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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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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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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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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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미련과 후련

DUMMY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존댓말이다.

인영이 다시 예의를 차리려고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말이 더 듣기 좋다고 말했을 텐데?”

“그런 빈말은 안 해도 돼요.”

“빈말은 남한테 예의 차릴 때나 하는 거고. 내가 너한테 공손해야 할 이유가 있냐?”


짜증 서린 목소리에 진심이 느껴졌다.

하긴, 방금 말한 대로 가식을 떨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럴 성격도 아니고.


“그···, 아까 마음에 안 들었다고 티 내나 싶었지.”

“내치고 싶을 땐 대놓고 빈 찬합으로 줄 테니까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마.”

“아, 씨. 무슨 그런 소릴···.”


인영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본인이 원하니 가식은 필요 없었다.

짜증 날 때는 평소에 하듯이 하악질을 내보이면 됐다.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굳이 멀리까지 올 필요 없잖아.”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입을 뗐다.

합당한 의문이다.

굳이 이 분식집으로 올 필요는 없었다.

더 가까운 곳에 깨끗한 식당이 많았으니까.


녹호는 대답하기 싫은 듯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입을 닫기도 이상했다.

이 애매한 상황에서, 늘 그랬듯 별일 아닌 것처럼 대꾸했다.


“입맛에 맞아서. 비싸다고 누구한테나 맛있다는 뜻은 아니잖아?”

“뭐야? 단골집에 데려온 거였어?”


인영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생각에 잠기더니, 싱긋 웃으면서 농담을 던진다.


“그럼 내가 뭘 못 했으면 더 귀한 걸 먹었겠네?”


잘했으니까 단골집에 데려왔냐는 물음이 깔려 있었다.

언뜻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사생활 일부를 공유했다는 뜻이니까.


“편하게 먹으려고.”

“진짜 그것뿐이야?”

“어. 설마 매번 스테이크에 와인을 먹고 싶었어? 그 떡실신을 했으면서?”

“아니, 잠깐. 그 얘긴···.”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시선을 피한다.

취하고 난 뒤에 기억조차 없었지.

의식이 사라진 시간 동안,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두려울 터였다.


“아, 그래. 덧붙인 말은 몇 개까지 들었지?”


녹호의 저택에서 깨어난 직후에 있었던 일.

유송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는지, 인영이 시선을 피했다.


“다 들었구나. 설마 했는데 말이야.”

“큼!”

“의리 진짜 없네. 아무리 봐도 잘못 뽑았어.”

“다 갚을게! 열심히 할게!”

“어디서 성질이야?”

“아, 쪽팔리니까 그렇지!”


민망한 얼굴로 버럭 화를 낸다.

그만큼 녹호가 편해지긴 한 모양이다.

서로 투닥거리는 모습은 친구라고 해도 될 정도다.


“간만에 감상적이었는데, 진짜 다 깨게···.”

“그래, 차에서 갑자기 청승을 떨었지. 답지도 않게.”

“싱숭생숭해서 그랬다! 왜!”


상기된 얼굴로 빽 소리를 지른다.

계속 민망했던 일이 들춰지자 열이 오르는 모양이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다물고선 감정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해. 이모가 그런 모습 보니까.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타올랐나 싶고.”

“······.”

“이래서 복수는 허무하다고 하나?”


깊은 속내였다.

남한테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제 진짜 동지 의식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


“그게 복수가 허무해서겠어? 인연이 허망해서 그런 거지.”


녹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그건 꼭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말 같았다.


“사람이 사람 괴롭히는데, 어떻게 재미가 없겠어? 기대한 반응만 보여줬으면 만족했을 걸?”

“딱히 뭔가를 기대하지는···.”

“구체적으로 떠올리진 않았겠지. 그래도 무릎 꿇어왔으면 안 즐거웠을까? 김예현이랑 인연을 끊는다고 하면 안 즐거웠을까?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원래 바라던 바는 그거였잖아?”


인영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까 허무하겠지. 인연이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나쁜 년 같잖아.”


녹호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하긴 했지. 가족을 구하진 못했잖아?”

“뭐?”

“아무리 이모가 너한테 엿 같이 굴었어도, 세상은 걜 사이비 피해자라고 부를 거야. 그런 불쌍한 사람을 두고 갔으니까 너도 나쁜 년이 되는 거고.”


