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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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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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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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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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역겨움

DUMMY

이제 저쪽에서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다시 학생에게로 시선을 돌린 후, 말을 이을 뿐이다.


“미안하게 됐어. 못 볼 꼴을 보였네.”

“···네?”

“그래, 그때 빌린 돈은 안 갚아도 돼. 별 같잖은 일에 얽혔는데 배상해줘야지.”


학생은 얼떨떨한 눈으로 녹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의도냐는 듯한 눈빛이다.

그러다 다시 유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달리, 조용히 유리 파편을 정리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돈 갚을게요, 언젠가는.”

“왜?”

“아까도 말했잖아요. 제 편 들어주다가 이렇게 됐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 덕을 봐요?”


동정심이 이는 모양이다.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사람은 동류의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잠시나마 자신을 두둔해줬다면,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미안한데, 얘는 네 편 같은 게 아냐.”


하지만 녹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난 기회를 여러 번 줬어. 이유까지 덧붙여서 친절하게 알려줬지.”

“들었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아니, 전혀.”


단호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말했잖아. 기회는 여러 번 줬다고. 그만큼이나 시간은 많았어.”

“무슨 시간이요?”

“이유를 생각할 시간.”


경멸 어린 시선이 다시 한 번 유송을 스쳤다.


“정말 피해자가 안타까웠다면, 고민해야 했어. 어떻게 나를 설득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똑같은 일을 막을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겠지.”


들으라는 듯이 돋운 목소리.

그러자 유리 조각을 치우던 손도 멈칫하더니 한결 느려졌다.

억울했을 만큼, 이러는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다.


“그럼 지난번에 했던 말을 되풀이할 리는 없었을 거야. 설령 억지스럽더라도 다른 이유가 나왔겠지. 대화할 가치가 있는, 적어도 새로운 이야기 말이야.”

“······.”

“그런데 봤지? 그동안 아무런 고민도 없었던 거?”


하지만 듣지 않았으면 좋을 말이 흘러나온다.


“지금껏 관심 따윈 없었다는 소리지. 그냥 정의로운 척이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저 언니가 제 편이 아닌 이유라고요?”

“맞아. 그딴 걸 편이라고 부르면 안 돼. 편이 아니라, 널 소모품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거지. 자기 도덕성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말이야.”

“······.”

“가해자는 분풀이 대상으로, 피해자는 적당한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휴짓조각으로 대하고 있으면서, 정의로워서 그런다고 착각하고 있지. 하, 정말 역겨워서는.”


따가울 정도로 적나라한 비난이다.

진실이든 아니든 듣기 거북할 정도다.

당사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유리 조각을 치우던 손이 아예 멈춘 것도 우연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학생은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보다는 낫잖아요.”

“···뭐?”

“이유야 어쨌든, 절 도와주려던 거였고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었나?

자기 일에는 조용하게 대꾸했으면서, 갑자기 의표를 찌르고 나선다.

심지어 말꼬리를 흐리던 어투도 사라진 채였다.

꼭 작은 토끼가 호랑이를 깨무는 것만 같았다.


이 작은 반항에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녹호는 두 눈을 감았다.

잠시 미간을 찌푸렸고 언짢은 주름이 눈가에 새겨졌다.

굵은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이를 빠득 깨물었다.

그러다 결국 눈꺼풀이 들리고 불편한 눈빛이 드러났다.


“···맞네, 그건.”


긴장하고 있던 학생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선택권이 없었겠어. 살려면 뭐라도 끌어모아야지.”

“위선도 선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적어도 혼자 당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녹호도 그 말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원망 안 해요. 저한테 잘못했다고 느끼지도 않았고요. 그러니까, 언니는 아무런 죄도 없어요.”

“그래. 당사자가 그렇다면야.”

“그럼 언니한테 화 푸시고 용서해주시면···.”


끄덕이던 고개가 멈췄다.

잠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길게 끌지 않고 금세 입을 열었다.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잘못이 없는데.”


괜찮다고 다독이는 말이다.

