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 그리고 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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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산
작품등록일 :
2024.06.02 16:58
최근연재일 :
2024.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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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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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DUMMY

12.


개울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개울가로 내려갔다. 수량이 줄어 물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깨끗했다. 앉은 자세로 물에 손을 담갔다. 차가웠다. 거기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아주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태일의 손이 들어오자 허둥대며 재빨리 돌 틈으로 숨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차가운 물을 손끝에서 털어내며 허리를 펴자 또 다시 어떤 기시감이 강하게 뇌리를 자극해왔다. 작은 사내아이가 물속에 잠자리채를 담그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 그 아이가 좀 더 크면서 물고기가 담긴 패트병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장면, 아이가 좀 더 커지면서 작은 반두를 물속에서 꺼내면서 물고기를 잡았다며 이쪽을 향해 소리치는 장면······.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환청처럼 살아났다.


“이야, 이 녀석 다 컸는데? 이젠 아빠보다 물고기를 더 잘 잡네?”


“봤지? 나두 이제 혼자서 고기 잡을 수 있어.”


“그러엄! 거 봐, 아빠가 알려주지 않아도 할 수 있잖아. 배워서 아는 것보다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 훨씬 훌륭한 거야. 이젠 아빠 없어도 엄마를 지킬 수 있겠는걸?”


왜 갑자기 이런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살아나는 것인지, 태일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하지만 한 번 살아난 기억들은 자꾸만 그의 생각을 자극해왔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최대리가 태일의 팔을 잡았다. 태일은 잠시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지탱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기억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다. 기시감이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월천 하류에서 상류까지 가만히 굽어보다가, 문득 그는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최대리, 차 키 좀 주게. 내가 운전할 테니······.”


태일은 차를 움직였다.

머릿속에 살아난 또 다른 기억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태일은 기억의 정체를 고민했지만 아무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저 단편적으로 짧게, 짧게 어떤 기억이, 기시감처럼 떠올랐다가 환상처럼 사라져갔다.


태일이 운전하는 차는 거친 산길을 달렸다.

화살표가 박힌 표지판이 ‘수리사’를 가리켰고, 주변의 간판 등으로 보아 속달동이라는 동네였다. 한참을 달려가던 차는 도로를 벗어난 중턱의 어느 지점에선가 우회전을 했다. 마치 길이 거기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일의 자동차는 무리없이, 능숙하게 산길을 달렸다. 짧지 않은 길을 달려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거치자 갑작스럽게 커다란 웅덩이가 나타났다. 태일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회장님, 언제 이쪽으로 와 보셨습니까? 이곳은 갈치 호수라는데요?”


좀 전에 보았던 반월 호수의 사분의 일 정도로 보이는 작은 호수였다. 호수에서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찡그리게 했다.


그러자 호수의 저쪽 반대편 언덕으로 또 하나의 장면이 흐릿해졌다가는 점점, 매직 아이에서처럼 또렷해졌다. 자전거를 탄 아이와 자전거를 밀며 땀을 흘리는 한 남자······. 아이가 더 빨리 밀어달라며 재촉했고, 땀이 가득 밴 얼굴에 아이처럼 환한 웃음을 웃으며 남자는 달음질을 쳤다.


태일은 자신의 기억이 그 남자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익숙한 미소,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동작······. 그 남자는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다. 틀림없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 강하게 긍정해 오는 확신을 어쩌지 못하다가 그만 정신을 잃어 버렸다.


* * *

남편은 퇴근이 좀 늦어졌다.

최대리로부터 낮에 남편이 잠시 기절했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걱정스러운 상황이었다. 채린이는 아빠 마중을 나가자며 보챘지만 은주는 그렇잖아도 심신이 피곤했다. 남편에게 다시 초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면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보채는 채린이를 달래서 제 방에 들여놓고 은주는 소파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오늘처럼 바쁘게 돌아다녀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온 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육체의 피곤보다는 정신의 피곤이 더 힘들게 했다. 소방서에서 만난 젊은 소방위를 떠올렸다. 남편과 사망자를 병원까지 직접 후송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그날 일을 꽤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엔진 폭발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운전석에서 사망자를 끌어냈다고 말했다. 자신이 꺼냈을 때 운전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계기판에 끼여 있던 그의 지갑과 핸드폰을 부하 소방교가 가져와서 자신이 사망자의 주머니에 넣었다고 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자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아는 게 없었다. 은주는 그가 내민 보고서의 특이사항란에서 미심쩍은 사항을 읽었지만 캐묻지 않았다. 채린이 하교 시간에 맞추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소방서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상황실에 근무 중이라는 유재용 실장도 비교적 자세히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수석 남자가 윗도리를 처음부터 걸치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유실장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남자를 끌어내릴 때, 윗도리가 함께 딸려왔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혹시,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는데, 남편을 등에 업고 언덕을 올라오셨다니까, 술 냄새가 심했었나요?”


“글쎄요······?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얼굴 쪽에서 피를 많이 흘리셔서, 솔직히 술 냄새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피비린내라고나 할까요? 또, 그날 비도 많이 와서 비린내가 천지였습니다. 혹시 알코올로 인한 기억상실 같은 것이 의심되셔서 그러시나요?”


