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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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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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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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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가족조차 의심하지 않은 사실을 주인공에게 의심받다니, 참 편리하게도 돌아가는 클리셰였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었기에 딱히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여기서 주인공의 의심을 사서 추후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어물쩍 넘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헬리온은 절반 정도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레온하르트, 날 ‘다시’ 보고 싶었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거야?”

“뭐야, 기억 안 나? 그러니까 언제였냐면···, 아. 열두 살 봄이었어.”


헬리온은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여 입을 여는 모습은 열여섯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냐면···.”






레온하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열두 살 때 의식불명에 빠져서 지난겨울에 일어났고, 그전에 있었던 일들은 다 기억이 애매하다는 거지? 음. 알겠어. 그런 거라면야.”

“어릴 때 만났던 건 기억이 안 나서. 미안하다.”


헬리온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레온하르트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 미안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으음, 그럼 내가 설명해줘야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온하르트는 구석에 놓인 의자를 끌고 와 헬리온과 마주 보고 앉았다. 올리브색 눈은 신이 난 듯 초롱초롱했다.


“그러니까, 그때가 열두 살 때고 지금 우리가 열 여섯살이니까···, 882년도에 있었던 일이네. 그해 봄에 레바나 산맥에 큰 균열이 열렸어.”


균열. 이 세계관의 ‘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게임이나 소설에 등장하는 던전과 비슷한 현상이다. 마수는 그 틈을 통해 현세에 간섭했고, 그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생명에 큰 지장을 준다. 균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흘러나온 마수를 처리한 후, 잠잠해진 틈을 타 균열 안으로 들어가 내부에 있는 마석을 깨트려야 했다. 레온하르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수도에서도 사람을 파견하긴 했지만, 로타님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아무리 마법을 쓰더라도 빨리 가는 거엔 한계가 있고. 그런데 네 아버지가 영지에 있던 검사와 마법사들을 이끌고 균열을 깔끔하게 정리한 거야.

나도 그땐 어렸지만,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균열이 열리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는 해도 힘이 약해진 건 아니라서 말이지. 사망자가 한두 명씩은 나오는 게 일반적이었거든. 그런데 네 아버지와 함께 균열을 정리한 사람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어!

그래서 아버지가 직접 로타님에 갔지. 민간인의 피해 없이 안전하고 신속하게 균열을 닫았으니까, 그 공을 치하한다는 의미로. 그때 나도 따라갔어.

어른들이 말하는 동안, 나는 몰래 빠져나와서 저택 이곳저곳을 탐색했어. 너희 집은 구조가 묘하게 복잡해서 결국 길을 잃었지만. 그러다가 너를 만난 거야.”


이야기가 길어지자,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라피는 몸을 일으켜 늘어지게 하품했다. 입가를 정리하는 고양이와 눈이 딱 마주친 레온하르트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양이를 가리키며 물렀다.


“그···, 이 고양이는 네가 키우는 거야?”

“아, 응. 안 데려오려고 했는데, 멋대로 짐 사이에 섞여서 가방에 들어가 있는 바람에.”

“하하하, 당돌하네. 귀엽고. 이름은?”

“라피.”

“그렇구나. 라피 안녕~”


레온하르트는 천진한 얼굴로 고양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양이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겸연쩍게 웃으며 애매하게 내민 손을 거둔 레온하르트는 다시 헬리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쨌든···. 그날 하루는 너랑 보냈어. 근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기 직전에 빠져나와 알테스로 돌아왔지. 그러고 보니 그때도 네가 조금 전 같은 상태였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조금 전 같은 상태라면···.”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고 해야 할지, 숨이 모자라서 빠르게 호흡했다고 할지. 조금 전에도 그랬잖아? 어쩌면 지병일지도.”

“그럴 리가. 지난겨울부터 여기 오기 전까지 의사를 몇 번 만났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경과를 지켜보자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의사는 헬리온의 회복력에 놀라기만 할 뿐, 지병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게다가, 만약 지병이 있었다면 소피나 클레어 둘 중 한 명은 병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몸조심해라. 학기 시작하면 꽤 힘들어질걸?”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야지, 뭐···. 성적 잘 받는 데에는 크게 흥미 없고.”

“의외네. 그래도 여기는 추천장이 있거나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만 오는 데잖아? 이왕 온 거 정점을 노려봐. 차기 백작이니까?”

“작위도 딱히··· 잠깐, 추천장이나 능력?”

“몰랐어? 6급 이상의 검사나 마법사, 아니면 마탑주의 추천장이 있어야 해. 아니면 학교 자체 시험을 치거나. 네 아버지가 7급 검사잖아.”


그런 설정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마법, 즉 에테르가 없는 사람도 입학할 수 있는 대신 추천을 받거나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규정. 가물가물한 머릿속을 헤집자 귓가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지?’


손을 뻗어 귓불을 붙잡자 차가운 금속이 만져졌다. 삼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뚫어본 적 없는 귀에 귀걸이 같은 것이 자리한다.


[[□□□의 눈물]을 매개로, [□□□ □□□: 초고]에 접속합니다.]


금속은 헬리온의 움직임을 실행으로 받아들였는지, 그의 앞에 금빛 책을 보여주었다.


