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몸이 짓눌리는 게 아니라 마법진에 마력을 흡수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나는 확실하게 되물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설마⋯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응, 맞아, 마력으로 강화돼 있던 근력이 약해진 거야.”
아린이의 말에 나는 살짝 무릎을 굽혀 점프해봤다.
평소에 이 정도 힘으로 뛰어오르면 몇 미터 정도는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미터를 겨우 넘기는 게 고작이었고 몸이 천근만근 한 게 꼭 모래주머니를 잔뜩 달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 맞다⋯! 형, 괜찮아?!”
그러고 보니 벽에서 떨어진 하은이를 받아낸 형은 하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깔려버렸다.
설마 하은이한테 깔려 죽은 건 아닌가, 나는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형의 상태를 확인해 봤는데.
“어, 괜찮아, 괜찮아. 완전히 힘 빼고 받았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넘어진 거지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다행히 형도 조금 놀랐을 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버둥거리는 하은을 꽉 끌어안아 진정시키고 있었다.
“익⋯ 이익⋯!”
하은은 형의 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마 순수 피지컬만 따지면 형보다 하은이 한 수 위일 것이다.
“하은아. 하은아?”
하지만 그래플링은 형이 한 수 위였고 형은 하은의 관절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었다.
“하은아, 이하은. 대답하기 전에 안 놔줄 거야. 진정되면 그때 이야기해.”
“큭⋯! 크으으⋯!”
형이 그렇게까지 말해도 하은은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이내 차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스스로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고.
“⋯정신⋯ 차렸어요. 놔주세요.”
겨우 이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괜찮은 거 맞지? 풀어주자마자 또 난동부리는 거 아니지?” “⋯안 그래요.”
“확실하지? 믿는다?”
“네.”
형은 그런 하은의 상태를 확인하며 천천히 관절기를 풀어주었고 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과 머리카락에 잔뜩 들러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
⋯일단 이성이 되돌아온 것 같긴 한데⋯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숨을 격하게 몰아쉬는 걸 보면 한시라도 여기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한 모양이다.
“일단 진정이 됐다니 그건 다행이긴 한데⋯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뭐가 문제인지 말해주면 도와줄게.”
“미안, 마법진 때문에 당황해서 그랬어. 지금 마력이⋯ 내 마력이 엄청나게 소모되고 있어, 가능한 빨리 여기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봐 줘.”
마법진 때문에⋯.
나는 하은의 말을 곱씹으며 바닥을 내려봤다.
확실히 마력을 흡수해 각성자의 힘을 약화하는 이 마법진은 매우 위협적이다.
우리는 딱 그 정도로 평가하고 말 마법진이다.
하지만 마력이 회복되지 않는 하은에게 이 마법진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야 지금 잠깐은 힘이 약해졌지만 나중에 마력을 회복하면 정상으로 돌아오겠지만 하은은⋯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귀한 마력을 아무 의미 없이 땅에 쏟아붓고 있는 셈이니 그렇게 겁에 질릴 만도 했다.
평소 하은이가 자신이 언젠가 마력을 모두 소진해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닌,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 되는 확정된 미래를 얼마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지 줄곧 옆에서 봐왔기에 그 심정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알았어. 형, 아린아. 뭐가 됐든 일단 여기서 최대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래.”
“응, 알았어!”
하은의 사정을, 심정을 잘 아는 우리는 위로의 말 따위를 건넬 시간에 당장 흩어져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뭐가 없었다.
- 쿠구구!
담당자의 말 대로라면 여기 그냥 이렇게 가둬놓고 굶겨 죽이는 함정은 절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 갑자기 천장에서 작은 진동이 일더니 작은 구멍 사이로 뭐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키가 5미터쯤 되어 보이는 갑옷을 입은 거대한 기사 모형의 석상이었다.
- 쿠웅!
그 무거운 게 저 높은 데서 떨어졌으니, 석상은 땅을 부수며 착지했고 탐색전을 펼치듯 가만히 우리를 내려보았다.
“아린아!”
그냥 딱 봐도 저게 보스고 저걸 해치워야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상황.
한시가 급하다.
나는 곧장 아린이에게 신호를 보냈고 아린이는 내가 그러기도 전에 이미 워해머를 들고 돌진하고 있었다.
- 부웅!
마법진에 마력을 흡수당하고 있다고 해도 역시 아린이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아린이는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하고 부드러운 한 번의 동작으로 그 커다란 워해머를 뿅망치처럼 휘둘렀고.
