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 그리고 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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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산
작품등록일 :
2024.06.02 16:58
최근연재일 :
2024.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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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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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DUMMY

6.

은주는 당혹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드라마 속 비운의 여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설렘이 찾아들었다. 그녀는 굳이 따지자면 성선설을 믿는 축이었다. 그가 백지상태라면 차라리 그를 완전히 다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얄팍한 계산속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솔직히 환자분의 상황은 단정짓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미국의 제 친구, 뇌공학 권위자인 닥터 최 역시 단정짓기 어렵다고 답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었더라도 대뇌 피질 전체가 훼손되는 경우는 사실상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건강이 회복되면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은주는 뭔가 망설여졌다. 그의 기억 상실이 차라리 잘된 일일 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예전 기억을 회복한다면 자신이 겪을 불행은 뻔한 일이었다.


“그게 얼마나······ 걸리는 일인가요?”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영원히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거로군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그 부분만큼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셈이지요. 그렇긴 해도 희망은 많습니다. DNA 구조가 수년 내에 밝혀지면 아마 이 분야도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질 거니까요. 길어야 십년이나 될까요?”


십년? 은주는 자신도 모르게 풋, 웃었다. 어쩌면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불행한 십년과 맞바꿀 만한 행복한 십년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그녀는 뭔가 미진했다. 분명한 해답을 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계획을 세울 정도는 답변을 기대했었으니까.


“그럼 한 십년 쯤 후에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이가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허허······. 통상적으로 기억 상실을 일으킨 시점과 다시 기억을 되찾는 시점 사이의 상태를 둔주(遁走 fugue)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둔주 기간 동안의 기억은 잃게 됩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억이 같은 기억 공간에서 공존하긴 어렵다는 것이지요. 다만, 잃어버렸던 기억을 어떻게 되찾게 되느냐는 것이 변수가 될 수도 있긴 합니다만······.”


의사의 방에서 나오며 은주는 설렘과 슬픔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 다만 남편의 현재적 상태만 알고 있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얄궂었다. 왜 이토록 운명은 잔인한 것인지······. 병실을 향해 돌아서는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 * *

남편은 제법 일어나 앉기도 하고 병원식도 곧잘 넘겼다.

얼굴과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것 말고는 나머지 장기들은 제법 완벽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천만 다행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언제고 남편을 구해냈다는 경찰관을 한 번 찾아갈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여전히 기억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나머지 뇌 기능들은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담당 의사의 말처럼 병원에서 최선을 다한 효과인가 싶었다.


은주는 이제 본격적으로 남편을 재구성하기로 했다.

언제고 자신의 기억을 되찾으면 만사휴의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의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는 남편의 노력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되면서부터 남편은 자신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번번이 좌절하는 눈빛으로 침대에 쓰러졌지만, 은주는 그런 남편이 신비스럽고 대견했다.


“오늘은 누가 왔는가 한 번 보세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은주는 제법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남편은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은주는 딸 채린이를 남편 앞에 세웠다. 남편은 채린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이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당신 딸이잖아요. 채린아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채린이는 조금 주저했다. 붕대를 푼 남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일단 간단한 성형 조치를 받기는 했지만 아직 세 번의 성형 수술을 더 해야만 그나마 얼굴 같아질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었다.

주저하던 채린이는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남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말 아빠야?”


아이는 못미더운 듯이 그녀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했던 아빠였다. 남편과 별거를 시작한 지가 벌써 4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간간이 만나서 먹을 것을 사주거나 옷을 사 주기는 했지만 불과 두세 시간 정도 같이 있다가는 할 일이 있다며 바람처럼 가버리곤 하던 아빠였다.


그래도 채린이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를 찾았다.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부쩍 아빠를 보고 싶어 했다. 친구들이 아빠와 놀러 갔다 온 이야기를 하거나, 공개 수업 때 아빠가 찾아온다거나 하면 채린이는 엄마를 보채기 일쑤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빠가 기억을 잃어버린 채 험악한 얼굴을 하고 마주 보고 있었다.


“아빠 맞아? 아빠, 채린이야. 정, 채, 린!”


남편은 가만히 아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볼을 어루만져보곤 은주를 쳐다보았다. 은주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남편의 생각을 알아서라기보다는 왠지 그래줘야 할 것 같았다.


“아, 아빠야. 그래, 아빠······.”


갑자기 남편 눈에 눈물이 어렸다.

아빠라는 단어에 크게 자극된 것 같았다. 은주는 어린 아이를 어루듯이 남편의 눈물을 닦아내며 등을 토닥거렸다. 어쩌면 잠재의식 깊은 곳에 아빠로서의 책임감이나 존재감이 숨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왜 울어? 아빠 많이 아파? 사고 나서 아픈 거지? 주사 맞아서 그런 거지?”


병원에 오면서 대강 아빠의 상태에 대해서 알려준 것이 기억난 모양이었다. 이제 채린이는 아빠가 무섭지 않은 듯이 침대에 기대서 아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은주는 너무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평범한 가족들처럼 살고 싶다고 남편에게 악을 썼던 일이 떠올랐다.

