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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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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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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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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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성역

DUMMY

하지만 그 와중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져온다.


“아픔이 끝난 후에도 들이붓는 진통제에는 중독이 뒤따르기 마련일세. 그건 다시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겠는가?”

“그땐 용서하라고요?”

“혹은 복수가 끝내고 난 이후일 수도 있겠지.”

“······.”

“용서는 형태일 뿐일세. 중요한 건, 끝맺음이지. 언제까지 분노를 쥐고 있진 말게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이후에도 계속 상처를 헤집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녹호와 인영이 말했던 ‘후련’과 통하는 말이다.

괴로움이 끝맺음을 겪어야만 해방될 수 있다니.

어쩌면 종교는 모두 이를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는 용서라는 형태로, 불교는 해탈이라는 방법으로.


“원래 여기에 다녔던 신도가 더 있을 테지.”

“···네? 아, 그렇죠.”

“우선, 모두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지 않겠나? 상황을 알리고 서로 어떤 생각인지 정리도 해야겠지.”

“맞아요. 새로운 목사님이 오셨다고 말해줘야···.”


끝맺음이 어떨지와는 별개로, 예현은 새로운 신도를 흡수하게 되었다.

건물값에 포함되지도 않은, 어쩌면 걸림돌이 됐을지도 모를 사람을 말이다.

중형 교회인 만큼 교세는 몇 배로 늘었다고 봐도 되겠지.


“온 김에 기도는 하고 가는 것은 어떤가? 예배를 못 한 지 며칠은 되지 않았는가?”

“그럼 감사하죠.”

“여기서 바로 기도를 올리지.”

“단상에 안 올라가시고요?”


예현은 웃으면서 기행을 설명하였다.


“평소엔 잘 보이라고 올라갈 뿐이지. 다만, 그게 의무가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겨우 몇 뼘 남짓한 높이가 아버지께 무슨 의미가 있어서.”

“아···.”

“아버지에게 있어서 높고 낮음이, 겨우 이 단상으로 결정되진 않겠지.”


키 차이 때문에 신도가 예현을 올려다본다.

말과는 달리, 우러러봄은 역시나 높낮이로 결정되었다.


“기도하세.”


모두가 경건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언변은 어느새 모두를 사로잡은 후였다.

이제 이곳에서 예현이 비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그대의 친애하는 아들이 인도에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곳엔 방황하는 어린양이 남아있었습니다.”


신에게 점지받았다는 기도사가 나왔다.

이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신성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이 되었다.

성스러운 일이었고, 항거해서는 안 될 광명이었다.


“당신께서 제게 이들을 도우라 하시니, 아들 된 도리로서 받들겠습니다. 이들이 나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상, 나 역시도 이들의 손을 놓지 않겠나이다.”

“······.”

“그러니 부디 이들의 끝맺음과 그 이후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에 있었던 부정은 씻어주시고, 앞으로 있을 홍복에 축복을 내려주소서.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제에 뒤늦은 마침표를 찍고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경건하게 또, 부정하게.

기도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동시에, 홀리기까지 했다.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부디 그대의 미욱한 아들에게 힘을 주시기를 바라며. 아멘.”


예현은 그렇게 신의 이름으로 이들을 품겠다고 선언했다.



***


녹호가 쉬고 있을 무렵,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와.”

“예, 도련님.”


두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류에는 두꺼운 서류뭉치를 들고 온 채였다.


“무슨 일이야?”

“저번에 시키셨던 일 끝났습니다.”

“배테이?”

“예. 이 여학생을 괴롭히는 무리, 학생 주임 선생, 그리고 가해자 부모님에 관한 조사 말입니다.”


두꺼운 종이 다발이 책상 위로 올라왔다.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녹호가 학교 폭력 사태에 관심을 가지다니.


“혹시 배테이 양이 겪고 있는 일을 해결해주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일단 괜찮은 패가 될 것 같아서 알아보라고 했지. 수단과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흐음, 그런데 왜 묻지? 동정심이라도 갔어?”

“의외처럼 느껴졌던지라···. 죄송합니다.”


두오도 눈앞에 있는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다.

선함이라고는 찾기도 힘든 존재지.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대여섯 살 먹은 아이도 캐리어에 넣어버리고 말 정도니까.


“역시 아저씨는 유송이처럼 안 대드는구나?”

