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판타지의 고인물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새글

쌍봉낙타3
작품등록일 :
2024.05.31 00:06
최근연재일 :
2024.09.19 17: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128,737
추천수 :
4,934
글자수 :
166,865

작성
24.08.15 17:00
조회
5,171
추천
170
글자
12쪽

다크판타지.

DUMMY

두 사내가 슬슬 옆으로 잰걸음 치며 서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우진은 번쩍이는 화살촉을 특히 눈여겨봤다. 스산한 빛이었다. 마치 먹잇감을 홀리는 아귀의 초롱불처럼.


‘방패로는 못 막겠군.’


저 화살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지만 상관없다.

마체테를 말아 쥔 우진이 몸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기울인다. 대충 견적을 잡았으니 몸으로 직접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찰나···


돌연 화살촉에 맴돌던 빛이 꺼졌다. 노인이 활을 거두었다. 이를 본 우진은 의문을 표한다.


“······노인장. 갑자기 왜 활을 내려놓는 거요?”

“솔직히 부담스럽군. 이대로 끝까지 가면 나도 피를 봐야 할 것 같으니.”


대화를 좀 해보세.


노인은 그리 제안하며 바닥에 앉았다.

보아하니 겁을 줘서 침입자를 쫓아내려 했는데, 우진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 협상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한바탕 싸움질을 하게 될 듯하여 살짝 끓어오른 상태였건만. 상황은 의외로 싱겁게 무산되었다.


‘뭐··· 오히려 좋다고 봐야겠지. 저 노인을 죽이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으니.’


우진은 이 세계에서 온갖 생명체를 도축했지만 살인은 아직 해본 적 없다.

정확히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흔치 않은 조우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질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헥터라고 하네.”


노인이 대뜸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통성명을 하자는 듯했기에 우진은 선뜻 대답한다.


“제 이름은 김우진입니다.”

“기무—진···? 꽤 특이한 이름이군. 발음하기도 어렵고.”


헥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한국식 이름은 이 세계에서 이질적이게 들리는 모양.


“편하실 대로 부르세요.”

“간단히 ‘진’이라 부르겠네. 이봐 진. 흙 묻은 발로 오두막에 무단 침입을 한 건 그냥 넘어갈 테니, 순순히 내 영역에서 나가줄 수 있겠나?”


헥터는 낯선 불청객이 빨리 이곳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눈치였다. 오래 말을 섞기도 싫어하는 듯하니, 뜸 들이지 않고 목적을 밝혀야겠다.


우진은 손짓하여 등 뒤의 오두막을 가리켰다.


“저 안에 좋은 책이 한 권 있던데. 그걸 제게 판매하시면 군말하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마경 견문록을 말하는 겐가?”

“예.”

“안 돼.”

“······.”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

우진의 표정이 떨떠름해지자, 이를 본 헥터는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여보게 진. 그 책은 내 것이 아니야. 빌려온 물건이라 함부로 양도해선 안 돼.”


반환 의무가 있는 물건이라면 섣불리 넘길 수 없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던 우진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책을 잠시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용을 한 번 훑어본 후 돌려드리겠습니다.”

“학구열이 참 대단하군. 고작 책 하나 때문에 이리 귀찮게 굴다니··· 어쩔 수 없지.”


푹 한숨을 내쉰 헥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두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문을 닫지 않고 열어둔 걸 보아 곧 돌아올 듯했다.


그리 판단한 우진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오두막 안쪽에서 노인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겐가?”


따라 들어오란 의도로 문을 열어놓은 거였나.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헥터는 방바닥에 앉아 화살을 다듬고 있었다. 그는 곁눈질하여 우진이 들어온 걸 확인하더니, 소파 머리맡에 놓인 책을 향해 턱짓했다.


“저기 앉아서 책이나 읽고 있게.”


그리 말한 헥터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이 없고, 이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배짱이 대단하군.’


우진이 마음만 먹으면 마체테로 헥터의 머리를 찍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저리 태연한 걸 보면, 우진의 성품을 믿는 것이거나··· 혹은 이 상황에서 기습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단 뜻이겠지.


굳이 우진을 오두막 안으로 들인 것도, 책이 도난당하는 걸 막기 위해 근처에서 지켜보기 위함인 듯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이제 와서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다. 우진은 소파 머리맡의 책을 집어 들었다.


[ 유르기스의 마경 견문록. ]


아까 눈여겨 봐두었던 책. 우진은 낡은 의자에 앉은 채로 그것을 펼쳐 들었다.


