없애는 것 같아. 채취를 더 이상 하지 못하거나··· 약물 투여를 못하거나··· 그런 시험 대상으로의 가치가 없어지면 몹쓸 짓을 하는 거지.”


“결국 ‘건강’ 해야 한다는 거네요.”


아저씨의 말에 성우 씨가 거들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너희 둘 도 거지 같이 나오는 밥이라도 꼭 챙겨 먹고, 운동장이 아니더라도 방에서 운동을 꾸준히 해. 그게 조금이라도 우리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니까.”


“네.”


“알겠어요.”


순식간에 어두워진 분위기에 우리는 모두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우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삐 삐 삐 삐’ 경고음 소리가 이제 체력 유지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럼 슬슬 가볼까.”


“세척하기 싫은데.”


“저도요.”


우리는 앞으로 남은 소독 세척 과정에 대해 한 마디 씩 하며 붉은 철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사람들이 일열로 줄을 서서 안대를 하나씩 나누어 받고 있었다.


“그럼 내일 보자.”


“네.”


“다들 잘 버텨봐요.”


성우 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버텨보자고 말했다. 나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어느새 손에 쥐어진 안대를 착용하고 한 걸음 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직원의 손에 이끌려 세척장으로 향했다. 그 차가운 물을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 추워.”


누군가가 추위에 떠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너무나도 그리웠던,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유, 유진이?!”


나는 붉은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해밀이야?!”


유진이였다. 유진이를 직접 볼 수 없었지만 희미했던 그녀의 붉은빛이 밝게 빛나며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유진아!!”


내가 소리치며 팔을 뻗자, 내 손끝으로 붉은빛이 서서히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화재 사고 때 고체 연료로 불이 붙을 때 보였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조용하지 못해!”


“으윽!”


순간 직원이 무언가로 내 팔을 때렸는지 엄청난 통증이 팔을 통해 전해졌다. 나는 직원의 목소리가 났던 방향을 노려보며 쌓였던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우릴 그만 좀 괴롭혀요!!”


그러자 붉은빛의 물결이 그 방향을 향해 뻗어나갔다. 직접 보이진 않았지만 붉은빛들이 그곳에 서있던 직원의 얼굴 어딘가에 닿아서 잠시 멈춘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아까 성우 씨의 몸속에 하나의 빛이 들어갔던 것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지 이번엔 그 붉은빛의 크기가 성우 씨에게 들어갔던 것과는 달리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해밀아 괜찮아?!”


“난 괜찮아! 유진아··· 잘 지···”


“이 새끼가!”


[퍽]

내가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강타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얼마나 아팠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이번엔 붉은빛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아··· 의식을 잃어가는 건가···’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시험대에 몸이 결박된 상태로 방에 누워있었다. 고개를 간신히 돌려가며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내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전임님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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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0. 회의 : 에필로그 24.01.03 28 1 10쪽
129 #129. 지옥 Ⅱ 24.01.02 22 1 18쪽
128 #128. 지옥 Ⅰ 23.12.29 17 1 12쪽
127 #127. 터널 Ⅱ 23.12.28 24 1 12쪽
126 #126. 터널 Ⅰ 23.12.27 21 1 12쪽
125 #125. 시험대 Ⅱ 23.12.26 20 1 12쪽
124 #124. 시험대 Ⅰ 23.12.22 20 1 12쪽
123 #123. 낯익은 기억 Ⅲ 23.12.21 19 1 12쪽
122 #122. 낯익은 기억 Ⅱ 23.12.20 18 1 12쪽
121 #121. 낯익은 기억 Ⅰ 23.12.19 16 1 12쪽
120 #120. 마지막 탈출로 Ⅲ 23.12.15 20 1 12쪽
119 #119. 마지막 탈출로 Ⅱ 23.12.14 17 1 12쪽
118 #118. 마지막 탈출로 Ⅰ 23.12.13 15 1 13쪽
117 #117. 돌멩이 23.12.12 20 1 12쪽
116 #116. 계획 Ⅲ 23.12.08 25 1 12쪽
115 #115. 계획 Ⅱ 23.12.07 18 1 12쪽
114 #114. 계획 Ⅰ 23.12.06 19 1 12쪽
» #113. 운동장 Ⅲ 23.12.05 20 1 12쪽
112 #112. 운동장 Ⅱ 23.12.01 22 1 12쪽
111 #111. 운동장 Ⅰ 23.11.30 20 1 12쪽
110 #110. 푸른 가운 Ⅲ 23.11.29 19 1 12쪽
109 #109. 푸른 가운 Ⅱ 23.11.28 17 1 12쪽
108 #108. 푸른 가운 Ⅰ 23.11.24 18 1 12쪽
107 #107. 재회 Ⅲ 23.11.23 16 1 12쪽
106 #106. 재회 Ⅱ 23.11.22 18 1 12쪽
105 #105. 재회 Ⅰ 23.11.21 17 1 12쪽
104 #104. 낯선 실험실 Ⅲ 23.11.17 20 1 12쪽
103 #103. 낯선 실험실 Ⅱ 23.11.16 17 1 12쪽
102 #102. 낯선 실험실 Ⅰ 23.11.15 2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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