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여기는⋯?”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묘하게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다시 맞추고 주변을 살폈지만 살핀다고 뭐가 보이는 건 없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그런 공간이었고 저 멀리서 먹먹하게 울려 퍼지는 뭔지 모를 소음만이 이곳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아주 많고 또 빠른 무언가가 눈보라처럼 내 전신을 확 뒤덮으며 지나갔다.
마력의 흐름이었다.
“⋯가볼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별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나는 계속 주기적으로 돌풍처럼 불어오는 마력이 향하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게 뭐야?”
그렇게 마력을 따라 나아간 지 얼마나 됐을까, 저 멀리 아주 쨍한 붉은 빛이 보였다.
그 빛은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급속도로 거대해졌고.
“우와⋯.”
바로 앞에까지 다가갔을 땐 거의 집채만큼 커다래졌다.
대체 이게 뭘까, 여기가 어디길래 이런 게 있는 걸까.
궁금한 건 많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기에 나는 일단 이건 얌전히 지나쳐 계속 마력의 흐름을 따라가 보기로 했⋯.
- 후우웅!
“허억⋯!”
내가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땅 밑이 푹 꺼지며 추락하는 감각과 함께 줄곧 편안하기만 하던 호흡이 갑자기 꽉 막히는 느낌이 든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와, 진짜 살아있네.”
“어⋯ 음⋯?”
주변을 둘러보니 날이 밝았는지 창문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내 눈앞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은 누나가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생각이라는 걸 아주 조금만 해도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지만 마치 긴 여행을 떠났다 갑자기 돌아온 듯한 어리둥절한 기분에 나는 그렇게 물었다.
“아침이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조금 쉬었다 하라고.”
30분은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데 기절한 덕에 눈떠보니 아침이었다.
하지만 특별히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았기에 훈련을 속행하려고 했지만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순간 팔이 휘청이며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심각한 건 아니고, 그냥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네⋯ 좀 쉬어야겠네요⋯.”
이러다간 레이저에는 몰라도 굶어 죽을 건 확실해 보여서 나는 엉금엉금 기어 마법진 밖으로 나와 소은 누나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향한 행선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밥차였다.
나는 마침 식사 시간임에 감사하며 식판이 찌그러지도록 음식을 퍼 담았다.
“배가⋯ 많이 고팠구나⋯?”
허겁지겁 음식을 가져와 게걸스럽게 푹푹 음식을 퍼먹기 시작하자 소은 누나는 턱을 괴고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상하게 배가 고파서요.”
“그래⋯ 깨우러 가길 잘했네.”
나는 식판에 코를 박고 밥을 먹어 치웠고 그렇게 3분의 2정도 식사를 마쳐 젓가락질이 느려지기 시작했을 때쯤 소은 누나가 물었다.
“그래서, 밤샘 훈련의 결과는 어때? 효과 좀 있는 것 같아?”
“⋯아.”
그러고 보니 밥 먹는데 정신이 팔려 밤새 레벨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허기가 좀 가시고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 나는 밤샘 고문의 결실을 확인해보았다.
[박준호 (24)]
[Lv. 70]
보유 특전 포인트 : 10
와우.
“S급 던전 이후로 이 정도로 가파른 상승세는 처음인데요?”
“아프기만 한 헛수고는 아니라 다행이네.”
지금까지 그 어떤 때보다 효율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끔찍한 방법으로 고통받은 만큼 효과는 엄청났다.
나 혼자 몬스터에게, 혹은 서연과 레벨작을 할 땐 하루 종일 굴러서 1레벨이라도 오르면 다행인데 원래 64레벨이었으니 이건 밤사이에 순식간에 6레벨이 올랐다.
특성 성장의 끝이 몇 레벨인지는 모르겠지만 999레벨, 막 이러지만 않으면 정말 탑에 들어가기 전에 끝을 보는 거 아닌가 싶은 기대가 들었다.
“엇, 준호야! 좋은 아침!”
아프긴 하지만 그 고통만큼 엄청난 성과가 뒤따른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의욕이 샘솟았다.
