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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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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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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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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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동료가 되어라

DUMMY

***


아침이 밝았다.

녹호는 태블릿을 들고 어떤 방으로 향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곳이다.


낯선 듯 익숙한 장소.

여기서 뭔가를 기다리는 듯 시계를 보다가, 시간을 때울 겸 공부를 시작한다.

이따금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지루한지 하품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다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두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점심 식사는···.”

“여기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녹호는 무심히 대답하고서, 태블릿 PC에 터치펜으로 계속 무언가를 끄적였다.

해야 할 공부는 여전히 많이 남은 듯했다.


“슬슬 너도 배고플 텐데.”


문득 녹호가 중얼댔다.

혼잣말이라기엔 꽤나 큰 목소리다.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잖아.”

“······.”

“그래, 계속 그렇게 있든가.”


그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오가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테이블에는 음식 2인분이 올려져 있다.

식사실이 아닌지라, 평소보다 간소한 상차림이다.


녹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신선로, 고기산적, 잡채, 매운탕.

보통 사람은 잔칫날이나 먹을 한식 차림이었다.


“······.”


으적대면서 먹는 소리가 먹음직스럽게 들려왔다.

진한 음식 냄새는 방 안을 가득 메웠고, 그 맛은 먹지 않아도 상상이 갈 정도였다.

쫄쫄 굶었다면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나 갈 거야.”


잠긴 목소리가 침대에서 흘러나왔다.

뒤이어 산발이 된 머리가 일어났다.


“밥 먹고 가.”

“안 먹어.”

“그럼 기다려. 식사 끝나고 사업 얘기해야 하니까.”


어지러운 머리카락 아래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반짝였다.


“사업 얘길 하자고? 이미 관계가 깨진 지 오랜데?”


녹호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식사를 이어갔다.

당연한 일이다.

음식을 먹으며 시선을 마주친다면, 즉시 변신이 시작될 테니까.


“식사는 끝내고 얘기하지. 네가 날 불편하게 해도 될 입장은 아니잖아?”

“하,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뭔데? 너네가 다 망쳤잖아?”

“······.”

“우리 가족이 누구 때문에 망가졌는데···!”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뚜렷하고 선명했다.

녹호도 이제는 수저를 내려두었다.

그리고 물로 입을 헹군 후에 나직이 말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시선은 어느새 산발 속에 있는 눈동자와 마주하는 채였다.


“우선,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모든 게 잘 풀렸을 것 같아? 정말로?”

“······.”

“아니겠지. 나랑 김예현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터졌을 거잖아? 시궁창에 처박혀 있었으니 말이야.”


그 눈빛은 아주 당당했다.

힐난당하건만,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두 번째로, 지금 나는 널 존중하고 있으니까.”

“···뭐?”


심지어 존중까지 하고 있다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돈 없으면 힘들 때 궁상맞은 법이잖아? 값싼 소주도 취할 만큼 못 처먹는다든가, 갈 곳이 없어서 한강에서 질질 짜고 있다든가, 아니면 난간을 넘어가려고 버둥댄다든가.”

“···야.”

“지금이 훨씬 낫지. 따뜻한 이불 속에서 파묻혀 있어도 돼, 밥 먹기 싫다고 땡강 부려도 돼, 징징대도 둥기둥기 해줘. 참 편하잖아?”

“야.”

“내 말이 틀렸어, 인영아?”


산발이 갈라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날카롭고 눈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는 다름 아닌 인영이었다.


“이 개···.”

“확실히 지금이 더 낫네, 독기도 느껴지고. 앞으로는 계속 그 태도를 유지하도록 해.”


녹호는 쏟아지는 원망도 편안히 받아냈다.

꼭 재롱이라도 받아주는 모양새다.

오죽했으면 인영도 헛웃음까지 터뜨릴까?


“하, 그래. 좋다니 계속할게.”

“말해.”

“이 개 같은 일에, 정말 너한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


분노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종류가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상처 입은 호랑이 같았다면, 지금은 빡친 고양이처럼 보였다.

독기는 한결 빠지고, 그 대신 열기가 이글댄다.