‘아니, 이걸 갑자기 주면 어쩌자는 거야.’


“헬리온? 귀 붙잡고 뭐 해. 그나저나 귀걸이 괜찮네. 베일린이 보면 좋아할 듯. 아티팩트야?”


이 세계에선 마석을 가공한 마도구 중 신체에 착용할 수 있거나 무기로 쓰이는 것을 아티팩트라 칭했다. 책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지, 레온하르트는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귀를 붙잡고 있는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 자세를 바로잡은 헬리온은 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나도 잘 몰라. ···베일린이라면, 베일린 뮐러?”

“오? 잘 아네. 맞아, 베일린 뮐러. 걔도 이번에 여기 입학하거든.”


뮐러 자작가의 외동딸 베일린 뮐러. 그녀는 초고에서 레온하르트의 최측근이자, 주인공인 그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등장한 동료였기에 까먹을 수 없었다.


‘이건 초고랑 똑같네. 베일린은 영지보단 수도에 있는 작은 저택에 더 많이 머물렀다는 설정이었고. 놀기 좋아하는 왕자랑 만나 친해졌다는 것도 맞는 것 같군.’


“수도 저택에 더 있다가 입학식에 맞춰서 올 거라던데. 하긴, 나 같아도 수도에 집이 있으면 그렇게 하겠다.”

“넌 궁이 있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이, 물론 궁은 있지만. 너무 딱딱하단 말이야. 내가 다가가면 일하는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쁘고.”

“도망을 간다고? 왜?”


왕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렇다기엔, 레온하르트의 말투로 보아 특히 그에게 심한 듯했다. 반짝이는 금발에 올리브색 눈은 확실하게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아직 외모도 행동도 어린 축에 속하는 왕자가 추잡한 소문을 달고 다닐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건 나도 모르지. 단순히 내가 왕자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간에. 아, 그리고 어제 사감 선생님께 들었는데, 4층엔 세 명밖에 없나 봐.”

“오, 그건 편하네. 그런데 방은 네 개 아니었어?”

“하나는 그냥 비워두는 거 아닐까? 이 층은 다 독실이니까, 재능이나 지위 둘 중 하나는 있겠지. 아까 이름은 못 봤어?”

“그래. 내 이름 확인하고, 네 이름 보자마자 놀라서 다른 건 신경도 못 썼다.”

“다들 내 이름부터 들으면 갑자기 날 피하거나 딱딱하게 대하니까··· 불편하단 말이야, 그런 거.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왕자를 앞에 두고 헬리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는가, 이건 모두 고등학생 윤명진이 어린 시절의 왕자를 장난꾸러기로 설정한 탓이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방엔 왜 온 거야?”

“아, 원래 목적을 까먹을 뻔했네. 저녁 같이 먹으러 가자고. 곧 저녁 시간이야.”






입학식은 아직이었지만, 먼저 입사한 학생들을 위해 학생 식당은 열려 있었다. 남학생은 그들 두 사람뿐이었지만 여학생은 벌써 꽤 들어온 모양이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식당 밖으로 새어 나온다.


“꼭 그러고 다녀야겠어? 숨길 생각 없다며.”


셔츠와 어두운 베스트, 바지만 대충 걸친 헬리온은 모자를 푹 눌러 쓴 레온하르트를 보며 말했다. 그는 모자를 깊게 눌러 쓴데다가, 목 윗부분 단추는 열려 있었고 바지도 상태가 썩 좋진 않았다. 확실히 왕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아니···~ 그래도 입학식 전부터 괜히 눈에 띄는 건 싫은데, 얼굴 보이면 웬만해선 알 거 아냐. 그래서 공식적인 자리에도 거의 안 나갔는데···.”

“너는 왕자라는 애가 얼굴 팔리는 걸 싫어해서 어떡하냐. 대인기피증은 없어 보이는데. 이유라도 있어?”

“으음,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그냥······웃으면 안 된다?”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안 웃을 테니까 말해.”


한참 뜸을 들이던 레온하르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운 투로 입을 연다.


“삼촌 때문에 그래. 내가 신문이나 그런 데에 얼굴이 나오면 항상 연락하시는데, 뭔가 대하기 불편하단 말이지. 그런데 괜히 학교에서 눈에 띄어서 취재라도 와 봐. 아예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가 삼촌이라 부를만한 인물은 한 명뿐이다. 현왕의 이복형, 데클란 이젠스. 알테스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동네 수스로에 기거하며, 현 수스로 공작인 사람.

그리고 초고 상 반역의 주축이었다.


‘데클란이 벌써 레온하르트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초고에서 데클란은 레온하르트에게 에테르를 다루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시점부터 레온하르트에게 관심을 표할 예정이었다. 그 또한 에테르를 잘 다루는 축에 속했지만, 선왕은 그가 아닌 정통한 이복동생을 왕세자로 올렸다는 사실에 대한 비틀린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데클란은 어느 시점부터 통제력을 잃는다. 원인은 설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반역을 실행한다는 진행이었다.


“뭐, 나쁜 말은 안 하시지만 말이야··· 생각해 봐, 너희 아버지나 어머니가 평소에는 연락조차 안 하다가, 큰 소식이 들릴 때만 연락한다면 무섭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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