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최근연재일 :
2024.09.09 18: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71
추천수 :
1
글자수 :
182,644

작성
24.06.17 18:00
조회
30
추천
0
글자
13쪽

3.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3)

DUMMY

‘세계를 완성하라니, 무슨 소리야.’


그가 봐 온 소설에서는 보통 이쯤 마법 펜이 등장하거나, 엄청난 마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헬리온에겐 아무것도 없다. 미간을 좁힌 채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자 글자가 다시 번뜩였다.


[‘헬리온 딜라드’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초고의 편집은 행동에서 기인한 변화만을 인정합니다.]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행동에서 기인한 변화만을 인정한다니, 헬리온이 죽지 않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선 직접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기한도 무한이고. 무한한 가능성은 또 뭐지.’


헬리온은 초고를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노크 소리에 황급히 노트를 덮었다. 찬란한 빛을 발하던 글자와 책은 전원이 꺼지듯 사라졌다. 메이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가지고 들어왔다.


“도련님, 수프예요. 먹여 드릴까요?”


이 나이 먹고 누군가가 음식을 먹여주는 상황에 처하다니, 안될 말이다. 헬리온은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아, 아닙니다. 테이블에 두시면 제가 가서···, 어.”


다리가 움직인다. 아까는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던 다리가,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담았다. 메이드는 애매하게 말을 멈춘 헬리온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제가 가서 먹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부를게요, 감사합니다.”

“네, 네에···.”


방 안에는 헬리온만 남았다. 바깥이 조용해지자,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정말 움직일 수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게 작용한 것일까. 그런 헬리온의 눈앞에 다시 금빛 글자가 번뜩였다.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 에테르 수용량이 늘어납니다.]


‘역시 그런 건가.’


저 ‘무한한 가능성’이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특성은 전개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헬리온은 의욕이 붙었다.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떠먹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일주일이 흘렀다.

헬리온의 건강은 의사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호전되었다. 홀로 움직일 수 있었고, 가벼운 산책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했다. 누나 클레어는 가끔 그의 방에 찾아와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깨어난 직후에 클레어와 함께 들어왔다가 나간 여성은 그녀의 개인 교사라는 듯했고, 자신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없이 나간 어머니는 원래 자식들을 잘 챙기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아버지인 케이슨 딜라드 백작은 찾아오지 않았다.

식사는 시간에 맞춰 꼬박꼬박 방으로 찾아왔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제공되었다. 비싼 가격에 한 번 사려면 큰 결심을 해야 했던 ‘명진’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메이드에게 부탁한 건 노트와 만년필, 지도였다.


‘시점상 아직 소설 내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진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대처해야 해.’


헬리온은 자리에 앉아 지도를 펼쳤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젠스 왕국 전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유럽 지도와 비슷했다. 아마 과거의 명진이 세계관을 구축할 때, 유럽 지도를 참고했기 때문일 테다.


‘아까 그 설정 노트 다시 못 보나.’


십 년도 더 전에 쓴 설정을 일일이 기억할 리 없다. 그러자 마법처럼 눈앞에 금빛 광채를 흩뿌리는 노트가 나타났다. 헬리온은 노트와 지도를 나란히 두고 주요 도시를 짚어나갔다.

딜라드 영지는 북부 국경 인근 로타님에 있다. 레바나 산맥을 경계로 베네마 공국과 맞닿아있으니, 군사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는 설정이 적혀 있었다.

로타님에서 수도 알테스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헬리온은 손을 펼쳐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다가, 초고에서의 ‘헬리온 딜라드’를 떠올렸다.


‘주인공이랑 같은 학교에 다니다가, 마수 때문에 백작이 죽자 작위를 이어받기 위해 학교를 떠났지. 이후엔 반역에 가담해 군사력을 제공했고.’


헬리온이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초고는 팔랑거리며 제멋대로 넘어갔다. 움직임이 멈춘 페이지에는 ‘헬리온 딜라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사 정해둔 대강의 흐름이 적힌 페이지였다. 헬리온은 책을 덥석 집어 읽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재학, 아버지 사망, 반역··· 똑같은 이야기네.”