“말했잖아. 어차피 이렇게 됐을 거라고.”

“맞아, 이모랑은 언젠가 파국이었겠지. 진짜 이상한 여자였으니까. 지금껏 가족이라고 생각한 게 아까울 정도니까.”

“그런데?”

“결국 김예현 때문에 파탄 난 게 맞잖아. 막말로, 그쪽에서 막타를 쳤잖아? 그럼 책임도 제일 크지.”

“게임에서도 경험치를 제일 많이 먹듯이?”

“그래, 잘 아네.”


당당하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제 논리를 말한다.

비굴하기는커녕, 우위를 점하기라도 한 기색이다.


“그러니까 뭐라도 갚아. 어차피 돈 많잖아?”

“······.”

“재벌가에서 보일 수 있는 성의가 궁금하네. 완전히 팔자 피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비아냥이 잔뜩 섞인 게, 무슨 말을 할지 보겠다는 심보 같았다.

하지만 녹호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꼭 감상에 빠지기라도 한 듯,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왜? 할 말 없어?”


인영이 기다리다 못해 인상을 찌푸렸다.

거절이라도 해야 정상인데, 아예 반응이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 같진 않은데.


“그래, 딱 그거 같네. 지가 왕인 줄 아는 고양이.”

“···뭐?”

“하는 일이라곤 쥐뿔도 없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잖아?”


녹호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작 자신을 마주하는 얼굴은 점점 썩어들어가는데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거만하고 뻔뻔하지.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를 압박하려고 하고.”

“이 개 같은···.”

“또, 위에서 깔보는 위치에 올라서려고 하지. 제일 높은 곳에. 그래야 안심이라도 되는 모양이야. 가족이든 뭐든, 자기 통제 안에 있어야.”

“지금 말 다했어?”


정말 언성이 커지기 직전이었다.


“그래, 닮았어···.”


녹호가 중얼댔다.

그 목소리는 언뜻 한숨이 잔뜩 서린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워낙 숨이 많이 섞인지라.


“차라리 욕을 하지 그래? 멍청한 년이 성격까지 더럽다고.”


인영은 그게 불쾌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발을 움직여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섰다.


“얼마를 주면 만족하겠어?”


그 발걸음을 붙잡은 건, 한 마디였다.


“···정말 주겠다고?”

“고양이, 키워볼까 해서.”


공허하기까지 한 목소리.

인영은 잠자코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하. 그럼 돈 많이 깨질 건데? 옷, 음식, 화장품 죄다 최고급으로 사줘야 해.”

“······.”

“그걸 죽을 때까지 해줘야 해. 알다시피, 그게 반려동물에 대한 예의잖아?”


지켜지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쓸데없이 돈을 버리는 짓과 다름없으니.


“그 정도면 돼?”


녹호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문 근처에 있는 인영에게 옅게 시선을 던지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진짜 옷, 음식, 화장품만 따박따박 사다가 바치면 만족하고 얌전히 있을 거야?”

“각서 쓸 수 있어? 평생 그렇게 해준다고, 약속할 수 있냐고.”

“그래, 얼마든지.”


또렷하고 분명했다.

곱씹어 생각해보면, 녹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그저 매달 몇백씩 지출이 추가될 뿐이니까.


“너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지. 누구나 당장 사인하겠다고 나설 제안이잖아? 어때, 할래?”

“당연히···.”


인영이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계약을 받아들인 후 생활에 대해 생각해보는 중이겠지.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서 주는 밥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나가서 외출하고, 집으로 들어와 안락한 침대에 몸을 뉘는 삶.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게 좋아?”

“그건···.”

“상상만 해도 답답해 미치겠지? 안 그래?”


그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성취할 의욕은 안 나고, 박차고 나가자니 아깝겠지. 평생 무기력하게 사는 거야. 자기 자신한테 묶여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옳다구나 받아들일지 몰랐다.

평생을 책임져준다고 하는데, 싫을 리 없었다.

안정된 인생을 원한다면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녹호가 본 인영은 달랐다.

절대 현실에 안주하고 살 타입은 아니었다.

계속 뭔가를 해나가면서 살아야 했다.