나는 밥도 다 먹었겠다, 다시 후다닥 큐브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아침을 먹으러 온 아린이가 살갑게 인사를 하여 옆에 앉았다.
“아, 좋은 아침.”
“그런데 너는 오늘부터 따로 훈련하기로 했다며? 뭐 하기로 한 거야?”
소은 누나가 이미 나에 대한 소식을 전했는지 아린은 식사를 시작하며 대뜸 그렇게 물었다.
“별 건 아니고 나는 개인적으로 내 특성 쪽을 발달시키는 게 탑에서 더 유리할 것 같아서.”
“아아~ 특성~! 맞아, 너 전용특성에 되게 신기한 기술 많잖아.”
“그치,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더 신기한 기술이 있나 연구 좀 해보려고.”
“하긴, 전투 훈련은 단기간에 큰 효과가 나오지는 않으니까 너는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긴 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특성이나 스킬에 대한 성장이 일정 분기점을 넘어 차라리 전투 훈련을 받는 게 효과적이지만 내 특성은 아직 툭 건드리면 쑥 성장할 정도로 초기 단계에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밑바닥에서부터 순수 훈련만으로 정점을 찍어본 아린이는 내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나저나 너는 요즘 좀 어때, 괜찮아?”
“나는 항상 좋지? 갑자기 그건 왜?”
“그냥, 뭔가 서로 이런 대화 한 지 꽤 된 것 같아서.”
내 식판은 이미 비었지만 혼자 다 먹었다고 벌떡 일어나버리는 건 좀 서운할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대화를 거의 나눈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낀 나는 옆에 앉아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머리를 비우는 시간을 가졌다.
“그럼 나도 이만 훈련하러 가볼게, 오늘 하루 수고해.”
“응! 나중에 봐!”
나중이라⋯ 그 나중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
짧은 휴식을 마친 나는 소은 누나와 함께 다시 마법진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 누나.”
“응?”
“부탁이 있는데요.”
“또?”
“이번엔 별거 아니에요.”
“뭔데?”
“그⋯ 이번엔 제가 마법진 작동을 중단시킬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둬 주시겠어요?”
이미 꿈처럼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나는 뭔지 모를 공간을 탐험하던 그 신비한 감각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냥 기절한 와중에 꾼 개꿈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무의식이 그곳에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하는지 도저히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 미안. 방해였어?”
“아,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요. 그냥⋯ 뭔가가 보일 듯 말 듯 해서요.”
내 말을 들은 소은 누나의 표정이 삭 굳었다.
순간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조금 더 둥글게 돌려 표현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은 누나는 내 어깨에 툭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있어. 일이든, 공부든, 기술이든 간에 말이야.”
“어⋯ 네. 그렇죠.”
깨달음은 연습과 훈련과 공부가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어느 한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면 그 순간 한참 동안 제자리에 있던 실력과 지식이 갑자기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나의 경우 주방일이 그랬고 무기술이 그랬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아무도 너 방해 못하게 할 테니까 한번 끈질기게 그게 뭔지 알아내 봐.”
“네, 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진지한 조언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내가 신뢰하는 권위자가 나를 지지해준다는 것은 심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럼,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봬요.”
“그래, 수고해. 작동할게.”
“⋯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기 직전의 외상을 입는 일은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고 마법진이 빛을 발하는 순간⋯.
‘윽!’
또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오, 또 왔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시 그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저 멀리서 먹먹한 소음이 들려왔고 역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에 나는 다시 마력의 흐름을 따라 이곳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역시 가장 먼저 붉은 빛이 보였다.
“아까는 여기까지밖에 못 왔지.”
이 뒤에는 또 뭐가 있는 걸까, 괜히 어물쩍거리다간 또 깨어날라,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반쯤 뛰듯 마력의 흐름을 따라갔다.
“으으⋯ 뭐야, 이거.”
그렇게 또 잠시간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갑자기 몸 어디는 더운데 또 어디는 추운, 마치 양옆에 에어컨과 전기난로를 동시에 틀어놓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록 점점 가파르게 심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저 앞에서 상당히 강력한 마력을 가진 두 개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지?”
