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문(檀天門)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새글

高礎(고초)
작품등록일 :
2024.05.08 10:22
최근연재일 :
2024.09.20 06:30
연재수 :
111 회
조회수 :
44,416
추천수 :
1,046
글자수 :
629,500

작성
24.09.09 06:30
조회
129
추천
8
글자
13쪽

13-4

DUMMY

한낮, 상황파악을 위해 시장에서 옷가지를 바꿔 입은 그는 다시 장원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출입하는 하인을 납치해 장원에 대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물어본 그녀에 대한 근황. 다행히 그녀는 별원 처소에 무사히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별원에 연금 상태로 갇혀있어 2년간 직접 얼굴을 본 이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더구나 별원 에는 많은 호위무사가 지키고 있어 자신과 같은 일반하인은 일절 접근조차 할 수 없다 했다.


분명한 사실은 아직 꿈에 보았던 악몽과도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련해졌다.

그녀가 갇힌 상태로 지낸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결심을 굳힌 그는 손에 쥔 오색노리개에 입맞춤을 한 뒤 다시 품에 넣었다.


후원 벽을 타고 들어가던 그는 바스락! 기척에 재빨리 정원석에 몸을 감췄다.

소리의 정체는 호위무사들이 낸 미미한 소리였다.

지키는 자는 총 세 명. 두 명은 전각 입구에 다른 한 명은 전각 아래에 각기 몸을 감추고 있었다.


이들이 기척을 내지 않았다면 숨어있는 이들의 위치를 쉽게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예전과 같은 말썽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호위무사들의 무공수준을 떠보니 결코 그의 하수로 보이지 않았다.

특히 전각 밑에 있는 자는 일체의 기척도 없이 마치 본래부터 있던 사물처럼 아무 느낌도 느낄 수 없었다.


지난번 감옥에서 암습했던 자와 비슷한 수준의 셋, 혼자라면 모를까 동시에 세 명을 감쪽같이 제압한다는 건 아직 무리라는 생각에 틈이 발생하길 노리며 지켜봤다.


그가 뚫어지게 보고 있는 곳은 노란 주렴에 가려진 창문. 예전 그가 직접 수리해주었던 바로 그 창이다.


변함없이 자리한 창. 아련히 감기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림자.

창 사이 등잔불에 확대된 굴곡진 여인의 그림자가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삼단처럼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얼굴의 눈, 코, 입. 분명 그녀 영화 소저다.


멍한 시선으로 전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그림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막대 같은 긴 그림자가 천천히 창가에 떠올랐다.


뚱뚜둥~ 땅다당, 뚱땅당!


아름다운 금음(琴音)의 깊고 그윽한 소리가 파도의 골에 너울져 흘렀다.


3음계를 넘나드는 고음과 저음의 자유로운 유영이 지난 시간의 그리움을 포말로 그리며, 심신을 휘감아 빙그르르 돌더니, 맑고 청아한 여인의 옥음에 섞여, 애절한 그리움과 고독한 외로움에 고루 버무려진 후, 밤하늘 빛나는 별에 가닥가닥 흩뿌려졌다.



“행행중행행(行行重行行)! 가고, 가고 또 가신님아!

여군생별리(與君生別離) 생이별의 슬픔만 더 할 뿐이네

상거만여리(相去萬餘里) 만리 밖에 떨어져 생각은 깊고

각재천일애(各在天一涯) 천애가 아득한데 정만 사무쳐

도로조차장(道路阻且長) 만나고자 생각은 간절하지만

회면안가기(會面安可期) 만날 길 아득하니 어이하리오.

호마의북풍(胡馬依北風) 호말은 바람 따라 북을 그리고

월조소남지(越鳥巢南枝) 월새는 남쪽 가지 찾아 깃드네.


헤어져 떠난 지가 날이 오래니, 허리띠가 헐겁게 몸은 여위고

구름은 오락가락 햇볕을 덮고, 한 번 가신님은 올 줄을 몰라

임 생각에 몸은 늙어만 가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가네.

날 두고 가신 임 원망 안 하니, 모쪼록 당신 건강하세요.”

[인용: 작자 미상의 고시]


옥음에 깃든 깊은 우수(憂愁), 영화소저 또한 다시 만나길 간절히 바란 것은 아닐까?


자신처럼 사모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의미를 되짚었다.

반 시진 가까이 이어 흐르던 고운 선율의 노래는 끝이 나고 전각 내 등잔의 작은 불빛만이 창밖을 꿰어 흐릿한 그림자를 내밀었다.


그러나 한껏 고조된 그의 감정은 그리움의 여운으로 잔잔히 남아 쉬 지워지지 않았다.


휘이잉~!


소슬바람 찬 기운에 문득 정신 차린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봤으니 안전은 확인됐다.

문제는 발각되지 않고 저들을 제압하는 일.

팽팽하게 번져오는 긴장을 오색노리개 주무름으로 해소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래! 시작해보자!’


