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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낙타3
작품등록일 :
2024.05.3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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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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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DUMMY

다음날, 이른 새벽.


땅굴 속에서 잠들어 있던 사내가 문득 몸을 뒤척인다. 부스스 눈을 뜬 우진은 멍한 눈으로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잘 잤다.’


아무런 꿈 없이 편하게 자고 일어났다.

이런 숙면이 너무 오랜만이라 내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느낌.


지난 12년간 우진은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해본 적이 없었다.

잠이란 건 꿈과 현실 두 세계를 오가는 수단일 뿐. 평소 같았으면 잠드는 순간, 우진은 곧바로 현실 세계에 돌아가서 출근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어제 현실 세계의 우진은 죽었다. 덕분에 그의 정신이 돌아갈 곳이 없어서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된 듯하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사실상 사망 선고와도 같은 상황.

그렇지만 간만에 잠을 푹 자서 컨디션이 좋다. 이 윤택함의 대가로 현실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살짝 오묘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야지.’


대충 결론 내린 우진이 땅굴 밖을 향해 기었다. 손을 뻗어 입구를 막고 있던 방패를 앞으로 밀어 치웠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얼굴에 와닿았다.


밖으로 나온 우진은 방패 위에 펴 발라둔 진흙과 마른 이끼를 뜯어냈다.


땅굴은 다른 맹수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렇기에 우진은 흙을 묻혀둔 방패로 입구를 막았다. 이러면 외부의 맹수들이 출입하는 걸 방지하고, 은신처의 입구가 주변 환경에 녹아들게끔 위장할 수 있었다.


우진은 머물렀던 흔적을 발길질하여 지운 후 짐가방을 짊었다.


‘출발해 보자.’


늘 그래왔듯 그늘이 옅은 곳을 향해 무작정 나아갔다. 이곳보다 더 안전하고,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는 땅을 찾아서.


숙면을 취한 덕분에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지만, 불필요한 소음을 내는 건 좋지 못한 짓이니 자중했다.


그렇게 우진은 걷고 또 걸었다. 그가 떠나온 곳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좀 출출한데.’


빈속으로 한참을 걷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자. 우진은 대충 흙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짐가방을 뒤적여 어제 먹다 남겨둔 음식을 꺼냈다. 구워진 박쥐의 날개. 우진은 그것을 한 입 뜯어먹었다.


‘어제 먹었던 부위보다 더 질기군···’


박쥐의 날개 피막은 지독하리 질겼다.

씹히는 질감은 미역 줄기 같았고, 잔뼈가 많아서 먹기 매우 고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얻기 힘든 귀한 식량이다.


오독오독.


우진은 작은 뼛조각까지 버리지 않고 꼭꼭 씹어 삼켰다. 강아지 간식을 먹는 듯한 기분. 그래도 계속 씹으니 나름대로 고소한 맛이 있었다.


박쥐 날개와 한참 씨름하던 중, 문득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떤 놈이지?’


습관적으로 칼자루를 쥐며 고개를 돌렸다. 직후 우진은 주변을 얼쩡거리던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온몸에 붉은 털이 자라난 대형견. 놈의 등에는 기다란 촉수 두 줄기가 자라나 있다. 촉수 끝에 돋아난 뼛조각은 멧돼지의 엄니처럼 크고 날카로웠다.


‘뭔가 했더니, 들개였나.’


우진은 저런 짐승들을 그냥 들개라고 불렀다. 습성이나 행동이 평범한 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등에 촉수가 돋아나 있고, 일반적인 개보다는 조금 더 호전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꽤 귀여운 축에 속하는 짐승이었다.


‘······배가 고픈 건가.’


들개의 두 눈이 우진의 손에 들린 박쥐 날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우진은 저 시선을 무시하고 식사를 마저 이어갔겠지만, 오늘은 잠을 깊게 잔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일용할 양식을 기꺼이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자, 먹어라.”


우진은 박쥐 날개를 쭉 찢어서 던져줬다. 들개는 고기에 코를 박고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직후 그것을 입에 넣고 몇 번 씹는다.


퉤.


들개가 박쥐 날개를 툭 뱉었다.

녀석은 흙바닥 위에 떨어진 고기를 잠시 쳐다보더니, 곧 외면하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딴 건 음식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저 개새끼가?