- 콰아앙!!!
석상은⋯ 검을 뽑아 그런 아린이의 공격을 막아냈다.
“⋯어?”
“⋯어?”
자신의, 아린이의 공격이 막히는 패턴은 그다지 흔하지 않기에 아린이 본인은 물론 나까지 당황해 입으로 그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 타앗!
직접 무기를 마주 대 봄으로서 아무렇게나 막 싸워서 될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아린이는 일단 뒤로 한 발 물러서 석상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저 석상, 마법진으로 흡수한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있어요. 특히⋯ 현재 보유 중인 마력의 일정량을 흡수하는 마법진이라 저 때문에 유난히 강할 거예요.”
보통 각성자의 마력은 배터리와 비슷하다.
잠시 사용하면 닳고 쉬면 충전되는 배터리.
하지만 하은은 마력이 충전되지 않는 대신 어마어마한 초대용량 배터리를 가지고 있는 케이스인데 하필 그 초대용량 배터리에 담긴 마력을 일정량을 흡수해 힘으로 사용하는 적을 상대로 만났으니 상성이 최악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 최악이었다.
“그럼 석상을 상대하기보다 마법진의 작동을 멈추는 쪽으로 해볼까? 마법진이 그려진 땅을 파괴하면⋯.”
“아니요, 소용없어요.”
석상과 한 번 무기를 맞대본 아린이는 그쪽이 빠를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그런 제안을 했지만 하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땅에 그려진 마법진은 일종의 작동 버튼일 뿐이에요, 진짜 마법진은 땅속 깊은 곳에서 작동 중이고⋯ 이미 작동한 이상 땅을 다 파헤치고 들어가지 않는 이상 멈출 수 없어요.”
“그럼 어찌 됐건 저 석상을 돌무더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네!”
- 피잉!
나름 창의력을 발휘해 보려고 했지만 탑은 처음부터 딱 한 가지의 객관식 정답이 정해져 있을 뿐이었고 그렇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다.
형은 석상을 향해 곧장 화살을 발사하며 전투를 재개했고 아린이도, 하은도, 서연도, 나도 각자의 무기를 고쳐 쥐고 공격을 개시했다.
“준호야!”
“응?”
“내가 정면을 맡을게!”
“오케이! 알아들었어!”
이런 게 몸에 각인된 기억이라고 해야 하나, 아린이가 그렇게 말하자 그간 아린이와 함께해온 전투방식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떤 전투가 펼쳐질지 머릿속에 삭 그려졌다.
- 콰앙!
우리 중 가장 빠른 아린이가 먼저 석상과 격돌하며 충격파가 일었고 서로 무기를 맞댄 상태로 힘 싸움이 벌어졌다.
“크으으⋯!”
그리고 그 힘 싸움에서, 아린이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밀렸지만⋯.
- 카가각! 까앙!
선취점을 따낸 것은 반대로 아린이었다.
아린이는 부족한 힘을 기술로 커버했고 석상의 검을 가볍게 흘려내며 워해머로 무릎을 가격했다.
“후우⋯ 쉽지 않겠네.”
하지만 분명 제대로 된 반격을 가했음에도 손맛이 영 별로인지 아린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연아! 이 새끼 목 잡아봐!”
“응!”
한편 아린이의 작전대로 석상의 뒤를 잡은 나는 서연에게 석상의 목을 붙잡고 있도록 했다.
그리고.
- 퍼억!
나는 아린이와의 전투에 온 힘을 쏟아붓느라 아주 잠시 서연의 초크에 의해 고정된 석상의 머리를 메이스로 있는 힘껏 내려쳤다.
“에헤이~ 그치? 어림도 없지?”
하지만 아린이의 공격에도 꼼짝하지 않는 석상이 나한테 데미지를 입을 턱이 있나.
내 공격으론 석상의 머리에서 작은 돌 부스러기조차 떨어지게 할 수 없었다.
좋아, 물리공격이 안 통한다면 다음은 속성공격이다.
나는 석상의 머리통을 붙잡고 혹한의 냉기를 최대출력으로 사용했다.
- 쩌적! 쩌저저적!
설마 이것도 담당자의 큰 그림이었던 걸까.
나는 S급 던전의 보스가 온갖 무기를 가진 석상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했는데 그런 나도 혹한의 냉기로 충분히 얼리고 공격하면 석상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이 지금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 우드득!