그 속뜻까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긴장 풀어도 돼. 애가 어른을 걱정하는 거, 보기 안 좋거든.”

“네? 아···.”

“게다가, 지금은 네 코가 석 자잖아?”


학생은 여기 온 이유를 떠올렸는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괴롭히는 사람은 있는데 말할 곳은 없었겠지. 그래서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을 테고.”

“네···.”

“근데 견디는 것도 돈이 필요했어. 주변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구해야 했고, 그게 나였던 거구나?”


녹호는 어떻게 꿰뚫어 봤는지, 줄줄 예상을 읊어댔다.

딱히 뒷조사할 시간도 없었는데 말이다.

지난번에도 그랬듯, 몇 가지 단서만으로 떠올린 추측인 듯했다.


“목적은 돈. 맞지?”

“그···, 줄 수 있나요?”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뭔가를 상대한테서 얻길 원하면, 너도 상대한테 원하는 걸 줘야 해. 그게 협상의 기본이야. 알겠어?”

“······.”

“자, 뭘 준비해왔지?”


학생은 그 말을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고민이라도 해왔을까?

조심히 입술을 열어 협상 조건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배테이’고요, 2학년이에요. 전화번호는 수첩 있으니까 적어드릴게요.”


그 말대로 작은 수첩을 꺼내 숫자를 끄적댄다.

앙다문 입술은 꼭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그래서인지 녹호는 눈가를 미미하게 찌푸린 채였다.


“무슨 의미야?”

“빌리면 갚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전화번호를 주겠다?”

“네, 저만 명함을 가지고 있으면 불공평하니까···.”


녹호는 학생···, 테이가 하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잔뜩 구겨졌던 얼굴 위로 커다란 손이 올라갔다.

뭔가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반응이다.


“테···, 뭐라고?”

“네. ‘배’, ‘테’, ‘이’라고 해요. 아, ‘테’ 자는 ‘ㅓ’에, ‘ㅣ’해서···.”

“테이···. 배···. 그래, 곰돌아.”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었다.

차라리 아예 귀찮아하거나 무시했으면 모를까, 피로에 젖은 태도라니.

해야 하는 일을 정말 마지못해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조건이라고 내건 인적 사항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 피곤함이 목소리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야, 이렇게 해야 저한테 돈 갚으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안 빌려주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은 안 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냥 빌려주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이상한 전제를 끼워 넣지 마. 호의는 의무가 아니야.”

“그···, 으음···.”

“조심해. 그게 습관 되면 저 꼴이 나니까.”


유송을 가볍게 턱 짓 했다.

방금까지 그토록 힐난했으니, 나름 진심을 담은 경고겠지.


“만약 이게 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네 이름이랑 전화번호가 목적인 사람이겠지. 대부분은 널 불러내서 추잡한 짓거리를 해올 테고.”

“걱정 안 해주셔도 돼요. 전 그럴 생각 없거든요.”

“그건 네 의사랑 관련 없어. 무작정 학교로 찾아올 테니까.”


학생에게 집적대는 인간.

애초에 비상식에 속해 있을 터였다.

그런 만큼 테이가 무슨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겠지.


“아···. 어쨌든 걱정해줘서 감사합니다.”

“걱정이 아니라 빡친 거야. 세상 물정을 나보다 모르긴 쉽지 않은데···.”


커다란 손이 제 얼굴을 쓸었다.

피로감이 더욱 커진 모양새였다.


“그럼 뭘 드려야 해요?”

“전화번호 적은 거나 내놔.”


테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종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렇게 받아 가는 인간을 조심하라고.”

“네? 아! 저는 그런 의도로 드린 게···!”

“됐어. 나도 용건만 끝나면 손 털 거야. 애들이랑은 엮이기 싫어서 말이지.”


녹호가 종이를 대충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계좌 보내면 백만 원 정도 넣어줄 테니까, 돌아가 봐.”

“···네? 끝이에요?”

“당장은. 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긴 할 거야. 난 그 학교에 볼일이 있거든.”


커다란 몸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젓고선, 본인도 다시 방으로 향했다.