뭐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자리에서 일어난 들개가 숲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우진은 멍한 눈으로 박쥐 날개를 내려다본다. 이걸 개도 거른다니··· 난 지금껏 개밥만도 못한 음식을 먹어온 건가?


좀 어지러웠다.

그래도 귀한 식량을 버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우진은 남은 박쥐 날개를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


‘······슬슬 움직여볼까.’


입맛이 없어서 대충 먹어치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가방을 둘러맨 우진이 다시 걸음을 떼었다.


산비탈이 꽤 가파르다. 거기에 바닥이 온통 낙엽과 이끼로 뒤덮여 있어서 넘어지기 좋은 환경. 덕분에 우진은 매 순간 신중히 발을 내디뎌야 했다.


그러던 중···


‘뭐지 이건?’


불현듯 우진이 멈춰 섰다. 발을 내딛으려던 곳에 낙엽이 불룩하게 쌓여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우진은 발치에 놓여 있던 돌멩이 하나를 툭 차서 밀었다. 돌멩이가 굴러가며 쌓인 낙엽 무더기를 헤집는다.


콰악!


한 쌍의 톱날이 빈 허공을 깨물었다. 밟으면 작동하는 곰덫이었다.


‘발목을 다칠 뻔했군.’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진은 흙바닥 위의 덫을 빤히 응시했다.


쇠로 만들어진 곰덫.

금속 특유의 광택이 선명했다. 겉에 녹이 슬거나 곰팡이가 자라나지도 않은, 꾸준히 관리 받아온 흔적이 엿보이는 물건.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다른 생존자의 물건이다.’


우진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당혹스러움과 전율이 뒤섞인 듯한 감정.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긴 했다. 하지만 그 흔적을 실제로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진은 고민에 잠겼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 자리를 떠나거나, 혹은 덫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거나.


후자의 경우 꽤 위험한 선택지였다.

아포칼립스 영화 같은 것들을 보면,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괴물 못지않게 흉악한 존재로 표현되곤 한다.


비록 창작물에 불과하지만 우진은 영화 속 표현이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인간다움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겠지.’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의 흔적. 이걸 못 본 척 지나치는 건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 결론 내린 우진은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지면을 비롯한 자연환경에 남아 있는 인간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온 사방에 덫을 깔아놨군.’


발자취를 쫓아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그 빈도가 잦아졌다. 마치 지뢰밭에 들어온 듯한 기분. 숨어 있는 덫을 찾아내기 위해 우진의 시선이 절로 바빠졌다.


‘많다, 많아··· 이거 손이 많이 갔겠어.’


덫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이끼와 곰팡이가 쌓이면 덫이 제 기능을 상실한다. 들짐승이 건드려서 망가트리는 경우도 잦고.


이토록 많은 덫을 설치해둔 이유가 뭘까?


적어도 사냥이 목적은 아닌 듯했다. 눈에 띄는 덫들은 하나같이 미끼가 걸려 있지 않았고, 한 지역에 덫을 밀집하여 설치하는 건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니까.


‘어쩌면 나 같은 놈이 침입하는 걸 막으려고 덫을 깔아둔 걸지도 모르겠군.’


만약 그럴 의도로 덫들을 설치해둔 게 맞다면 실패라고 평할 수 있겠다.

다른 존재들을 쫓아내기 위해 설치한 덫이, 그냥 지나가려던 우진의 관심을 끌어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으니까.


낡은 오두막이 하나 보인다.

잿빛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은 벽돌집. 벽을 타고 자라나는 검회색 덩굴 식물들이 집 전체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집 주변에는 들개 가죽 몇 장이 거치대 위에 펼쳐져 있었다. 보아하니 무두질 된 가죽들을 건조 중인 것으로 보였다.


‘······인기척이 들리질 않네.’


아무래도 오두막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거나 낮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우진은 무장을 갖추었다. 방패와 마체테를 두 손에 각각 말아쥔 후 오두막을 향해 접근한다. 직후 대문 앞에 선 그는 살짝 고민했다.


‘노크라도 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 노크를 하든, 안 하든 상대방이 이쪽을 반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우진은 그냥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끼이이익—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오두막이 그리 넓지 않아서 내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없군.’