분명 서주는 인영에게 상처를 줬다.

부모님을 들먹이며, 네가 대신 죽었어야 했다고 외쳤다.

그 상황에서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서주에게 손가락질을 하진 않을 터였다.

사이비가 망가뜨렸다고 여길 뿐이다.

이 불쌍한 가족을 버린 사람 역시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겠지.

지금껏 의존해왔을 거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어차피 남일이니까 그렇게들 말할 거야. 왜 사이비에 빠졌는지, 너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관심도 없이.”

“나한테 다른 길은 없었어. 정말 더 좋은 방법은···.”


인영이 불편한 얼굴을 해 보였다.

이모와 연을 끊은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직시한 탓이다.


“맞아. 지금이 베스트지.”

“야, 진짜···. 방금은 잘못이라며? 그런데 또 무슨 말이야?”


불편함은 다시 짜증으로 변했다.

계속 말이 바뀐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녹호는 무덤덤하게 인영을 바라보고선 입을 열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그 상태로 더 버틸 자신 있었어? 내일 아침에 이모 얼굴을 볼 수 있었겠냐고.”


담담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여전히 사이비 목사한테 홀려서 정신 못 차리고 있겠지. 그 꼴을 눈으로 보고 있자니 갑갑하고, 안 보이면 또 불안할 거야.”

“······.”

“매일매일 잠도 편하게 못 자. 이모를 어떻게 믿고 긴장을 풀어? 자다가 칼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진실이 그랬다.

서주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모든 날을 수명이 깎이는 기분으로 살아야겠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


“잘못이지만 괜찮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난 그렇게 살고 있잖아.”

“아니, 그···. 음···.”

“갑자기 신뢰가 가지?”

“어. 매우.”


인영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나쁜 짓을 할 땐, 공범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복수가 그런 거지. 남들이 하면 나쁜데, 나 혼자 하기엔 참 좋은 일이야.”

“그래?”

“어정쩡하게 인연이 남으면 미련이 생기는 법이잖아. 항상 꺼림칙하고 불편하고.”

“미련이라···. 나도 아직 그런데?”

“오늘 잘 먹고 들어가서 휴대폰 만지다가 곯아떨어져 봐. 내일 아침 멍하니 일어나서 일정 끝내고, 다음날을 준비하고. 그렇게 하루 이틀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 시궁창은 잊어버리고 살아가겠지.”

“······.”

“이제 인연은 끝났잖아. 그러니까 후련을 만끽해야지.”


인영은 그 말을 잠자코 들었다.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이 되는 듯했다.


“그렇게 천국 같은 삶을 살아도 되는 거야? 복수한 대가로?”

“천국?”

“응, 지금은 상상이 잘 안 가서.”


모든 것이 달라진 삶.

그런 커다란 변화는 누구든 움츠리게 만든다.

설령 그게 좋아보인다고 해도, 낯설다는 감정은 그 자체로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글쎄, 진짜 천국일지는 모르겠는데?”

“어?”

“일하면서 살기로 결정했으면 잘해야지. 못하면 천국이고 뭐고 없어.”


인영은 뒤늦게야 아차 하는 얼굴을 짓는다.

돌아갈 집은 없었고, 이제 얹혀사는 처지가 됐지.

제 처우는 완전히 저 손아귀에 있었다.

얼을 타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그래도 남들처럼 사는 걸 천국이라고 부를 일은 없을 거야. 그 정돈 약속할 수 있어.”

“뭐?”


녹호는 딱히 별말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머니가 가져온 음식을 받아들 뿐이었다.



***


외제차가 늦은 저녁, 저택에 들어섰다.

대문이 열리고 더 들어가려던 찰나, 두오가 나서서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운전석에 탔던 인영은 창문을 주욱 내렸다.


“무슨 일이에요?”

“주차를 대신하러 나왔습니다. 내려주십시오.”

“괜찮은데···.”


차고까지 가서 주차할 생각인 듯했다.

이제 운전이 익숙해졌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인영아, 내려. 내가 불안해서 못 참겠으니까.”

“아니, 나 이제 잘하잖아?”

“내리라고.”

“야, 진짜 무시도···”

“그래, 그럼 해봐. 근데 차고에서 기침 한 번 잘못하면 집 한 채 값이 날아가는 거야.”

“내릴게.”


