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최근연재일 :
2024.09.09 18: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94
추천수 :
1
글자수 :
182,644

작성
24.06.26 18:00
조회
24
추천
0
글자
10쪽

7. 수정 불가, 역행 가능(4)

DUMMY

비슷한 경험이라면 있었다.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한 후 연락 한번 없던 아버지가, 취직했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갑작스레 연락해왔을 때.

무섭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아,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옅은 감상만 남았을 뿐이다.

당당하게도 돈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명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인생 첫 불효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숨죽이고 사는 아이였으니까.


“그건 좀 불편한 상황이긴 하네, 나 같아도 좀 그래.”

“그렇지? 그런 거라니까.”


그는 지금 혼자였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헬리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스 왕국은 아직 평화롭다. 왕이 건재하고, 왕자는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공작을 만나 본 적도 없는 헬리온은 섣부른 판단은 삼가야 한다고 거듭 되새겼다.


“그러니까 식당에 들어가서부터는 ‘레온하르트’라고 부르지 말 것.”

“그럼 뭐라고 불러.”

“으음. 이것저것 있잖아? 레오라던가, 레온이라던가. 레니는 너무 여자애 이름 같은가? 아, 어머니는 가끔 ‘아인’이라고도 불렀는데.”


‘아인’은 레온하르트의 미들네임이었다. 찬란한 금빛이 꼭 해 질 녘의 아인 호수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의 힘을 현현할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복선이기도 했고.’


현현되지 않은 무한계의 근원. 그 세 층의 베일*을 거쳐 이 땅에 내려앉은 신의 힘을 방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레온하르트 아인 이젠스.

물론 명진이 쓴 소설은 30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고, 쓰던 초고조차 미완결인 불확실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 번 쌓아 둔 배경 소재에 관한 지식과 전체적인 흐름, 결말은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초고를 보니 당시 구상했던 내용이 떠올라 다행이었다.

동시에 직관적인 고등학생 시절 작명 센스가 여러모로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가족끼리 부르는 애칭을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적당히 골라 봐. 너도 짧게 부르는 편이 훨씬 편하잖아? 아, 뭣하면 너도 다르게 불러줄까? 너는 모를 것 같지만, 네 이름을 아는 사람도 적지 않거든.”

“그건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식당에서 나오면 다시 ‘레온하르트’다.”

“너무 딱딱하네, 헬리. 마음대로 해. 사람들 있는 데서만 피해 주면 되니까.”


몇 개월간 클레어에게서만 불렸던 애칭을 불리니 조금 징그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미들네임도 없고, 달리 줄이는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헬리온은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마주 보았다.


“알겠어. 들어가자, 레오.”






식사는 훌륭했다. 로타님에 있던 지난 몇 개월은 부드러운 죽이나 간이 거의 되지 않은 싱거운 음식만 먹어야 했다. 게다가 이전 세계의 그는 미식과는 연이 없었다. 급식과 학식, 구내식당과 편의점으로 이루어진 입이 고급 이어봤자 얼마나 고급이겠는가.

오랜만에 맛보는 염분은 그의 미각 신경을 자극했다. 부드럽게 씹히는 커틀릿은 소스와 어우러져 최상의 맛을 냈고, 곁들여 나온 구운 채소나 수프도 평균 이상이었다. 후식으로 제공되는 베리 류 과일도 신선했다.

레온하르트는 넉살 좋게 웃으며 음식을 받더니, 헬리온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음식을 해치웠다. 그는 가만히 앉아 베리를 씹으며 헬리온이 식사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날 봐?”

“···할 게 없으니까?”

“부담스러운데. 다 먹었으면 먼저 가도 상관없어.”

“넌 혼자 뒀다간 어디서 쓰러진 채로 발견될 것 같아서 무서워. 시체 처리하는 취미는 없거든.”

“뭐? 그 정도는 아니다.”

“아, 라피 줄 거 있나 물어보고 올까?”

“그거 괜찮네. 갔다 와, 레오.”