우진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라 그런지 내부도 그리 번듯하진 않았다. 바닥 곳곳 흙먼지가 널브러져 있고 천장은 구석마다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낡은 소파 위에 개어진 칙칙한 빛깔의 이불. 소파의 솜이 내려앉은 형태를 보아, 집주인은 이 물건을 침대 대용으로 사용해온 듯했다.


그 볼품없는 소파 머리맡에 놓여있는 물건이 우진의 이목을 끌었다.


‘······책이잖아?’


거의 백과사전 분량은 될 만큼 두꺼운 책. 그것을 집어 든 김우진은 표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 유르기스의 마경 견문록. ]


왠지 제목 속 마경이란 단어가 우진이 줄곧 살아왔던 이 환경을 의미하는 듯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우진의 눈이 책 표지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지금껏 악몽에 시달리며 품었던 수많은 의문들. 어쩌면 이 책 속에 그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이 책을 펼쳐 정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밖에 손님이 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진이 손님이고, 저 사람은 집주인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로가 상대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점이리라.


“나오너라. 어떤 놈인지 낯짝을 좀 보자.”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요구에 응하여 우진은 책을 소파 위에 던져둔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손에 활을 든 노인이 이쪽을 응시한다.

시허연 머리칼은 정돈되지 않아 엉망으로 뻗쳤고, 몸에 두른 옷은 짐승의 가죽을 대충 기워서 만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우진의 행색 또한 노인과 큰 차이가 없는 상태. 덕분에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의 모습은 산짐승 두 마리가 대치하고 선 듯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라. 말만 잘 들으면 사람 대접은 해주마.”


노인이 그리 말하며 활을 겨누었다. 시위에 걸린 화살이 스산하게 빛났다.


하지만 우진은 그 협박을 듣고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웠다. 이 세계에서 인간과 대화해보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신선하달까.


마주한 대화 상대의 얼굴을 골똘히 살펴봤다.


‘얼굴색이 좋지 않네.’


노인의 안색이 왠지 창백해 보였다. 어딘가 몸이 불편한 모양.


“······어르신, 서로 좋게 갑시다. 보아하니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신 것 같은데.”


우진이 선심 쓰듯 말했다. 그 태도가 우스운지 노인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이거 참신한 놈일세. 이놈아, 지금 너의 목숨이 누구 손에 들려있는지 모르는 게냐?”

“내 명줄은 꽉 쥐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그리 말한 우진은 보란 듯이 왼손의 방패를 들어 보였다. 활을 쏠 기미가 보이면 방패를 앞세운 채로 달려들 생각이었다.


노인이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러면 어쩌려고?”


키잉!


이명처럼 귀를 찌르는 소음. 그리고 화살촉이 달궈진 쇠처럼 붉게 빛난다.


“오···”


우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살촉을 관찰했다.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빛. 이쪽 세계의 인간은 저런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건가.


크게 놀랍지는 않은 일이다.


‘······남 얘기가 아니니까.’


김우진이 믿는 건 방패 따위가 아닌 그가 지닌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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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유르기스. +4 24.09.11 3,795 162 12쪽
23 세 번째 눈. +8 24.09.10 3,884 157 12쪽
22 기이한 재주. +5 24.09.09 3,914 161 13쪽
21 형제. (3) +7 24.09.06 3,914 162 12쪽
20 형제. (2) +5 24.09.05 3,897 163 12쪽
19 형제. (1) +6 24.09.04 3,989 153 14쪽
18 기이한 죽음. +8 24.09.03 4,068 149 13쪽
17 카르마. +10 24.09.02 4,104 168 13쪽
16 은둔자들. +3 24.08.30 4,221 156 13쪽
15 별명. +8 24.08.29 4,300 16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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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환영. +7 24.08.27 4,461 182 12쪽
12 난해한 조언. +4 24.08.26 4,551 162 12쪽
11 채석장의 마수. (2) +8 24.08.23 4,592 183 12쪽
10 채석장의 마수. (1) +3 24.08.22 4,682 176 12쪽
9 이름. +10 24.08.21 4,767 193 12쪽
8 개척단. +6 24.08.20 4,896 187 12쪽
7 늑대. (3) +7 24.08.19 4,914 205 12쪽
6 늑대. (2) +6 24.08.17 4,971 182 12쪽
5 늑대. (1) +9 24.08.16 5,126 18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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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 +8 24.08.14 5,674 180 12쪽
2 흉물. +10 24.08.13 6,804 19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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