[ 이 견문록은 교단 연맹의 성기사, 유르기스가 생전에 쓴 글과 입에 담았던 말들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마경에 발을 들이고 싶다면 이 책에 담긴 지식을 숙지하라. ]


첫 문장부터 낯선 단어들이 눈에 띈다.


‘교단 연맹···?’


이게 뭘까.

턱을 긁적이던 우진은 슬쩍 곁눈질하여 헥터를 보았다. 헥터는 저만의 일을 하느라 한창 바쁜 듯했다.


‘······질문은 나중에 해봐야겠네.’


마음 같아선 궁금한 것들을 바로 질문하고 싶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질문거리가 계속 생겨날 게 분명했다. 우진은 현재 배경지식이 없다시피 한 상태이므로.


그럴 때마다 몇 번이고 질문을 해대면, 귀찮다는 이유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이 책을 한 번 완독해 봐야겠다.

낯선 단어더라도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가에 부연 설명이 적혀 있기 마련.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맥락상 그 뜻을 유추할 수 있을 터였다.


‘다행히 배경 설명이 아주 자세하군.’


우진은 책에 쓰여진 글귀들을 찬찬히 읽어봤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원래 이 세상은 꽤 풍요로운 곳이었던 듯하다. 공기 좋고, 볕 잘 들고, 물도 깨끗하고···


하지만 늘 그렇듯 사람의 욕망이 문제였다.


북부에 한 왕국이 있었다.

한때는 제국이라 불릴 만큼 융성한 세력을 지녔던 나라. 그러나 세대가 지날수록 그 힘과 영향력이 점차 쇠락했다.


약화된 국력은 영토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주요 영지와 곡창 지대를 모조리 잃고 대륙의 북쪽 끄트머리까지 밀려난 왕국.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으려면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국왕의 관심이 향한 곳은 북부의 고대 유적이었다.


잊혀진 시대의 유적.

그 지하 깊숙한 곳에 거대한 균열이 하나 있었다. 고집스러운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균열. 전승에 의하면 그건 일종의 문이었다.


이계의 문. 그 문틈 너머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만물을 아우르는 진리가 잠들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승이기에 이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몇 없었다. 국왕은 그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유적 연구를 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유적을 조사해 보니 값진 유물과 귀중품들이 여러 장소에 숨겨져 있었고, 발견된 룬 문자를 번역한 결과 먼 옛적 소실되었던 고대 마법까지 복원해낸 것이다.


전승이 옳았다. 문을 열고, 그 너머의 힘을 손에 쥐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왕은 엄청난 돈을 유적 연구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국가 단위의 예산이 들어간 덕분에 연구 속도는 탄력이 붙었다. 오랜 시간 비밀리에 진행된 연구는 국왕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즈음 완성되었다.


문이 열린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재앙이 시작된다.


균열 너머에 있던 건 재와 곰팡이, 그리고 흉측한 생김새의 괴물들뿐이었다.

놈들이 떼를 지어 우리의 세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 침범 속도가 이상하리 빨랐다. 마치 저 너머에서 문이 열려오기만을 줄곧 기다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고작 9년 만에 인류는 북부를 잃었다.

역병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마경.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각국의 종교 수장들이 뜻을 합하여 ‘교단 연맹’을 창설했다.


남하하는 마경을 막기 위해, 교단 연맹의 주도하에 인류는 장벽을 쌓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 시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합군은 간신히 마경으로부터 인류의 마지막 터전을 지켜냈다.


이는 방벽의 지리점 이점과, 마수들이 지닌 태생적인 한계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균열에서 멀어질수록 마수들은 점차 힘을 잃고 약해진다. 그렇기에 강한 힘을 지닌 마수일수록 남하를 꺼리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대단한 집중력이구먼.”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 우진의 정신을 일깨웠다.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손에 뭔가를 쥔 헥터가 이쪽을 구경하듯 보고 있었다.


“자, 받게.”


헥터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우진은 엉겁결에 그걸 넘겨받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뜨뜻한 온기.


그것은 나무 그릇에 담긴 스튜 한 사발이었다.


“······이걸 왜 주시는 겁니까?”

“손님을 굶길 순 없지.”


헥터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는 대충 소파에 앉고선 스튜를 그릇째 들고 퍼먹었다.


우진은 손에 들린 스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걸쭉한 국물 위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채소와 고기 조각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연신 찔렀다.


‘······일단 먹고 생각하자.’


우진은 나무 숟가락으로 스푼을 한 입 떠먹었다. 담백한 채소와 쫄깃하게 씹히는 고기. 냄새만큼 맛이 기막혔다.