쓸 만한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책을 허공에 내던진 후 노트에 차례로 계획을 적어 내려갔다.


1. 백작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백작(아버지)이 죽지 않아야 함.

2. 주인공을 전력으로 서포트해서, 반역의 주도자가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해야 함.


‘딜러 같은 건 할 성격이 못 돼. 난 게임을 해도 탱 아니면 힐이었다고.’


그때, 책과 함께 사라졌던 금빛 글자가 다시 나타났다.


[플롯이 성립되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 에테르가 체내에 저장됩니다.]


심장이 크게 두근거린다. 달리기를 한 직후 숨이 차듯, 빠른 박동이 이어졌다. 헬리온은 호흡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찬란한 금빛이 헬리온의 주위를 감싼다. 따스한 기운이 기분 좋았다. 심장 박동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헬리온은 어쩐지 몸이 개운해진 것 같았다.


‘에테르가 저장됐다는 게 이런 건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 세계관엔 마법이 있지만, 그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삼십 년을 살았다. 지금 당장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금빛 글자는 계속 이어졌다.


[헬리온 딜라드에게 특수 능력이 부여됩니다.]

[시간 역행-라케시스의 실타래]

[사용 제한: 없음, 과사용 시 페널티 부여]


“뭐?”


그 글자를 본 헬리온은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고양이가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헬리온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 특능이 왜 나한테 와? 저거 주인공 능력인데?’


초고의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시간 역행의 특능, 라케시스의 실타래는 주인공 레온하르트의 특수 능력이었다.

반역을 일으킨 현왕의 이복형 데클란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을 상대하던 중, 계속되는 전투로 지친 동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레온하르트는 하늘을 원망했다.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자들에게 내려져 마땅한 벌을 왜 이 아이들이 받아야 하냐면서. 울분을 토하는 그의 진심이 하늘에 닿았는지, 레온하르트는 전투 도중 특능을 발현한다.

그는 그 특능으로 시간을 되돌려, 빈번한 사용으로 인한 페널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료가 죽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다. 될 때까지 몇 번이고 시도할 수 있었으니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유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가 부족함에도 뒷부분까지 동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을 수 있던 건 그 능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그 능력이 왜 나한테 오냐고, 내가 뭘 하라고.’


그는 반란이 일어난다면(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긴 했다.) 적당히 금전적 지원이나, 필요하다면 군사 지원까지는 손을 뻗어 볼 생각이었다. 즉, 전면에 나서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 레온하르트가 얻게 될 동료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해결할 수 있는 건 이 특능을 가진 헬리온뿐이었다.


‘설마 기한이 무한이라는 게 이걸 의미하는 거였나.’


문득 떠오른 깨달음에 헬리온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초고의 헬리온에게도 특능이 주어졌다. 시간 역행과는 정반대인 시간 정지 능력. 이 능력 때문에 헬리온은 레온하르트가 돌린 모든 시간을 기억했고, 그를 향한 분노를 키워갔다. 돌아간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기인한 분노는 그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반역에 가담하게 된 근본적인 분노의 시발점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다소 매끄럽지 않은 흐름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헬리온은 지금 레온하르트의 능력을 얻었다. 시간 정지 능력이 누구에게 주어질지, 혹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만큼은 되돌아간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는 게 괴롭다는 것만큼은 지금의 그도 알 수 있다. 오직 시전자의 주변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능력이 그 주변 사람까지 긍정적인 결말로 이끄는 건 아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한, 능력을 사용해야 할 때가 와도 망설일 게 분명했다.


‘신인지 뭔지, 진짜 존나 악질이네. 아오···.’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괴로워하던 헬리온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올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걱정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여전히 번쩍거리는 글자는 손으로 휘젓자 쉽게 흩어졌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헬리온은 노트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명확해졌으니,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메이드가 가져다준 셔츠는 조금 컸지만, 바지는 적당히 맞았다.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서자 아래층에 있던 메이드가 허둥지둥 올라왔다.


“도련님,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신지.”