***


며칠이 지났다.

유송이 운전석에 앉아 차를 끌고 나아갔다.

녹호는 늘 그랬듯이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볼 뿐이었다.

다만, 이번 침묵은 평소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테이와 있었던 일 때문에.


“그···, 죄송합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송이었다.


“뭐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더 괜찮은 대답을 내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그럼···.”

“네 정의대로 대해줬을 뿐이잖아.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녹호는 여전히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만큼 유송에게는 난감한 일이기도 할 터였다.

오해라며, 이제야 부정한다고 해도 늦은 감이 있었다.

그건 고통이 겁나서 내뱉는 변명처럼 들릴 테니까.


“선의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다만, 고민할 시간은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말로 운을 띄웠다.


“하지만 저는 게을렀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처럼, 설득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고 실패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선의가 없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

“그렇지만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너무 얄팍해서, 저 스스로 검열하고 접어뒀지만 말입니다.”

“그래? 어떤 변명을 떠올렸지?”


그 말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주로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이었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정말 슬플 거라는. 어머님을 들먹일까도 생각했습니다.”

“욕을 바가지로 처먹을 얘기네.”

“예, 그런 같잖은 몇 가지를 생각해냈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떠올랐습니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가 낫다고 하셨던 걸 말입니다.”


녹호는 그 말에도 코웃음을 쳤다.


“뒤늦게야 떠올렸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못 믿을 얘기지. 맞을까 봐 어젯밤에 생각한 변명일 가능성이 높잖아?”

“의심스러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한참이나 소리 지르면서 했던 대화야. 그걸 까먹는다고? 말이 안 되잖아. 인영이는 지나가다 들은 말도 바로바로 떠올리던데.”


단호한 말이다.

지금껏 겪어온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늘어놓는 변명 모두 같잖을 뿐이라고.


“그···, 인영 씨는 똑똑한 편입니다.”


하지만 유송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겨우 지나가는 말이었다니까.”

“예, 제가 멍청한 탓도 있습니다. 녹호 씨는 머리가 좋은 사람과 어울리고 다니니, 그 아래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아래?”

“똑똑함은 위로 올라갈수록 경이로운 수준일 겁니다. 하지만 멍청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려가면 갈수록, 미련하고 고집뿐이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학에 가까운 말이지만 일리는 있었다.

필요한 말을 곧바로 떠올리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노력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 타고 나야만 하는 부분이라고 할까?

훈련이나 공부로 해결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인영은 그런 측면에서 논란이 필요 없는 수재였다.

처지가 어렵다는 말은 노력의 시간과 질이 극도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고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또,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했다.

애당초 타고난 머리가 좋다는 의미다.


“음···.”


도플갱어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각 분야 천재의 지능을 일부나마 가져온 존재인 만큼, 어렵게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쉽게 말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 탓에 인간의 평균을 착각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알려주십시오. 모자란 사람이 따라가려면 배워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작가의말

녹호도 말빨에서 지면 받아들이긴 합니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서 그렇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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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8화. 압도적인 잘생김 24.02.26 2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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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56화. 장천선 24.02.25 27 0 11쪽
55 55화. 재회 +1 24.02.24 28 0 12쪽
54 54화. 성역 24.02.24 24 0 11쪽
53 53화. 성범죄자 목사 24.02.23 31 0 12쪽
52 52화. 타투도 패션? +1 24.02.23 26 0 12쪽
» 51화. 역겨움 24.02.22 26 0 13쪽
50 50화. 밥 +2 24.02.22 26 1 12쪽
49 49화. 보수적인 남자, 진보적인 여자 +1 24.02.21 31 1 12쪽
48 48화. 게으른 자살 +1 24.02.21 30 1 12쪽
47 47화. 혁명 마렵네 +1 24.02.20 33 1 12쪽
46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1 24.02.19 31 1 12쪽
45 45화. 따돌림 +1 24.02.16 33 1 12쪽
44 44화. 여고 앞 +1 24.02.15 44 1 13쪽
43 43화. 미련과 후련 +1 24.02.14 4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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