감탄이 표정으로 새어 나간 걸까. 우진의 얼굴을 본 헥터가 피식 웃었다.


“남이 준 음식을 잘도 집어 먹는구나.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쩌려고.”


우진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복어 요리를 먹는 셈 치죠.”

“복어? 그걸 먹는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얼핏 듣기론 맛이 아주 좋답니다.”


우진도 복어를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다.


“신기하군. 독 생선을 먹는 놈들이 있다니···”


헥터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스튜를 한입 더 퍼먹었다.


시답잖은 이야기와 스튜 덕분에 분위기가 살짝 느슨해졌다. 우진은 이 기회를 살려 헥터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궁금한 걸 몇 가지 질문해도 됩니까?”

“응답할지는 듣고 결정하지. 말해보게.”


우진은 줄곧 읽었던 책을 향해 턱짓했다.


“이 책,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만 기록해둔 겁니까? 역사적인 사실이라 보기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요.”

“내가 알기론 그렇다네. 그 책에 담긴 건 여러 번의 교차 검증을 거쳐서 신뢰할 만한 정보야. 교단 연맹이 직접 출간한 물건이라 고증에 각별히 신경 썼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헥터의 확언이 돌아왔다.

그 대답에 우진은 생각에 잠겼다. 책의 내용이 예상하던 것보다 더 이질적이기 때문이었다.


‘고대 마법, 성기사, 제국···’


이질적이지만 낯설진 않다.


‘······게임을 할 때 자주 듣던 단어들인데.’


젊은 시절의 김우진이 했던 RPG 게임에 이런 단어가 자주 쓰이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까 책을 읽을 때도 게임의 설정집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사서라곤 믿기 어려운 내용의 서적.


하지만 헥터는 이 책이 실제 있었던 역사를 다룬 물건이라 확언했다.

이 대답은 우진에게 한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 왜, 소설 같은 걸 보면 이런 상황이 종종 있지 않은가.


‘내가 판타지 세계 속에 떨어진 건가?’


트럭에 치인 후 다시 눈을 떴더니, 다른 세계에 오게 되었다··· 라는 느낌의 전개.


게다가 이 세상은 평범한 판타지가 아니다.

검과 마법, 균열, 재앙적인 사고, 그로 인해 나타난 괴물들에게 밀려 쇠퇴해가는 인류. 이 모든 걸 합친 세계관을 흔히 칭하길···


‘······다크판타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다크판타지의 고인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월~금, 오후 5시 연재 예정입니다. 24.08.12 2,653 0 -
30 늑대 무리. NEW +5 9시간 전 1,559 103 13쪽
29 귀물. +12 24.09.18 2,770 151 13쪽
28 영입 제안. +7 24.09.17 3,249 133 15쪽
27 잔업. +6 24.09.16 3,298 147 12쪽
26 부자가 되는 법. +14 24.09.13 3,857 166 12쪽
25 사냥꾼. +13 24.09.12 3,710 167 12쪽
24 유르기스. +4 24.09.11 3,698 159 12쪽
23 세 번째 눈. +7 24.09.10 3,788 156 12쪽
22 기이한 재주. +5 24.09.09 3,820 159 13쪽
21 형제. (3) +7 24.09.06 3,824 161 12쪽
20 형제. (2) +5 24.09.05 3,807 162 12쪽
19 형제. (1) +6 24.09.04 3,894 153 14쪽
18 기이한 죽음. +8 24.09.03 3,970 146 13쪽
17 카르마. +10 24.09.02 4,005 165 13쪽
16 은둔자들. +3 24.08.30 4,115 153 13쪽
15 별명. +8 24.08.29 4,199 159 12쪽
14 황금충 볼프. +11 24.08.28 4,381 165 12쪽
13 환영. +7 24.08.27 4,352 176 12쪽
12 난해한 조언. +4 24.08.26 4,436 157 12쪽
11 채석장의 마수. (2) +8 24.08.23 4,468 177 12쪽
10 채석장의 마수. (1) +3 24.08.22 4,556 171 12쪽
9 이름. +9 24.08.21 4,631 189 12쪽
8 개척단. +6 24.08.20 4,756 184 12쪽
7 늑대. (3) +7 24.08.19 4,766 201 12쪽
6 늑대. (2) +6 24.08.17 4,815 177 12쪽
5 늑대. (1) +9 24.08.16 4,969 178 12쪽
» 다크판타지. +6 24.08.15 5,172 170 12쪽
3 조우. +8 24.08.14 5,479 177 12쪽
2 흉물. +10 24.08.13 6,570 193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