인영이 냉큼 자리에서 내렸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지 문을 닫지 않고 차 안으로 고개를 내민다.


“넌 안 내려?”


녹호가 가만히 앉아있자 이상한 모양이다.


“차고랑 내 방이랑 연결돼 있어서.”

“아.”


두오가 운전석에 타고 차 문이 닫혔다.

그리고 차고까지 주욱 들어갔다.

캄캄한 내부로 들어서자, 녹호는 이제야 자리에서 내렸다.


“주차해.”

“예, 알겠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고 구석에 트인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곧 그 너머에 있던 녹호의 방이 보인다.

다만, 나갈 때처럼 비어있진 않았다.


“오셨습니까?”


들어가자마자 유송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손에는 종이봉투도 하나 쥐고서는.


“그래, 인영이 짐을 여기로 옮겨두라고 시켰었지? 잘 끝냈어?”

“예, 건네받은 열쇠로 필요한 짐은 모조리 옮겨뒀습니다. 앞으로 저 끝에 있는 방에서 지내시면 될 겁니다.”

“잘했어. 가 봐.”


시킨 일도 끝났고, 보고 역시 마쳤다.

이제 돌아가면 됐다.

녹호는 소파에 털썩 앉아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안 가?”


하지만 유송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꼭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인영 씨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뭐야? 내기가 궁금한 거였어?”


내기.

인영을 욥이라고 부르며 저질렀던 일이다.

직접 위해를 가하지 않았을 때 타락할지 안 할지.


“여기에 살기 시작한 거 보면 짐작하잖아? 서주를 배신하고 여기에 붙었어. 이제 내 말을 들으면서 지내겠지.”


결과가 나왔다.

가족애보다 복수심이 먼저 이뤄졌다.

충분히 타락이라고 볼 만했다.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고 우겨볼까?

아니, 그건 최악의 수였다.

그럼 녹호는 비정한 선택을 유도할 테고, 더 끔찍한 일이 생길 테니까.


“내기에서 졌네? 뭘 내놓을래? 그 몸뚱이 말고, 가진 게 있어?”

“예? 그건···.”


녹호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농담 삼아 묻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다가 돌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고개를 끄덕였다간 바로 침대에 끌려갈 수도 있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줄 건 하나뿐인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이 몸도 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에겐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내어줄 무언가는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담담히 상황을 넘기는 것.

그래야 제 몸을 최대한 오래 지켜낼 수 있다.


“···하. 그래, 맞아.”

“······.”

“그럼 애당초 손해뿐인 내기였네? 뭐, 종료 시점도 안 정해서 피차 할 말은 없지만.”


녹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유송이 내뱉은 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이제야 주제 파악을 했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이제 가봐.”

“정말 아무나 죽이고 다니실 작정이십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변하지 않은 태도에,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금세 굳어지고 말았다.


작가의말

복수는... 잘만 하면 상쾌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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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8화. 압도적인 잘생김 24.02.26 29 0 12쪽
57 57화. 법인 관리 +2 24.02.25 28 0 12쪽
56 56화. 장천선 24.02.25 26 0 11쪽
55 55화. 재회 +1 24.02.24 28 0 12쪽
54 54화. 성역 24.02.24 23 0 11쪽
53 53화. 성범죄자 목사 24.02.23 31 0 12쪽
52 52화. 타투도 패션? +1 24.02.23 26 0 12쪽
51 51화. 역겨움 24.02.22 25 0 13쪽
50 50화. 밥 +2 24.02.22 26 1 12쪽
49 49화. 보수적인 남자, 진보적인 여자 +1 24.02.21 31 1 12쪽
48 48화. 게으른 자살 +1 24.02.21 29 1 12쪽
47 47화. 혁명 마렵네 +1 24.02.20 32 1 12쪽
46 46화. 따뜻한 자본주의 +1 24.02.19 30 1 12쪽
45 45화. 따돌림 +1 24.02.16 33 1 12쪽
44 44화. 여고 앞 +1 24.02.15 44 1 13쪽
» 43화. 미련과 후련 +1 24.02.14 40 1 12쪽
42 42화. 절연 +1 24.02.13 39 1 12쪽
41 41화. 이간질 +1 24.02.12 4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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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화. 동료가 되어라 +1 24.02.08 43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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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화. 정신 붕괴 +1 24.02.06 4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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