관찰한 지 두 시진 후, 예상대로 시비인 취앵이가 소반에 간식을 받쳐 들고 왔다.


취앵이. 예전에 알던 그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과 살랑살랑 흔들리는 둥근 엉덩이.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풍겼다.


지켜보던 그의 얼굴에 문득 개구쟁이 미소가 번졌다.

휙, 작고 시커먼 무언가가 순간 그의 손을 떠났다.


"어머!"


난데없이 날아든 돌에 발목을 맞은 취앵이가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들고 있던 소반을 와르르 쏟았다.


그릇 깨지는 요란한 소리에 경계 무사가 호통치며 달려왔다.


“무슨 짓이냐!”


무사의 호통을 힐긋 보며 팽욱은 또 다른 돌을 지붕 위를 향해 던졌다.


파삭, 기와 깨지는 소리에 전각을 지키던 다른 무사가 재빨리 지붕 위로 신형을 날렸다.


경계가 흐트러진 빈틈 사이로 빛의 속도로 스며든 그는 즉시 전각 밑 좁은 공간에 몸을 숨겼다.


바람과도 같은 빠른 움직임. 동시에 벌어진 두 가지 소음에 잠시 집중력을 잃었던 매복자는 뒤늦게 침투한 팽욱을 발견하고 검에 손을 뻗었지만, 찍소리도 못 내고 제압당했다.


사내의 옷을 벗겨 입던 팽욱은 좀 전 자신이 시전한 신법의 위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신같은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지붕 위로 올라간 무사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투덜거리며 내려왔고 취앵이를 부축해 일으키던 무사 또한 경계를 서던 곳에 돌아오자마자 전각 아래 위치한 무사에게 수신호를 보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곤 다시 경계에 돌입했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치 않는 그들의 유기적인 움직임. 하나 팽욱이 이들의 수신호를 사전에 면밀하게 파악, 역이용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다.


‘후훗! 좋아! 1단계 작전 성공이다.’


앞으로 두 시진, 이들은 두시진 간격으로 다른 자와 교대한다.

따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시진 안에 일을 끝내고 빠져나가야 한다.

방금 수신호를 주고받았으므로 다음 확인은 반 시진 후다.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면 그 시간 안에 그녀와 상봉한 뒤 구금 등 위기상황이라면 구출까지도 염두에 둬야 했다.


제압한 사내를 그가 경계하던 자리에 그대로 놓고 바닥을 더듬었다. 예전 그녀의 방에 갔을 때 함께 출입했던 비밀장소가 그곳이었다.



“도련님 혹 갑자기 누가 나타나거든 여기를 통해 나가세요. 여기는 저 외엔 아무도 모르는 비밀장소니까요. 알겠죠?”


“안에선 열 수가 없고 바깥에서만 열 수 있어요. 둥근 고리 보이죠? 이 사이에 껴 둔 철편을 잡아 뺀 뒤 당기면 열려요. 아셨죠?”


“예~ 그럼 안에서 비상시 나오려고 만든 게 아닙니까?”


“호호! 그건 따로 있어요. 요건··· 호호, 더 묻지 말아요.”



입술을 막으며 눈을 찡긋 감던 예쁜 그녀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보고 싶다.

서둘러 위를 더듬었다.

철컥! 차가운 감촉의 고리가 잡혔다.

녹이 잔뜩 슨 상태로 보아 오랜 기간 출입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철편을 당기자 붉은 녹이 부스스 꽃가루처럼 떨어졌다.

혹 소리가 들렸을까 앞을 보니 눈치채지 못했는지 움직임이 없다.

열기 전 출구에 귀를 대고 동정을 살폈다.

그녀의 고른 호흡 외에는 다른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소리 나지 않도록 목판에 힘을 줘 밀어 올렸다.

희미하게 비쳐든 빛이 바닥을 타고 시야에 들었다.

주렴의 꾸불꾸불한 주름이 바닥에서 반 치 높이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안쪽, 긴 그림자로 미루어 그녀는 주렴에서 반 장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예상대로 비밀 출구를 주렴으로 막아놓고 있었던 것. 기척을 최대한 죽이며 올라갔다.


"아씨,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다과를 바닥에 쏟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녀, 다시 갖고 오겠습니다."


취앵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먹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돌아가 쉬 거라.”

‘영화 소저!’


한시도 잊은 적 없는 틀림없는 그녀의 목소리다.

가슴이 두근두근 쿵쿵 뛰었다.


"아씨, 그럼 잠자리를 돌봐 드리고 가겠···."

"아니 됐어! 내가 할 테니 넌 그만 돌아가.”


알겠다는 대답 뒤 주렴 걷히는 소리와 걷는 소리, 여닫이문 닫히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다 조용해지는 실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막 주렴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후~우! 이제 어떻게···. 아버님 성화가 이만저만 아닌데···.”


침울한 음성에 멈칫 동작을 멈췄다.