그리고 역시나.
메이스는 소용 없어도 혹한의 냉기는 뭔가 영향이 있는지 한참 아린이와 검을 주고받던 석상은 움찔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 텁!
“⋯엇.”
- 콰아아앙!
그런데 그 순간,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던 석상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있는 서연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높게 서연의 다리를 잡고 들어 땅에 패대기 쳐버렸다.
- 쾅! 쾅! 쾅! 쾅! 쾅!
거기다 석상은 영화에서처럼 더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음에도 괜히 주인공을 던지거나 밀어내 반격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어설픈 악역이 아니었다.
석상은 붙잡은 서연을 한 번에 완전히 죽여버릴 생각으로 연속으로 계속해서 땅에 패대기를 쳤고 바닥엔 사방으로 서연의 피가 튀었다.
“젠장! 준호야! 넌 서연이 상태 좀 봐줘!”
“크으윽⋯! 아, 알았어⋯!”
아린이가 그런 석상을 공격해 밀어내며 패대기질은 끝났지만 서연은 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수호자의 의지를 발동 중이라 나한테도 데미지가 들어왔는데 그 데미지가 상당했다.
가호를 발동해놔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서연은 이번 공격에 정말로 죽을 뻔했다.
“컥⋯ 커억⋯.”
“야! 괜찮아?!”
다급히 확인한 서연의 상태는 심각했다.
갑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충격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했는지 입과 코에선 물론, 갑옷 사이사이에서도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이진 않아도 갑옷 내부의 몸이 다 터지고 부러져 곤죽이 된 모양이다.
“조금만 참아⋯!”
너무 심각한 부상에 나는 날카로운 만년빙 조각으로 아예 내 팔을 쭉 그어 잔뜩 피를 흘려주었다.
“꺽⋯ 커헉⋯.”
하지만 내 피는 서연의 몸에 제대로 흡수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바닥에 흘러 떨어질 뿐이었다.
“뭐야, 이게 왜⋯ 서, 설마⋯!”
이곳은 마력을 흡수해 힘을 약화하는 마법진이 발동 중인 장소, 아무래도 서연의 전용스킬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나는 신경⋯쓰지 말고⋯ 가서⋯ 도와⋯줘⋯.”
“그럼 죽으려고 하지나 말던가!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당황한 나는 팔, 목, 가슴, 내 몸을 마구 난도질하며 최대한 많은 피를 뿌렸다.
하지만 서연의 전용스킬은 내 피를 전혀 흡수하지 못했고.
“씨발, 씨발!!! 서연아, 김서연! 정신 차려, 자지 말고 눈 똑바로 뜨고 버텨, 내 말 듣고 있어?!”
이내 의식이 흐려져 가는 서연은 힘겹게 눈을 껌뻑이더니⋯ 이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으아, 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악!!!”
내가 부축하고 있던 서연의 고개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가끔 나는 창작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동료를 잃었을 때 포효하는 건 너무 작위적인 연출이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죽은 동료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대체 저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거지, 라고 쿨하고 이성적인 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내게 그 상황이 닥치자 정말 비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동료를 죽인 적에 대한 또 나에 대한 분노, 지켜주지 못한 무력감, 두 번 다시 웃고 떠들고 만날 수 없다는 슬픔과 두려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 걸 하는 후회, 단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렬하고 자극적인 감정이 동시에 폭발하니 이렇게 비명을 지르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
- 빠악!
하지만 그렇게 감정이 폭발하는 와중에도 이성은 또 제멋대로 일을 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둘로 분리된 듯한 이 감각.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손을 들어줄 때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힘 조절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덕분에 비명이 멈추고 다른 걸 할 정신이 들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크게 뜬 눈으로,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줄줄 흐르는 눈으로 다급히 무언가를 찾았고 곧장 발동시켰다.
- 파앗!
그것은 당연히 가호의 일종이었다.
[수호자의 가호]
현재 사용 중인 가호 : [수호자의 의지], [성역], [ ]
[성역]
- 모든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 고귀한 의지를 발현해 영역 내 지정된 아군의 체력을 재생시킵니다.
- 영역 내 재생은 매초에 한 번 이루어지며 재생력은 최대 체력의 1%를 초과할 수 없습니다.
- 수호자는 매초 최대 체력의 10%의 데미지를 입습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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