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 그리고 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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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산
작품등록일 :
2024.06.02 16:58
최근연재일 :
2024.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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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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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DUMMY

15.


오전 일과를 대강 마무리하고 태일은 대야미로 차를 몰았다.

아무래도 최대리가 은주에게 보고하는 것 같아 그에게는 거래처 사장과 별도 회동을 한다고 말해 놓았다. 페이스북에서 찾아낸 주소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황사로 희부연한 외곽 순환도로를 타자 마음 속 궁금증이 그를 재우치는 것 같았다.


50여 분을 달리자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종료되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대야미의 어느 한적한 빌라촌이었다. 여러 채의 집들이 하나의 건물로 지어진 빌라촌은 한 층에 예닐곱 가구 정도가 입주해 있는 듯 했다. 그는 두 동의 빌라 사이에 차를 세우고 양쪽의 빌라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왼쪽 편이 윤성수가 알려준 아트빌라인 것 같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무턱대고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기도 뻘쭘했다. 혹은 집안에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는데 맞은편 대각선 쪽에서 어린 아이 하나가 겅중거리며 걸어왔다. 한 눈에 윤성수의 페북에서 보았던 소년임을 알 수 있었다. 페북 사진보다는 더 자란 듯이 성숙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가까이 다가온 아이는 조금 경계하듯이 태일의 차와 운전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 왼편의 빌라 2층에서 베란다의 창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가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우진이 학교 끝났니? 배고프지?”


“응, 엄마. 나 학교에서 달리기 1등 먹었어. 이것 봐.”


아이는 자랑스럽게 제 팔뚝을 흔들어보였다.

2층 여자는 아이의 팔뚝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내밀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주 짧은 순간 태일은 자신이 심장이 멎었다고 착각했다. 윤성수의 페이지에서 보았던 그녀······.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차에서 내려섰다.

아이가 그녀와 태일 사이에 우뚝 멈추었고, 태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태일을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태일의 몸이 휘청거렸다. 여자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태일을 보다가 아이에게 빨리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남자가 이상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느낌 때문이었는지 발을 떼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 아니 태일로서는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끼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여자. 말투와 분위기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마치 막혀있던 수도관을 뚫었을 때처럼, 화산이 폭발하듯이 수많은 기억들이 솟구쳤다.


그는 아이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내 아이, 산으로 들판으로 개울로 강가로 함께 다니며 한 몸이었던 나의 분신······.

태일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아이는 잠깐 움찔하면서 2층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라,

“우진이 벌써 학교 끝났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긴장된 상황 속으로 파고들었다.

적당한 몸피에 조금 배가 나왔다고 생각되는 남자 하나가 이리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를 발견한 아이가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했고, 아이의 인사를 빠른 동작으로 맞받으며 그는 2층의 여자를 향해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 현섭씨 벌써 퇴근이야?”


“아니, 자기한테 원고 넘기려고 일부러 온 거야. 지난달에 작업한 원고 1차 수정본이 나왔거든.”


태일은 어정쩡한 자세에서 멈추어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현섭이 그의 앞을 스쳐갔다. 2층의 여자는 기묘한 긴장 속에 서 있던 남자가 불쑥 궁금해졌다. 현섭이 있으니 안심이 된 모양인지 먼저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세요? 무슨 볼 일 있으세요?”


태일은 2층을 올려다보았다. 집으로 들어가려던 아이가 돌아섰고, 현섭 역시 그를 응시했다.


“아, 혹시 여기가 586번지인가요?”


아이와 현섭이 서 있는 담장에 있는 584-1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오자 태일은 황급히 대꾸했다.


“아······. 586번지는 바로 뒷집일걸요? 여긴 584번지거든요.”


2층에 있던 여자는 의심기가 걷히지 않은 눈빛으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베란다 창문을 닫았다.


태일은 차 안으로 들어와 좌석에 목을 기댔다.

