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 그리고 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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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산
작품등록일 :
2024.06.02 16:58
최근연재일 :
2024.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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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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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DUMMY

4.

강변북로로 접어드는 동안 두 번의 음주 측정이 있었다.

대리 기사라고 신원을 밝혀도 경찰들은 부득불 측정기를 가져다 댔다. 양 볼이 아릿했다.


한참 동안 자기 자랑으로 너스레를 떨던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도 바깥 경치를 감상하거나 피로감에 좀 쉬려는 모양이었다.


성수는 차 안이 조용해지자 조심스럽게 라디오를 켰다.

비가 오는 분위기에 맞춰서 낮고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차 안을 메워왔다. 성수는 소리 내지 않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불렀다. 마치 돈 자랑하던 남자에게 자신의 교양 수준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나오는 음악마다 침을 꼴깍 삼키고는 가볍게 운전대를 두드리면서 따라 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아내와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했다. 헤어진 지 2년만이었다.


두 사람의 이별은 싱겁고도 어이없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그와 그녀는 사랑을 잘 키워가고 있었는데, 함께 친구들을 만난 술자리에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술에 취한 친구들이 짓궂게 굴었고, 성수는 웃음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한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말다툼 끝에 성수는, 남자는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라는 우습지도 않을 치기어린 말을 했고, 헤어지자며 돌아선 그녀를 따라잡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술김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녀는 수분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직장도 그만 두었고, 전화번호도 사라져 버렸다. 그는 진심어린 후회를 했다. 술을 끊었고, 한동안 그녀에 대한 환상으로 편집증상까지 나타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병치레를 하던 아버지마저 끝내 돌아가시고서야 그는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속도 좀 냅시다. 이렇게 해서 언제 집에 들어갑니까?”


갑자기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속력을 독촉했다. ‘제주도의 푸른밤’이 절정을 향하던 시점이었다.


“빗길이라서 그렇습니다. 손님. 이런 날엔 안전운전을 해야죠. 아까 친구분도 안전운전을 부탁하셨잖습니까?”


“친구? 그 자식이 뭔 친구라고······. 아하, 대리비를 그 자식이 내줬다고 그러는 거요?”


“예? 천만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장님이 차주이신데······.”


성수는 매우 아니꼬웠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인심이라지만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러지 말고 저쪽 끝에 차 세워요. 이렇게 해서야 원······.”


성수는 뜨악한 기분이었다.

차를 세우라니······. 어이가 없었다. 음주 측정 구간은 지났으니 더 이상 필요 없다는 투였다. 아니꼬운 마음에 그에게 빈정거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여기에서 그만 돌아가라면 이만 저만 난처한 꼴이 아니었다. 성수는 일단 차를 세웠다. 그는 막무가내였다.


“손님, 이러시면 큰일 납니다. 이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건 손님께도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잖습니까?”


“됐고, 원래 나는 내 차를 아무에게나 맡기는 사람 아니야. 사실 내 차는 담당 대리기사가 있어. 오늘은 그 자식이 대리를 불러서 당신이 걸린 거야.”


이젠 숫제 반말이었다. 간혹 대리 기사와 손님 간에 언쟁이 생기는 일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는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는 성수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성수는 일단 상대를 진정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앉았다. 남자는 성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참는 것 같았다.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한밤중 고속도로 위였다.


“좋아. 일단 일산 입구까지는 태워다 주지. 내가 아무리 뭣 같은 놈이라고 해도 여기서 가라고는 안하겠어.”


마치 커다란 인심을 쓰는 것처럼 말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성수는 부랴부랴 안전벨트를 맸고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았다.


성수는 가슴이 콱 막혀왔다.

무엇인가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남자는 운전대를 쥐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어 봤지만 이렇다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차량의 속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제한속도를 넘어섰고 느낌으로도 시속 120킬로는 됨직했다.


“손님, 빗길입니다. 너무 빨라요. 속도를 줄이셔야······.”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뭘 그리 잘났다고 참견이야? 이 길로만 10년째야. 아직 한 번도 사고 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구. 날 뭘로 보구······.”


“속도 좀 줄여보세요. 정 이러시면 음주운전으로 고발하겠습니다.”


성수는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이 있다는 다른 대리 기사들이 언젠가 알려줬던 대처 방안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종의 협박이지만 대개는 순순히 운전대를 넘겨준다고들 했다.


“그래? 좋아. 고발하라구. 경찰, 까짓거 벌금 내지 뭐. 그런다고 내가 굴복할까봐? 어림없는 수작이지. 이 동네 경찰들 죄다 나한테 술 한 잔 안 얻어먹은 작자 없을 걸?”


오히려 남자는 오기가 발동한 듯했다. 성수는 낭패스러웠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차가 휘청하며 흔들렸다.

수막현상으로 바퀴가 미끄러지는 모양이었다. 앞쪽의 진입로에서 트럭이 내려오고 있었다. 트럭이 속도를 줄인다면 그대로 통과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트럭과 부딪힐 것이 틀림없었다. 성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트럭을 보았는지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작심한 듯 이내 급가속 페달을 밟았다.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르메가 살고 있는 곳’ 라디오의 노래는 엔딩에 접어들었다.