무슨 일일까?

다음 말이 들리길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침묵에 속이 탄 그는 주렴을 살짝 걷고 들여다봤다.


탁자에 다소곳이 앉은 그녀는 멍하니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며칠 전 아버지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 나이 이제 열아홉이다. 너와 정혼자인 혁 도령과의 혼사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너 또한 혁이를 어릴 때 보고 이후 보지 못해 서먹서먹할 것이다만 이 혼사는 네가 태어난 해에 양가 부모가 약조한 것이므로 되 물릴 수도 없다. 아비는 네가 가문의 미래가 달린 이 혼사를 절대 거역하지 않으리라 믿는다만 걱정스러운 건 몇 년 전 있었다던 그 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아비가 듣기로 살인에 도주까지 한 그자와 넌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 현명한 네가 모를 리 없건만 왜 잊지 못해 이렇게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냐!"


"아버님, 저도 제 마음 잘 모르겠어요, 분명, 잊었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다시 제 마음속에 그 사람이 다시 들어 와 있는 거예요. 이성으론 해선 안 된다며 잊겠다, 다짐 또 다짐하지만, 그때뿐 기억을 지울 수 없으니 저도 저 자신 어찌해야 할지 후~우.”


"허~어, 답답한 일이로고···.”

"그 사람이 그렇게 떠나지만 않았어도 깨끗이 잊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로 인해 사람까지 죽이고 온전치 못한 정신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얼마나 고초를 겪고 있을까···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예야, 그건 네가 마음이 너무 여려 그런 것이니라, 그건 남녀의 사랑이 아닌 동정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라. 잊어라! 너도 이제 그 굴레에서 벗어나, 네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흑흑, 아버지!"

"그래, 그래. 다음 달 혼례 때는 행복하고 밝은 모습으로 치러야 한다. 알겠느냐! 그건 너와 이 아비, 우리 가문의 벗을 수 없는 의무요 책무이니라.”


영화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흐리는 아버지의 수심 어린 얼굴에 마음이 아렸다. 결국, 울음으로 답을 대신하는 가녀린 딸의 어깨를 다독인 그는 한숨과 함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만든 업보에··· 너희가 힘들게 살아야 하는구나···.”



영화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했으나 직접 묻지는 못했다.


항상 어둠에 갇힌 아버지는 가족과도 거리를 뒀다.

오죽했으면 먼 이곳에 가족을 두고 홀로 계실까?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사연에 대해 수차례 물었으나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기에 외톨이로 자란 그녀는 오빠에게 의지해 부족한 가족 사랑을 채워야 했다.


오빠는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하지만 오빠 역시 입을 열지 않는 건 마찬가지.

호위무사들의 정체 역시 물었으나 혹여 있을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한 인력이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진실은 자신의 성씨가 서문씨라는 것 그러나 남들에겐 본성을 감추고 다른 성씨로 속여야 하는 괴로움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자신과 혼사가 예정된 손혁은 천무문의 전 문주인 손정의 장남으로 천무문의 대를 이어 차기 문주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다른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과정에서 맞이한 4년 전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 활력소가 되었음은 물론, 소녀의 갇혔던 방심이 세상을 향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단천문(檀天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평일 연재 시간은 오전 6시 30분입니다 24.05.14 554 0 -
111 14-5 NEW 6분 전 0 0 13쪽
110 14-4 24.09.19 58 8 14쪽
109 14-3 24.09.18 74 6 13쪽
108 14-2 24.09.16 105 7 14쪽
107 14-1 24.09.13 120 8 12쪽
106 제 14 장 흑천단과의 악연 24.09.12 121 9 12쪽
105 13-6 24.09.11 127 8 13쪽
104 13-5 24.09.10 128 9 13쪽
» 13-4 24.09.09 130 8 13쪽
102 13-3 24.09.06 138 9 13쪽
101 13-2 24.09.05 141 10 12쪽
100 13-1 24.09.04 150 9 11쪽
99 제 13 장 다시 만난 그리운 여인 24.09.03 159 10 12쪽
98 12-6 24.09.02 164 9 17쪽
97 12-5 24.08.30 175 9 17쪽
96 12-4 24.08.29 164 9 14쪽
95 12-3 24.08.28 155 8 12쪽
94 12-2 24.08.27 161 9 12쪽
93 12-1 24.08.26 166 10 11쪽
92 제 12 장 새로 찾은 조부(祖父), 그러나 24.08.23 187 10 12쪽
91 11-11 24.08.22 180 7 13쪽
90 11-10 24.08.21 178 8 16쪽
89 11-9 24.08.20 184 8 12쪽
88 11-8 24.08.19 182 9 12쪽
87 11-7 24.08.16 195 9 12쪽
86 11-6 24.08.15 195 8 12쪽
85 11-5 24.08.14 197 11 12쪽
84 11-4 24.08.13 199 11 11쪽
83 11-3 24.08.12 205 1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