눈물이 흘렀다. 한꺼번에 되살아난 기억이 오히려 커다란 상실감을 불러온 것 같았다. 눈앞의 아내와 아들을 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쫓겨나야 하다니······. 룸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윤성수도 아닌, 정태일도 아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느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잠을 자듯이 자동차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번민에 휩싸였다.


모든 일은 정사장, 정태일이 술에 취한 채 핸들을 잡은 순간에 결정된 셈이었다. 싸워서라도 자동차 키를 집어 던져서라도 그가 운전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태일은, 아니 되돌아온 성수는 자신의 무기력한 대응이 못내 아쉽고 원망스러웠다.


회사로 돌아온 태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업무에 집중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버성겼다. 틈틈이 그는 윤성수를 찾아보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국세청 아이디를 입력했지만 사망한 사람이라는 안내 표지가 나타났고, 주거래 은행에 사이버 회원으로 등록했던 아이디도 기억해냈지만 역시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였다.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서 찾아 들어간 몇 개의 사이트에서도 같은 결과뿐이었다. 그는 낙담스러웠다. 잠깐 잠을 자고 났을 뿐인데 그 자신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회장님, 이거······.”


비서실의 강부장이 결재 서류를 내밀었다. 그는 노크를 해도 반응이 없길래 문을 열고 들어왔다며 열적어했다. 태일은 부장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 전용 차량의 보험 및 제 지출에 관한 서류였다. 태일이 서명을 하고 서류를 되돌려주는데, 서류철을 들고 나가려던 부장이 걸음을 멈추고는 놀란 표정으로 돌아섰다.


“회장님, 사인이······.”


그는 서류철을 다시 내밀었다. 태일은 순간적으로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윤성수의 사인을 했던 것이다.


“어? 이게 뭐야? 이런, 친구 녀석 사인 흉내 내던 중이라 나도 모르게······.”


강부장이 다시 서류를 만들어왔고 그는 은주가 알려줘서 수백 번 연습했던 정태일의 사인을 적어 넣었다. 다행히 강부장은 별 다른 의심 없이 서류를 들고 나갔다.


되돌아온 기억과 지난 6개월 여 동안의 기억들이 서로 섞이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그는 고민스럽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떻게든 결정을 해야 했다. 이대로, 윤성수도 정태일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일은 최대리에게는 먼저 퇴근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최대리가 은주에게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문으로 빠져 나갔다. 혜화동에서 작은 술집을 하는 친구를 만날 작정이었다.


철학을 전공했던 녀석은 언제부턴가 주역에 빠져 살았다. 만날 때마다 운명이니 명운이니, 사주와 오행의 관계가 어떠느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성수는 그가 하는 말이 헛소리라며 핀잔을 주곤 했지만 자신의 고민을 가장 많이 들어주고 조언을 하던 친구였다.


그를 만나 뭐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를 만나면 뭔가 해결책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은주에게는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할 거라며 문자를 보내고는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고독감이 밀려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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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9.07 6 0 12쪽
16 7. 운명을 잡자니 인연이 슬피 울고... 24.08.31 6 0 13쪽
»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24 6 0 8쪽
14 6. 운명은 기어코 자기를 찾는다 24.08.17 8 0 11쪽
13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7 8 0 10쪽
12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6 0 12쪽
11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8.11 5 0 11쪽
10 5. 운명은 운명대로, 인연은 인연대로... 24.07.28 6 0 11쪽
9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28 5 0 10쪽
8 4. 인연이지만, 당신이 나의 운명이길··· 24.07.13 8 0 12쪽
7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7.06 7 0 11쪽
6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9 6 0 11쪽
5 3. 남편과의 운명, 타인과의 인연 24.06.23 9 0 11쪽
4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23 9 0 12쪽
3 2. 운명은 만취한 승용차처럼 24.06.09 10 0 11쪽
2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9 7 0 11쪽
1 1. 우연한 사고, 변주의 서막. 24.06.02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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