아직 눈으론 확인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력에 나는 습관적으로 메이스를 찾아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메이스는 없었다.
“아, 맞다, 메이스 안 들고 왔지?”
그럼 어쩔 수 없이 급한 대로 만년빙으로라도⋯!
나는 평소에 하던 대로 내가 만들고 싶은 무기의 형태를 떠올리며 만년빙의 정수 아이템을 사용하려 했지만 여기선 그것도 사용이 되지 않았다.
“그럼 점화라도⋯!”
거기다 점화까지.
이런, 공격수단을 모두 잃다니, 이거 위험하다.
나는 일단은 뒤돌아 도망쳐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차피 궁금해서 다시 찾아올 것 같다.
그럼 그냥 지금 확인해보자는 생각에 그것이 내 앞에 다가올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고.
“⋯⋯엥?”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아니, 두 마리의 그것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왈! 왈!
- 애오옹~.
저 멀리서부터, 내가 위압감을 느낄 정도의 마력을 뿜어낸 건 다름 아닌 개와 고양이⋯ 정확히는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와 랙돌 한 마리였다.
- 콰아아아아!
- 쏴아아아아!
⋯물론 평범한 개와 고양이는 아니고 털 대신 화염이 휘날리는 골든 리트리버와 도도함 대신 무시무시한 냉기를 내뿜는 랙돌이었다.
- 헥헥헥!
“오, 오지 마!”
화염을 내뿜는 골든 리트리버는 누가 골든 리트리버 아니랄까 봐 나를 보자마자 꼬리를 퍼덕퍼덕 흔들고 활짝 웃으며 달려들었다.
사인 - 불타는 개가 달려들어 타죽음. 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골든 리트리버는 술래잡기 놀이인 줄 알았는지 더 신이 나선 나를 쫓아왔고 사람이 개보다 빠를 순 없기에 이내 붙잡혀 버렸다.
“으아아⋯아악⋯?”
두 발로 나를 덮치는 불타는 골든 리트리버의 습격에 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골든 리트리버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푹신푹신해서 만지고 있으면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 야오옹~.
그렇게 내가 한참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골든 리트리버를 쓰다듬고 있자 질투하듯 랙돌이 내 팔에 콩 머리를 부딪히고 몸을 비비며 관심을 끌었다.
그런 애교에 결국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어주었고 그러자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꿈도 이런 개꿈이 없네.”
정확히는 개고양이꿈인가.
갑자기 불타는 개와 차가운 고양이가 튀어나와 쓰다듬는 꿈이라니,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알게 모르게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었던 건가, 뭐 이런 꿈을 꾼담.
그렇게 별생각 없이 따뜻한 개와 시원한 고양이를 한참 쓰다듬고 있는데 개와 고양이 둘 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몇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나를 슥 돌아봤다.
“왜, 따라오라고?”
뭔가 그런 것 같은 행동에 자리에서 일어서자 따라오라는 게 맞는지 둘은 후다닥 앞으로 달려가곤 내가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왜, 뭐가 있는⋯?”
그렇게 둘을 따라 더 앞으로 나아가자 내 눈앞에는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잠깐만⋯ 이건⋯?”
그것은 커다란 두 개의 구체였는데 하나는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고 하나는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꽝꽝 얼어있었다.
이것때문에 저 멀리서부터 그렇게 뜨겁고 추웠던 건가.
- 애오옹~.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양이가 얼음 앞으로 와보라는 듯 야옹거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왜, 무슨 일⋯.”
- 쩌저적!
“우왁!”
고양이가 부르길래 내가 얼음 앞으로 가는 순간이었다.
구체에서 뭔가 반응을 보이더니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게 툭 튀어나와 내 손에 쥐어졌다.
이 모양, 이 느낌, 그것은⋯ 아까 내가 만년빙으로 만들려고 했던 메이스였다.
“⋯설마.”
두 구체를 보는 순간, 설마설마하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얼음 속에서 메이스가 튀어나와 버리니 이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불의 구체는 테르고스의 불씨이고 얼음의 구체는 만년빙의 정수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은 아마도⋯ 나의 내면세계로 보였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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