동시에 손에 쥔 무언가를 놓지는 못한다.

설령 안락한 지옥에 갇힌 채 괴로워할지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긴 힘들어할 인간이다.


“이 선택지가 싫다···. 그럼 한 3억 쥐여줄까?”

“···3억?”

“충분하지 않아? 막타를 친 책임으로는 차고 넘치잖아. 막말로 가족 사이가 깨지는 건 어떤 식으로든 올 일이었고, 그땐 진짜 한강물 속에 있었겠지.”


인영은 서주 역시 원망하고 있다.

한 마디로만 얼핏 말했지만, 분명 이모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런 만큼 녹호가 하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파국은 왔을 테고, 그땐 자신을 주워갈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원하면 당장 입금해줄게. 이 정도면 괜찮은 원룸 구하고도 남을 거야.”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다.

원수지만, 죄에 비해서 내놓는 가치가 충분히 컸다.

원한 따위 접어둘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좀 아끼면 졸업한 이후에 작은 사업도 시작할 만하지.”

“그럼···.”

“성공한 다음에 나타나서 이모랑 목사를 비웃을 수도 있을 거야. 함부로 대했던 상대한테 가서 내려다보는 거, 이만큼 짜릿한 게 없지. 차라리 이쪽이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복수도 꿈꿀 수 있다.

특별히 뭔가를 할 필요도 없다.

성공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그쪽에선 충분히 눈꼴 시릴 테니까.

가장 적은 노력으로 최대한 감정을 괴롭힐 수 있는 일이다.


“······.”


하지만 인영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를 생각하듯 오도카니 제자리에서 서 있을 뿐.


“대답이 없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당장 결정하기 힘드니까?”


녹호는 감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 성공은 힘들다는 거. 위인전이 괜히 위인전이겠어? 운까지 따라준 걸, 오직 노력만으로 이룬 것처럼 말한 게 위인전이잖아?”

“······.”

“자기 능력을 확신하기 힘들겠지. 운은 더더욱 그렇고. 성공이 확실하지 않다는 소리야.”


3억.

적은 돈은 아니지만, 막상 뭔가를 하려면 불안했다.

다름 아닌 사업을 벌이는 거니까.

한 번이라도 실패했다간 태반이 날아간다.


“섣불리 고를 수 있을 리 없겠지. 너는 불확실한 걸 끔찍이도 싫어하니까.”


녹호는 꼭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이 읊어댄다.

하지만 인영 역시 반박하지 못했다.

말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맞다는 뜻이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고 계속 곱씹어갈수록 더 확고해질 터였다.


“세 번째 제안은 알지? 벌써 들었으니까.”

“언제?”

“레스토랑에서.”


그 말에 인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계획대로 하면 돼. 그럼 월급도 넉넉히 주고 숙식도 제공해줄게.”

“그게 말이 돼? 내가 김예현 좋을 일을 해줄 것 같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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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8화. 압도적인 잘생김 24.02.26 2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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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56화. 장천선 24.02.25 2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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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54화. 성역 24.02.24 23 0 11쪽
53 53화. 성범죄자 목사 24.02.23 31 0 12쪽
52 52화. 타투도 패션? +1 24.02.23 25 0 12쪽
51 51화. 역겨움 24.02.22 25 0 13쪽
50 50화. 밥 +2 24.02.22 25 1 12쪽
49 49화. 보수적인 남자, 진보적인 여자 +1 24.02.21 31 1 12쪽
48 48화. 게으른 자살 +1 24.02.21 29 1 12쪽
47 47화. 혁명 마렵네 +1 24.02.20 32 1 12쪽
46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1 24.02.19 30 1 12쪽
45 45화. 따돌림 +1 24.02.16 33 1 12쪽
44 44화. 여고 앞 +1 24.02.15 44 1 13쪽
43 43화. 미련과 후련 +1 24.02.14 39 1 12쪽
42 42화. 절연 +1 24.02.13 39 1 12쪽
41 41화. 이간질 +1 24.02.12 3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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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8화. 한강 다리 +2 24.02.07 44 1 13쪽
37 37화. 정신 붕괴 +1 24.02.06 4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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