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 그리고 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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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산
작품등록일 :
2024.06.0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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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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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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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DUMMY

14.


남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명랑한 얼굴로 출근길에 올랐다.

물류 센터와 관사 부지는 기획실에 맡기고 집에서 좀 쉬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남편은 일을 하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는 농담을 하며 채린이를 태우고 나갔다.


은주는 아직은 괜찮은 거라며 혼잣말을 하다가 부시시 일어섰다. 뭔가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출근했고, 은주는 집안 청소를 하기로 했다. 겨우내 걸려있던 커튼과 카펫을 세탁소에 맡기기로 했고, 소파를 이리저리 밀어가며 거실 청소를 끝냈다.


도우미에게는 채린이 방 청소를 부탁하고는 서재로 들어섰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아서 여기저기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띄었다. 초벌로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융걸레를 짜내어 책장 구석 구석을 닦아냈다.


그런데 책상 위를 닦으려고 걸레질을 시작하자 갑자기 컴퓨터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작동했다. 깜깜하던 화면이 점차 밝아졌다. 간밤에 남편이 컴퓨터를 사용하고는 끄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화면보호기와 절전모드가 실행되고 있어서 은주가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은주는 무심코 화면에 눈길을 주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누군가의 페이스북 페이지······.


사진과 글들이 있었다.

개울에 들어가 즐거운 듯이 웃고 있는 남자 아이 사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반월천에서 아들과 물고기를 잡았다는, 일기처럼 쓰여진 댓글이 달려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반월천’이라는 단어가 삽시간에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최대리가 남편에 대해 보고했던 내용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화면이 아래로 스크롤되면서 페이지 가장 윗부분이 등장했다.


홈페이지 주인은 윤성수······. 프로필을 클릭했다. 생년월일과 직장 정보, 학교, 그리고 주소가 기재되어 있었다. 주소지는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이었다. 그녀는 입안으로 대야미라는 단어를 우물거리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병원에서 총무과장이 알려준 사망자의 주소지와 같았다.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윤성수, 총무과장이 말했던 사망자의 이름이 분명했다. 또다시 심장이 마구 박동질을 했다. 남편이 어떻게 그를 알고 있는 것이지······? 의혹이 증폭되면서 간밤에 남편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거실을 서성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남편은 당황했던 것이 분명했다.


은주는 부리나케 전화기를 꺼내었다. 사촌 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 그, 정신과 의사 있잖아. 용선이 치료한다는······.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라면서? 응, 그래. 그 분 만날 수 없을까? 아니, 우리 식구 말고 채린 아빠가 크게 도움 받은 분이 있는데, 뭣 좀 알아봐 달라고 해서······. 응, 잠깐만 메모 준비할게. 응, 준비됐어. 불러봐.”


은주는 언니가 불러주는 전화번호와 대략의 위치 정보를 메모지에 기록했다. 천사 병원 주치의를 만날까도 생각해 봤지만 차라리 모르는 사람한테, 또 다른 전문가에게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외출을 하며 은주는 남편이 군포에서 현기증 때문에 기절했었다는 최대리의 보고를 다시금 곱씹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면서도 남편은 최대리가 모르는 길을 능숙하게 찾아갔다고 말했었다.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이지만 자꾸만 자신을 불안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


언니가 소개해 준 고종석 박사가 운영한다는 정신과 의원을 찾아가는 내내 은주는 제발 자신이 상상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조카의 전담 의사라는 고종석 박사의 병원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다.

다행히 병원 측에서 주소를 알려주어서 간신히 찾아갈 수 있었다. 고박사는 언뜻 보기에도 경험이 많아 보였다. 6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베테랑 의사였지만 소탈한 분위기였다. 은주는 일단 남편의 증상에 대해서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했다. 물론 고박사가 곧이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동안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기억상실이라는 점에서는 둔주 기간을 기억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즉,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이 깨어남과 동시에 같은 기억 자취에 기록되었던 최근의 기억들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럼, 어떤 기억은 살아나고 어떤 기억은 살아나지 않는, 일종의 부분 기억 회복도 가능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억이란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물론 물리적 외상으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부분적으로라도 기억이 되돌아온다면 최근의 기억들은 그 자리에 기록되었을 것이기에 둔주 현상이 나타나겠지요.”


“물론, 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기억이 되돌아 왔는지 확실한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만, 자신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다면 기억이 되돌아 온 것으로 봐도 되는 것 아닐까요?”


“이런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커피를 한 모금 입술에 적시고는 은주가 설명한 현상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떼었다. 은주는 조바심이 일었지만 잘 참고 있었다.