정말 그랬다.


남편이 입금해 주는 돈은 차라리 낭비라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하고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렸지만 남편은 끝내 채린이가 잠이 든 후에야 고주망태가 되어서 들어왔다. 제발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악을 썼다. 남편이 술김에 주먹을 휘둘렀지만 은주는 그가 휘두르는 주먹은 차라리 아픈 줄을 몰랐다.


남편과 아이는 금방 친해졌다.

아빠의 얼굴이 흉측한 괴물처럼 느껴졌을 텐데도 채린이는 가져온 책들을 읽어주기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해 주며 아빠 곁을 떠날 줄을 몰랐다. 남편도 점차 채린이가 피붙이로 느껴지는지 아이의 말에 대꾸도 해주면서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려는 듯이 캐묻곤 했다.


은주는 아이를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라도 그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시도한 일이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채린아, 아빠가 빨리 나아서 많이 놀아줄 게. 여보, 채린이가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니까 아빠랑 하루 종일 놀고 싶다는데?”


봉합해놓은 볼이 아파서인지 크게 웃지는 못하지만 남편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이제야 그걸 알아낸 거야? 은주는 섭섭하면서도 기뻤다. 값비싼 장난감이나 인형, 놀이공원 리조트 이용권 같은 것들보다 채린이가, 은주 자신이 원했던 것은 이렇게 평범한 것이었다. 그거 하나를 들어주지 못해서 모녀의 가슴에 그렇게 상처를 박아야 했던 남편이, 아니 남편의 과거가 미웠다.


* * *

아침부터 은주는 분주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나들이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김밥을 싸면서도 가족 나들이를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채린이는 덩달아서 신이 났다. 조막만한 손으로 엄마 일을 도와준답시고 분주했다.


병원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며 찬성했다.

50일 가까이 병원 신세만 지고 있던 남편도 무척이나 갑갑해 했다. 병원에 조그마한 산책로가 있기는 했지만 갑갑함을 해소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남편은 은주가 원하는 정태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은주가 아는 정태일이 아니었다. 새롭게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세상을 다시 배워 가는 중이었다. 은주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채린이에게 자상했다.

가끔씩 느닷없이 심각해지는,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꽉 잡은 채 한동안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은주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그는 모르겠다고만 했다. 은주는 그럴 때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횟수도 줄어드는 기미를 보였다.


“엄마, 엄마, 이건 아빠 꺼, 요건 엄마 꺼, 이건 내 꺼야. 히히”


도시락에 김밥을 넣으며 아이가 즐겁게 조잘거렸다.

김밥을 자주 싸보지 않아서인지 크기가 조금씩 달랐다. 아이는 그 중에서 좀 크다 싶은 것들은 아빠 거라고, 제일 작은 것들은 자기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은주는 자신도 새롭게 세상을 배우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행복한 가정의 아내로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병원에 들러 남편을 차에 태웠다.

남편도 좀 들뜬 분위기였다. 혹시 모른다며 병원에서 안정제를 주었지만 은주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얼굴을 제외하고 남편의 상태는 최상인 것 같았다.


은주는 용인의 놀이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채린이만 데리고 한두 번 가 본 곳이었다. 남편과는 처음 가는 놀이 공원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서 남편과 채린이는 유치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채린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와 남편의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늦가을인데도 놀이 공원엔 사람들로 붐볐다.

곳곳에 단풍이 든 나무들이 축제의 무희들처럼 한들거렸고, 놀이 기구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탄성과 비명이 바닷가의 포말처럼 부서졌다. 아빠의 손을 잡고 저만치 앞서 깡충거리는 채린이의 모습이 작은 짐승마냥 도드라졌다.


남편은 사진 찍기를 주저했다.

일그러진 얼굴 때문인지 한사코 자신이 카메라를 잡겠다고 고집이었다. 은주는 채린이를 내세워 남편을 결국 카메라 앞에 세웠다.


렌즈 속의 남편은 역시 낯설었다. 얼굴이 뭐 대순가, 싶으면서도 마음 한켠은 그게 아니었다. 아직 두 번의 성형 수술이 남아 있었다. 예전 모습과 똑같기는 어렵겠지만 수술을 마치고 수술 부위가 안정을 찾아가면 나름 얼굴다운 얼굴이 될 거라는 의사의 말이 아직은 실감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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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9.07 6 0 12쪽
16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8.31 6 0 13쪽
15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24 6 0 8쪽
14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17 8 0 11쪽
13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7 8 0 10쪽
12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6 0 12쪽
11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5 0 11쪽
10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7.28 6 0 11쪽
9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28 5 0 10쪽
8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13 8 0 12쪽
7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7.06 7 0 11쪽
»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9 7 0 11쪽
5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3 9 0 11쪽
4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23 9 0 12쪽
3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09 10 0 11쪽
2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9 7 0 11쪽
1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2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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