“아니오!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은주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언젠가 간호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술을 많이 마시면 피에서도 술 냄새가 진동한다고······. 소방서 구조대장의 보고서에서는 특이사항란에 사망자에게서 알코올로 추정되는 냄새가 났었다고 적혀있었다.


소방위는 아마도 소화 분말과 차량 폭발로 인한 화학적 합성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은주는 술 냄새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확실히 술 냄새였는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살아남은 사람에게서 술 냄새가 났는지 여부를 알 수 없어서였다.


결국, 운전사는 술을 마셨고, 조수석의 남자는 술을 마시지 않은 셈이었다. 이제 모든 확인 작업이 끝난 셈이었다.


벨이 울리고 남편이 들어왔다. 제 방에 있던 채린이 뛰어나와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아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은주는 마지못해 그이를 향해 돌아섰다. 편두통처럼 한쪽 머리가 아팠다.


“짜잔, 아빠가 오늘 선물 한 보따리를 사왔단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글쎄, 엄마 생일인가? 아닌데? 엄마 생일은 작년 가을이었잖아. 아빠 병원에 있을 때······. 무슨 날인데?”


“당신도 모르겠어? 어디 아파? 왜 그런 얼굴이야?”


남편이 근심스럽게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은주는 눈을 마주치기가 거북했다.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눈길을 피해야 했다. 그 사이에 채린은 아빠가 사온 선물 꾸러미를 펼치느라고 분주했다.


“앗, 잠깐! 선물은 아빠가 직접 해줘야지. 오늘은 화이트데이! 당신도 모르고 있었어? 삼월 십 사 일, 오늘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고백하는 날이야. 그래서 아빠가 우리집 공주님 두 분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지.”


“피, 엄마도 공주야? 채린이만 공주 아니에요? 엄마도 채린이가 공주라고 그러는데?”


“아빠한테는 둘 다 공주님인 걸? 아니, 엄마는 왕비라고 해야 하나?”


남편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는 선물 꾸러미를 늘어놓았다. 한쪽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은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어이없는 사람······.


“자, 이건 채린이 거”


채린이 몫으로 남편은 곰돌이 인형이 불룩한 배에 사탕을 넣은 채 윙크를 하고 있는 선물 세트와 채린이 좋아하는 게임, 집안을 꾸미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따위를 단계별로 진화시키는 일종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종류를 모아놓은 게임기를 내놓았다. 은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게임에 몰두하느라 밥을 잘 먹지 않은 적이 있었다.


“자, 이건 당신 선물······.”


남편이 잘 포장된 네모난 상자를 내밀었다. 은주는 손을 내밀려다가 정색을 했다. 최대리의 보고가 생각난 때문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정신이 있는 거야? 뭐하려고 센터 부지 시찰을 내려간 거야? 그런 건 비서실에 지시해서 비디오로 찍어오라면 되잖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남편은 잠깐 멍한 표정이더니 이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했다. 채린이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엄마의 화난 표정과 말투에 들고 있던 선물꾸러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남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물꾸러미를 주웠다.


“아빠가 엄마 걱정시켜서 그래. 아빠가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남편은 아이를 다독여 제 방으로 들여보냈다. 게임기를 선물 받고 신이 나야 했을 채린이가 마음에 걸렸다. 소리를 지른 남편에게도 괜한 미안함과 분노의 감정이 교차했다.


“미안해. 최대리 그 친구도 차암······. 당신한테 절대 알리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냥 갑갑해서 바람도 쏘일 겸 나가 본 거야. 나도 갑자기 그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한 번 봐주라 응?”


은주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는 남이었다. 하지만 은주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는 채린이의 아빠였고, 자신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뭐가 뭔지 도무지 가늠해 볼 수가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남편은 그녀의 돌연한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일 정도로 눈물까지 보일 필요가······. 암튼 미안해. 난 내가 정상이 된 것 같아서 너무 들떠 있었나봐. 너무 내 생각만 한 모양이야. 앞으론 그런 일 있으면 당신한테 허락을 받을게. 너무 속상해 하지마. 병원에선 단순히 현기증이 났을 뿐이라고 했어. 정말이야. 건강한 사람한테서도 갑자기 빛에 노출되거나 순간적으로 혈액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대.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은주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냉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알았어. 그만 씻고 식사 해야지.”


남편은 잠시 쭈뼛거리다가는 욕실로 향했다.

남편이 가고 나자 그가 사온 선물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주는 괜히 한숨을 내쉬며 상자를 끌렀다. 어차피 사온 것이니까 궁금하기도 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화장품들이었다. 세트가 아닌 낱낱의 화장품들······. 며칠 전에 지나가는 말로 화장품을 새로 사야 할 것 같다며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린 것을 놓치지 않고 새겨들은 모양이었다. 은주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선호하는 J회사와 R회사의 화장품······. 주문 판매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백화점이나 화장품 전문점에서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웠을 화장품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사고 싶었던 종류들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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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9.07 6 0 12쪽
16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8.31 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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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17 8 0 11쪽
13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7 8 0 10쪽
»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7 0 12쪽
11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5 0 11쪽
10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7.28 6 0 11쪽
9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28 5 0 10쪽
8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13 8 0 12쪽
7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7.06 7 0 11쪽
6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9 7 0 11쪽
5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3 9 0 11쪽
4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23 10 0 12쪽
3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09 10 0 11쪽
2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9 7 0 11쪽
1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2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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