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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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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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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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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1)

DUMMY

사회에 나오고 처음 맞는 긴 휴식이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1.5룸의 작은 전셋집에서 생활하던 윤명진은, 혼자 쓰는 방이 맞나 싶어질 정도로 넓은 방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죽였다.

침대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나갈 생각도 없었다. 때 되면 알아서 오는 식사와 간식, 그리고 무릎 위에서 잠든 따끈하고 부드러운 고양이까지 있는데 굳이 나갈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탐스러운 포도알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복잡한 생각 따윈 저 너머로 날아갔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거울에 비친 모습과 눈이 마주친다. 색소가 옅고 다채로운 것이 누가 봐도 동양인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십 년도 전에 쓴 초고에 집어넣는 게 어디 있냐.’


이곳은 그가 아직 교복을 입던 시절, 노트에 휘갈겨 쓴 소설의 ‘초고’ 속이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명진은 이 방 침대에서 눈을 뜨기 직전 상황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윤명진, 30세.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작은 기업에 재직 중인 사회인. 특출날 것 없는 이력을 가진 그는 그날도 상사에게 대차게 깨진 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아 물고 늘어지는 엉뚱한 불씨 정도는 가볍게 튕겨낼 수 있었다. 오늘은 ‘수정사항을 알려줬더니 왜 그대로냐’라는 레파토리였다. 아무래도 본인이 수정 취소를 요청한 건 까먹은 듯하다.


“진짜 그 나이 먹고 그러고 싶나, 씨발···.”


튕겨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폭언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는 없다.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명진은 한숨을 내쉬며 하이볼 세 캔과 고양이 전용 습식 캔을 계산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취미라곤 없는 삶에서 스트레스를 풀기에 알코올만큼 적합한 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의 발걸음 소리와 편의점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삑삑삑삑.

일정한 속도로 현관 도어락을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매애앵, 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아이고, 우리 라피. 기다렸어?”

“앩옹.”

“그래, 그래. 네 간식도 사 왔어. 들어가자.”


대학생이 되고 자취를 시작한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 있으나 마나 한 아버지와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어머니 정도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으므로. 명진의 버팀목은 오로지 이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집 앞에 쓰러져 있던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간 것도, 고양이에게 ‘라피’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그러나 그 충동이 지금의 명진을 있게 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대충 넥타이만 끌러 놓고 습식 캔을 땄다.


“애애앵.”

“알았어, 금방 되니까 기다려. 밤이니까 조금만 줄게.”


접시에 내용물을 조금 덜고, 제 몫의 술도 챙긴 명진은 작은 앉은뱅이책상 앞에 털썩 앉았다. 라피는 그가 바닥에 접시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야, 매정하다. 형이 간식 사 왔는데 감사 인사는 해야지.”


술은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한 듯 헛소리가 술술 나왔다.

치익. 캔을 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명진은 한 손으로 라피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첫 모금을 넘겼다. 달콤하니 기분 좋은 맛이었다.


“내가 너 데리고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응? 라피이.”


고양이의 이름도 술기운에 정해졌다. 당시 명진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생이었고, 원체 책 읽는 걸 좋아했던 그가 군대에서 읽을 만한 책을 다 읽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성경이었다. ‘라피’라는 이름은, 천사 라파엘이라는 이름에 대한 흐릿한 기억과 술기운으로 탄생했다. 여전히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니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술을 몇 모금 더 들이킨다. 그새 접시를 깔끔하게 비운 라피는 명진의 손에 착 달라붙어 애교부렸다.

지이이잉.

평화로운 상념에 빠지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강하게 진동한다. 한숨을 내쉬고 휴대전화를 집어 든 명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업무 메일 계정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 시간에 업무 메일을 보내지?’


시곗바늘은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캔에 남은 술을 탈탈 털어 마신 명진은 신경질적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메일을 확인했다.

업무 메일로 왔지만, 다행히도 업무 관련 내용은 아니었다. 오래전 가입한 소설 연재 사이트에서 보낸 메일이 액정에 표시된다.


‘그러고 보니까, 고등학생 때 잠깐 연재랍시고 조금 올렸었지···. 이게 그때 만든 이메일일 줄은.’