“백작님이라면 지금 서재에 계실 거예요. 부축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사실 부축은 필요 없었다. 에테르 탓인지 특성 탓인지, 몸은 살집이 없는 걸 제외하고 건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12년간 이 저택에서 태어나고 자란 헬리온 딜라드가 아니다. 일주일간 방 밖으로 나간 적도 딱 한 번, 클레어와 함께 산책할 때뿐이었다. 저택의 구조를 잘 모르는 그가 자연스럽게 목적지로 가기 위해선, 저택의 구조를 잘 아는 동행인이 필요했다.


‘빨리 집 구조를 외우든지 해야지, 원.’


*


똑똑똑.

무사히 서재에 도착한 헬리온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부축이라는 임무를 마친 메이드는 헬리온이 돌려보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백작을 혼자 대면하려니 조금 무서웠지만, 어차피 메이드가 함께 있었어도 백작이 돌려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이 돌아오리란 예상과는 다르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헬리온은 어쩔 수 없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드릴 말씀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온은 몸을 잔뜩 굳힌 채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때 안쪽 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회색빛이 더 진하게 도는 회갈색 머리카락은 두 사람이 혈연관계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헬리온을 본 케이슨 딜라드 백작은 순간 멈칫했다. 백작의 눈은 짙은 갈색이었다.

갈색 눈과 푸른 눈이 서로를 탐색하기도 잠시, 헬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라는 호칭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초고에 그가 적어 둔, 나올 예정이었던 대사에 적힌 호칭을 따라 하길 잘했다.


‘원래 백작이 죽고 나서 하는 대사지만, 뭐 어때. 정보만 얻으면 됐지.’


헬리온은 침을 꼴깍 삼켰다. 케이슨은 덩치로 사람을 위압하진 않았으나, 큰 키와 눈빛은 상대방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회사에서 온종일 미친 상사가 트집 잡는 걸 듣고 고개를 숙여야 했던 사람 아닌가. 그 기분 나쁜 얼굴을 떠올리니 케이슨 정도는 무섭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배 나온 아저씨들보다 얼굴도 봐 줄 만하여, 헬리온은 자신감을 얻었다.


“내년에 왕립 젠티아 아카데미에 가고 싶습니다.”


왕립 젠티아 아카데미.

소설〈시간의 끝을 향하여〉의 주요 배경이 되는 곳이다. 16세부터 입학할 수 있으며, 마법학부, 검술학부, 마공학부의 세 학부로 나뉘는 이젠스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곳.

주인공 일행은 이곳에서 실력과 경험을 쌓고, 그걸 밑거름으로 여러 위기를 헤쳐 나간다. 게다가 초고에서 헬리온 딜라드는 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중 백작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귀향했다. 우선 학교에 가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는 뜻이다.

늦거나 너무 이르면 어쩌나 했는데, 헬리온은 마침 열다섯이었고, 지금은 겨울이다. 학기 시작이 4월인 젠티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일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괜찮겠느냐.”

“네. 일주일 푹 쉬었더니 가뿐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네 뜻대로 하거라. 준비는 이쪽에서 해 줄 테니, 지금은 쉬도록 하고.”


예상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헬리온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재를 나섰다. 생각보다 자상한 아버지 같았다. 가장 큰 산이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해결되니, 헬리온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11. 방어는 최선의 공격(2) 24.07.05 21 0 12쪽
10 10. 방어는 최선의 공격(1) 24.07.03 23 0 11쪽
9 9. 천재에게 찍혔을 때(2) 24.07.01 21 0 10쪽
8 8. 천재에게 찍혔을 때(1) 24.06.28 22 0 12쪽
7 7. 수정 불가, 역행 가능(4) 24.06.26 24 0 10쪽
6 6. 수정 불가, 역행 가능(3) 24.06.24 23 0 11쪽
5 5. 수정 불가, 역행 가능(2) 24.06.21 32 0 12쪽
4 4. 수정 불가, 역행 가능(1) 24.06.19 25 0 10쪽
» 3.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3) 24.06.17 31 0 13쪽
2 2.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2) 24.06.14 54 0 10쪽
1 1.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1) 24.06.14 58 1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