성수가 아내를 다시 만난 것은 선배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신부측 하객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를 보자 성수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무릎부터 꿇었다. 아내는 당황했고, 성수는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리면 안 되겠느냐며 눈물로 호소했다. 결혼해 달라고,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와도 만날 수 없다고 매달렸다.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상황을 헤아리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성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눈물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트럭의 후미를 들이받은 것 같더니 차량이 그대로 회전을 했다.

남자는 의자에서 미끄러져 몸이 핸들 밑으로 꺼져드는 것 같았다. 성수는 손잡이를 잡고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무엇엔가 육중하게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고 안전벨트를 맸음에도 성수의 몸은 앞쪽으로 심하게 쏟아졌다. 글로브 박스인지 앞 유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에 머리가 부딪혔다가 튕겨졌다.


의식이 물속에 잠기는 요트처럼 가만 가만히 꺼져갔다.

의식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것이나 잡아당겼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고, 그의 몸이 문 쪽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열렸던 문이 강하게 닫히면서 그는 다시금 머리를 부딪혔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기름 냄새인지 타르 냄새인지 무엇인가 타는 듯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는 가까스로 안전벨트에서 빠져나오다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죽는다는 생각보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빗물이 얼굴을 적셨고, 누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은주는 조심스럽게 병실의 문을 열었다.

‘중환자실’ 병실 입구에 붉은 글씨로 쓰인 표지를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올라왔다. 남편은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얼굴은 온통 붕대로 둘러져 있었고 갖가지 기계들과 호스가 그의 현재 상태를 말해 주는 듯 얼기설기 놓여 있었다.


벌써 3주가 지나가 버렸다.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도착했던 날, 담당 의사는 살아날 확률이 40퍼센트 미만이라고 단정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게 차라리 낫다고, 부부도 아니면서 부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느냐고 스스로 위로하면서도 까닭 모를 설움에 받쳐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2주가 지나면서 의사는 희망이 있다며 그녀를 찾았다.

살아날 희망이 있다고······. 도대체 뭐가 희망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의사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미국에 있다는 친구까지 초청해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도대체 뭐가 더 아쉬웠던 걸까? 남편은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의식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엔 저희들도 뇌사 판정을 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뇌의 절반 이상이 손상을 입은 상태여서······, 그런데 갑자기 뇌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친구이자 뇌공학 전문가인 존스 최의 공이 큽니다. 아, 물론 그전처럼 완전히 회복될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건 이분이 깨어나 봐야 알게 되겠지요.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생물학적으로 살아난다고 해도 의미적으론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앞으로 수일 내에 의식이 돌아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부인께서도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망할 의사 같으니······. 되긴 뭐가 돼? 은주는 기름기가 흐르는 의사의 번들거리는 얼굴을 떨쳐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살아나선 안 된다. 그가 살아있는 것이 죽은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면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아 주길······.


그녀는 천천히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간호사가 방금 다녀갔는지 차트에 몇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 앞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눈을 감고 간신히 호흡하고 있는 사람.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남편이 밉기만 했다.


남편의 전화기는 어느 술집에 있었다.

마담인 듯한 여자가 여우같은 눈웃음을 하고는, 어머 사모님이 이렇게 미인이신 줄 몰랐네요, 하며 그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고가 있었던 날, 술에 많이 취하셨던 모양이라며 휴대폰을 두고 가셔서 다음날 찾으러 올 줄 알았는데 며칠 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었다며, 듣고 싶지도 않은 걱정과 너스레, 그리고 동정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소리, 안됐네요. 어쩌면 좋아요. 참 좋은 분이셨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미인이신데 어떻게 그런 일이······.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은주는 부아가 치밀어 다시금 남편을 노려보았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전선과 호스들. 이것들 중의 어느 하나만 끊어져도 그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호스들 중의 두어 가닥을 손에 쥐었다. 조금 힘을 주자 어느 기계에선가 부웅- 하며 신호음이 울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툭, 호스를 내려놓았다.


남편이 죽도록 싫고 미웠지만 살인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살아난다면 살아나는 대로 그것도 운명일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이혼을 하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이의 부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어서 깨어나라. 깨어나서 내가 내미는 이혼 서류에 욕지거리를 하며 서명을 하라구.


은주는 문을 닫고 병실에서 나왔다. 기를 쓰고 살아나는 사람을 어찌 이기겠는가. 마음을 다잡자 한결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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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9.07 6 0 12쪽
16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8.31 6 0 13쪽
15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24 6 0 8쪽
14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17 8 0 11쪽
13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7 8 0 10쪽
12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6 0 12쪽
11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5 0 11쪽
10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7.28 6 0 11쪽
9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28 5 0 10쪽
8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13 8 0 12쪽
7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7.06 7 0 11쪽
6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9 7 0 11쪽
5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3 9 0 11쪽
»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23 10 0 12쪽
3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09 10 0 11쪽
2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9 7 0 11쪽
1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2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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