“저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도련님께서 시키신 일은 해낼 뿐이고, 때리시면 가만히 맞고 있겠습니다. 도련님이 제 허물을 눈감아주신 날부터 제가 눈을 감는 날까지, 이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충성스러운 말이다.

동시에 선악 따위 개나 줘버린 소리이기도 했다.

녹호가 어떤 인간인 줄 알면서도 이런 얘길 하다니.

세상 사람 전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

“그렇습니다.”

“그럼 죽어.”


잠시 침묵하는 두오.

그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처리하시기 편하도록, 화장실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주섬주섬 준비를 시작한다.

책상 위에 날카로운 만년필을 들고선 발을 뗀다.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는 세상 사람에, 본인 역시 집어넣은 모습이다.


“아냐, 됐어.”


녹호는 이를 확인하고서야 명령을 거두었다.


“그래, 참 좋아. 사람이 이렇게 일관성이 있어야지.”


역시나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다.

하긴,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난 말이야, 위선이 참 싫어.”

“앞으로는 정의롭다는 양 굴지 않겠습니다.”

“아냐, 그 말이 아니야. 정의를 관철할 수는 있지. 자기한테도 적용할 수 있다면야, 존중해줘야지.”


기분이 좋아진 덕일까?

묻지도 않은 말에 답하며 서류 뭉치를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제게 화를 내시지 않으셨습니까?”

“···하, 설명하기 까다롭네. 말이 오염돼서 문제야. 누가 ‘위선도 선이다’라는 개소리를 퍼뜨려서는.”

“그게 틀린 말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렇지. 애초에 ‘위’선이잖아? 가짜라고. 가판대에 ‘음식 모형도 음식이다’라고 하는 소리랑 동급이지. 남 핑계 대면서 제멋대로 하는 놈한테 쓰는 말인데, 뭔 이상한 소리를.”

“······.”

“그래도 뭐, 이해는 해. 빡대가리한테 급하게 사회성을 주입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종잇장이 넘어간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간단해. 예절이든 정의든 선의든, 다 인정하고 존중할 만하다는 소리야.”


넘어간 다음 장에는 누군가의 사진과 일정표가 적혀 있다.

조사로 알아낸 일과겠지.

도플갱어에게는 훌륭한 무기이기도 했다.

완벽히 남을 흉내 낼 만한 순간과 수단이라니.


“그렇게 말하실 줄 몰랐습니다.”

“왜? 죄다 바보짓이라고 할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런 소릴 할 거면, 즐길 거 다 즐긴다면 빠르게 자살하는 편이 낫지. 최대한 누리고 값은 안 치르고 넘어갈 수 있잖아?”


종이가 넘어가도 전체 구성은 똑같았다.

타인의 얼굴과 일과표가 십수 개.

과장을 조금 더 보탠다면, 목숨을 여럿이나 쥐고 있는 상태였다.

정작 범 아가리에 들어간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도련님은···.”

“안 지켜도 되는 입장이니까. 그리고 무언갈 존중한다는 말이, 나까지 동참해야 한다는 소린 아니잖아? 물론, 마지못해 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

“어쨌거나 난 신념은 존중해줄 거야. 그 당사자가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줄 수 있게 도와줘야지. 신념이잖아? 위선이 아니라.”


종이가 덮였다.

그리고 텅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로 내려둔다.


“보안은 확실하지? 무슨 일이 생겨도 의심 못 하게, 흥신소 여러 군데에 나눠서 의뢰하라고 했잖아.”

“···아, 예. 그 부분은 확실히 해뒀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아까?”

“마지못해서 해야 하는 일 말입니다.”


녹호는 잠시 손가락으로 서류 뭉치를 두드렸다.


“선택권이 없는 경우···, 라고 하더라고.”

“선택권이라면 어떤···.”


당장 대답하지 않고 손을 휘휘 저어댄다.

가보라는 뜻이었다.

두오 역시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선 몸을 돌렸다.

명령을 내린다면 명령대로, 그 손으로 선택한 정의였다.


“앞으로 어린 손자를 건드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 어떤 상황이라도 말이야.”


그런 뒷모습을 향해 무심한 목소리가 지나갔다.

두오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천선분식.

유송이 다시 방문했다.

평소처럼 그 앞으로 가서 카드를 내민다.


“이번에 대량 포장이요.”

“메뉴는 늘 같이?”