방치해 두었던 이메일 주소는 그의 업무 메일이 되었다. 그동안 업무 외에 오는 메일은 스팸 정도였기에, 소설 연재 사이트에 가입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메일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1건 있습니다. 지금 확인하세요!]라고 적혀 있다. 누군가가 개인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용케 휴면 계정 전환이 안 됐네.’


명진은 충동적으로 메일에 기재된 링크를 눌러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정말로 메시지가 한 건 와 있었다. 내용은 간결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최신화까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언제 올라오나요?]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건 기뻤다. 하지만 그는 바쁜 현대 사회인이 되었고, 당시 작성한 산만한 초고와 설정 노트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명진은 상대방의 마지막 접속 날짜를 보았다.

5년 전. 답장할 타이밍은 지나도 한참 지나 있었다.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천천히 문장을 입력한다.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니 기쁩니다. 다만 저는 현재 직장인이고, 만약 다시 쓴다고 하더라도 상당 부분 손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답장을 보낸 명진은 다음 캔을 땄다. 오랜만에 옛날 글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했다.


“뭘 이렇게 많이 쓴 거야.”


작품란에 이름을 올린 처음이자 마지막 판타지 소설, 〈시간의 끝을 향하여〉는 30화 정도에서 끊겨 있었다. 무심코 1화를 클릭한 그는 천천히 옛글을 읽어 내려갔다.


나쁘지 않다. 딱 그 정도의 글이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글은 아닌 수준. 게다가 설정은 또 어찌나 조잡한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내용을 짜깁기한 느낌까지 들었다.


‘대체 왜 에너지가 세 개나 필요한 건데? 신성력이랑 마력이면 됐지, 에테르는 또 뭐야.’


문장은 그럭저럭 봐 줄만 했으나 설정이 문제였다. 주인공 포지션이 딜러인지 힐러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명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다음 화를 눌렀다.


[마지막 화입니다.]


30화를 벌써 다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 명진이 쓴 글이지만, 묘하게 입체적이었다. 문장력과 설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등장인물의 행동에서는 실제 관찰한 사실을 쓴 것 같은 생기가 느껴졌다.

그때, 휴대전화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뭐야, 답장이 왔다고?’


최종 접속이 5년 전인, 명진에게 메시지를 보낸 계정으로부터 온 답장이었다. 그가 답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은 계정에 바로 알림이 갔다는 건 조금 미심쩍었지만, 답장의 말투는 아주 정중했다.


[답장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답장에 명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식 계약은 무슨. 이제 설정도 잘 기억 안 나는데. 출판사 직원이 맞긴 해?’


공연히 술만 한 모금 더 마신다. 슬슬 취기가 오르는지 온몸이 나른했다. 더 늦기 전에 씻지 않으면 분명 내일 잔뜩 구겨진 옷을 입고 출근하게 될 테다.

그러나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명진의 무릎 위를 차지한 고양이의 따끈한 체온까지 더해지니 더욱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찬란한 금빛 글자가 나타났다.


[정식 계약을 체결하시겠습니까?]


그 아래에는 친절하게 예, 아니오를 선택하는 란까지 있었다. 그는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글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술에 취해서 헛걸 보나. 공중에 글자가 다 뜨고.”


평소보다 많이 마신 탓이리라. 명진은 아직 평일이고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잊지 않았다. 숙취가 없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손을 내저어 글자를 흩으려 했다. 몇 번 휘적거리자 글자는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게임도 아니고. 공중에 글자가 왜 떠.’


피식 웃은 그는 정말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그의 의지에 반항이라도 하는 듯,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결국 명진은 제 몸과 타협했다.


‘딱 10분만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는 거다.’


명진은 앉은뱅이책상에 엎드렸다. 이런 자세로 눕기도 오랜만이었다. 고양이는 여전히 무릎 위에 있었다.

눈을 감은 순간 밝은 빛이 터져 나온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피곤함에 절어 있는, 게다가 술까지 마신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무슨 일인지 확인할 수 있을 리 없다. 명진은 그렇게 까무룩 잠에 빠졌다.






‘그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일어났어야 했다.’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 후 들어온 건 20대 초반의 어린······


“도련님? 갈아입을 옷이랑, 부탁하신 거 가지고 왔어요. 어디에 둘까요?”


메이드였다.

아무래도 윤명진은, 그가 쓴 소설 속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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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8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9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10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8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9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9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9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1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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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1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1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1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2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4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0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2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5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3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7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20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7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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