“어쩌면 그 지인의 남편이라는 분은, 의학적 소견에서 보는 기억상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은주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벌떡 일어설 뻔했다. 의자를 잡은 두 손에서 힘이 풀려났다.


“말하자면,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기억이 사실은 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다른 장소에 기록되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 일이······. 분명히 병원에서는 기억상실이라고 했거든요.”


“기억 상실이라는 것은 의학적인 증거를 확보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병원 측에서 진단을 내리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고, 충분한 관찰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는, 일종의 망각 현상도 기억상실과 같은 증상을 보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은주는 남편을 무리하게 퇴원시켰던 일을 생각해냈다. 그때 의사는 2-3주 정도만이라도 더 지켜보자고 했지만 은주는 그를 무시하고 억지다시피 퇴원을 감행했었다.


고박사의 가설, 혹은 추리는 이랬다.


분명히 남편은 교통사고로 뇌 부분에 손상을 입었다. 그로 인해서 뇌수술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지체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깨어났고, 본인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서 병원에서는 기억상실이라고(물론 단정하지는 않았겠지만) 했을 것이고, 환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종의 세뇌 작용으로 발전하면서 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억압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보통 일시적인 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상입니다. 간혹 갑자기 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늘 다니는 동네 이름이 떠오르지 않거나, 전에 만나서 즐겁게 놀았던 친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일들, 그런 일 겪지 않으십니까? 갑자기 누군가가 주민등록 번호를 물어오거나 차량 번호를 물어보면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경우를······.”


은주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험이야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이 났었다.


“오래 가는 사람은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 종일 생각나지 않던 이름이 다음날 잠에서 깨어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 일종이 지체 현상인데, 대부분의 경우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것이 예사지요. 이것은 잃어버린 내용을 기억하려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뇌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의식의 논리 회로가 무의식이나 기억의 밑바닥에 깔려있던 것을 찾아내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자각할수록 오히려 떠오르는 기억들을 방해했던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서 그에게 본래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정보를 기억하게 하고 마치 그 사람인 것처럼 대우하니까, 원래의 기억을 되찾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즉, 찾을 수 있는 기억인데 찾지 않았을 뿐이고, 이것은 일시적 망각 현상을 기억상실로 대체해버린 의식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사람들은 시간선 치료를 통해 기억을 되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면 치료 방법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잃어버렸던 기억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매개를 연결해 주는 것이지요. 학생들이 열심히 외운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 쩔쩔맬 때 단어의 첫 글자만 알려주면 나머지를 고스란히 기억해 내지 않습니까? 일종의 힌트 같은 것이지요. 이야기 하신 그 분은 망각의 기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그분이 가장 확실히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요소, 가장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이라던가, 행복했던 장소, 늘 맡았던 냄새, 습관······, 뭐 이런 것들을 매개로 연결해주면 망각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 효과적일 겁니다.”


은주는 대야미를 떠올렸다. 최대리의 보고를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남편은 자신이 살았던 곳에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힌트를 얻은 것이 틀림없었다. 은주는 절망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에 습기가 어리는 것을 보며 고박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은주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크게 기침을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요? 그 분이 기억을 되찾으면 지금까지의 기억은······?”


“글쎄요. 단순 망각 현상이 되살아나는 과정에서의 지체라고 본다면 현재까지의 시간을 충분히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부분적 기억상실과 동반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부분적인 기억 상실도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최면에 걸렸던 사람이 최면에서 풀려나면 최면이 걸리는 과정과 최면 과정 모두를 기억하듯이 모두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은주는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 대체만 아니라면, 그가 자신과 살았던 여섯 달 남짓의 시간을 행복하게 기억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렇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이제 그가 떠나고 나면 남은 삶은 은주 자신이나 채린에게 너무도 가혹한 형벌일 것만 같았다.


승용차에 올라타 시동도 걸지 않은 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던 은주는 호기심에 다시 차에서 내렸다. 무가지를 꽂아놓는 케이스에 광고 전단지 한 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업스피드 심부름 센타-’


은주는 전단지를 뽑아 들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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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8.31 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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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17 9 0 11쪽
13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7 8 0 10쪽
12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7 0 12쪽
11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5 0 11쪽
10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7.28 6 0 11쪽
9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28 5 0 10쪽
8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13 8 0 12쪽
7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7.06 7 0 11쪽
6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9 7 0 11쪽
5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3 9 0 11쪽
4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23 10 0 12쪽
3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09 1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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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2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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