“네. 그리고 기다릴 동안 마시게, 슬러시도 하나만 먼저 주세요.”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유송이 잠시 서서 기다릴 동안, 아주머니는 얼른 컵에 슬러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요새는 아가씨만 자주 오고 그 총각은 안 보이네요?”

“아, 바쁘셔서요.”


차가운 컵이 먼저 나왔다.

유송은 슬러시를 들더니 늘 앉던 창가 자리로 향했다.

물론, 그동안에도 아주머니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일이 많으신가?”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아가씨 표정이 밝아져서 다행이에요.”

“제가요?”

“네, 며칠 전에 갑자기 바짝 긴장한 얼굴로 왔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되게 편해 보여요.”


정말이었다.

평소 굳어있던 얼굴과는 달랐다.


“고민이 해결돼서 그럴 거예요.”

“왜요? 직장 상사가 요즘엔 안 괴롭혀요?”


여기에 와서 늘어놓는 푸념이란, 대부분 그뿐이었지.

그래서 녹호에 관해서 물어보는 터였다.


“많이 나아졌죠. 아니, 계속 그런 사람이었는데 제가 요령이 없었나 봐요.”

“음, 어떤데요?”

“정신이 아득해지는 사람이긴 하죠. 상식이 안 통하기도 하고요. 별별 이상한 이유를 들어가면서 행동하는데, 말문이 턱턱 막혀요.”

“아이고···. 답답하겠어요.”

“유별난 구석이 있죠. 그런데 그 이상한 이유에만 충족되면 그냥 넘어갈 때도 많아요. 최근엔 작은 구멍이 생긴 것도 같고요.”


음식을 다 끝냈을까?

아주머니는 가득 찬 비닐봉지를 들고 다가왔다.

그 위에는 떡볶이, 순대, 김말이 튀김이 담긴 접시도 있었다.


“여기 음식, 그리고 서비스예요. 먹고 가요.”

“아, 괜찮은데···.”

“어차피 거기 널널하잖아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그렇게 말을 하며 맞은 편에 앉는다.

아무래도 더 대화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구멍이요? 그 총각한테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작가의말

예전에 있었던 일인데, 올리는 회차를 잘못 올려서 일주일 정도 밀려서 연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아무도 뭐라고 안 해서 뒤늦게야 눈치 챘죠.
독자분들 중 한두 명만이 조회수를 올려주실 때 생기는 문제점이죠.

그리고 방금도 그럴 뻔했습니다.
불안해서 항상 올리기 전에 확인해서 망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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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65화. 달란트 24.03.02 33 0 12쪽
64 64화. 탈출 +1 24.03.02 31 0 12쪽
63 63화. 테러리스트 24.02.29 26 0 12쪽
62 62화. 불 필요한 건물 24.02.28 26 0 12쪽
61 61화. 불가해한 잘생김 24.02.27 29 0 12쪽
60 60화. 숨막히는 잘생김 24.02.27 32 1 12쪽
59 59화. 아득한 잘생김 24.02.26 29 0 11쪽
58 58화. 압도적인 잘생김 24.02.26 29 0 12쪽
57 57화. 법인 관리 +2 24.02.25 28 0 12쪽
56 56화. 장천선 24.02.25 26 0 11쪽
55 55화. 재회 +1 24.02.24 28 0 12쪽
» 54화. 성역 24.02.24 24 0 11쪽
53 53화. 성범죄자 목사 24.02.23 31 0 12쪽
52 52화. 타투도 패션? +1 24.02.23 26 0 12쪽
51 51화. 역겨움 24.02.22 25 0 13쪽
50 50화. 밥 +2 24.02.22 26 1 12쪽
49 49화. 보수적인 남자, 진보적인 여자 +1 24.02.21 31 1 12쪽
48 48화. 게으른 자살 +1 24.02.21 29 1 12쪽
47 47화. 혁명 마렵네 +1 24.02.20 33 1 12쪽
46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1 24.02.19 31 1 12쪽
45 45화. 따돌림 +1 24.02.16 33 1 12쪽
44 44화. 여고 앞 +1 24.02.15 44 1 13쪽
43 43화. 미련과 후련 +1 24.02.14 40 1 12쪽
42 42화. 절연 +1 24.02.13 39 1 12쪽
41 41화. 이간질 +1 24.02.12 40 1 12쪽
40 40화. 고양이 +1 24.02.09 40 1 12쪽
39 39화. 동료가 되어라 +1 24.02.08 43 1 12쪽
38 38화. 한강 다리 +2 24.02.07 4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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