왕자로서의 체면도 없는지, 레온하르트는 그 말 한마디에 웃으며 식당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잠깐이지만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헬리온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헬리, 고기 남은 건 있다는데. 라피가 먹을까?”

“먹겠지, 고양이니까······.”


*


몇 시간 후.

라피에게 짓눌린 채 침대에 누워 있는 헬리온은 몇 번이고 초고를 다시 읽었다. 앞으로의 전개를 조금이라도 머리에 넣어두는 편이 삶의 질을 올려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공부야 시키면 하겠지만, 여기서까지 공부하고 싶진 않고. 돈은··· 사실상 내 돈은 없지. 학비도, 수중에 있는 돈도, 하다못해 지금 입은 옷까지 전부 백작 주머니에서 나왔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돈을 벌 만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헬리온은 16세이고, 체구도 작아 나이를 속이고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번듯한 귀족 신분을 가진 그를 일하게 둘 리가 없다.


‘진짜로 사업 투자 같은 거라도 해야 하나. 지금까지 주식에도 손을 안 댔는데.’


벼락부자가 되는 꿈은 접은 지 오래였다. 괜히 멋모르고 투자했다가 돈을 날리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주식이나 코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초고에 뭐 괜찮은 거 안 적어 뒀나? 새로 개발되는 땅이라던가, 발명품이라던가······. 그냥 이 초고를 수정할 수 있으면 좋겠구만.’


한참을 뒤적거리던 헬리온의 눈앞에 밝은 금빛이 터져 나왔다. 이제 슬슬 익숙해질 참이었다. 헬리온은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전개가 완성도 상승에 일정 부분 기여합니다.]

[완성도: 0.9%]

[일부 플롯이 추가로 확정됩니다.]

[초고의 편집은 행동에서 기인한 변화만을 인정합니다.]


쥐똥만큼 올라간 완성도에 헬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퍼센트로 수치를 표시하는 걸 보면, 전체는 100%일 텐데. 지금이 0.9%라고? 장난하나···.’


게다가 뒷부분은 이전에 띄웠던 말의 반복이었다. 헬리온에게는 그 메세지가 ‘요행을 바라지 말고 네 앞길은 네가 잘 개척해 나가라’며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으나,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그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기숙사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적당한 시간에 눈을 뜨고, 레온하르트가 밥을 먹으러 가자며 방문을 열어젖히기 전까지 침대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그 외 남는 시간에는 신문이나 책을 읽었다. 헬리온은 왕자에게 의심받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말 많은 왕자는 그저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입학식 당일, 어쩐 일인지 레온하르트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벌써 교복을 갖춰 입은 헬리온이 문을 두드리자, 자다 깬 듯한 몰골의 왕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왜, 나 더 잘 거야.”

“입학식은 안 가고?”

“응. 저번에 말했잖아, 얼굴 팔리기 싫다고······ 흐아아암.”


늘어지게 하품한 레온하르트는 입학식이 끝나면 깨워 달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헬리온은 하는 수 없이 홀로 입학식이 열리는 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학생들은 벌써 꽤 모여 있었다. 신입생 좌석을 한 번 둘러본 헬리온은 사람들을 헤치고 적당히 빈 자리를 골라 앉았다. 덩치가 작은 게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그가 앉은 뒤로, 양 옆자리엔 여학생이 앉았다. 괜히 불편해진 헬리온은 자리를 옮기려 했으나, 이제 와선 마땅히 남은 자리도 없었다. 포기하고 자세를 편하게 바꾸자, 왼편에 앉은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

“···어, 그래.”

“반응이 왜 그래? 입학식인데 신나지 않아?”


헬리온은 적당히 눈을 피하며 대꾸했다. 어제 밤 갑자기 생겨난 능력에 대해 생각하기에도 모자란 머리 용량은 새로운 사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딱히.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낭만이 없네. 입학식 식순 못 봤어? 무지하게 기니까 지금은 나랑 떠드는 게 더 재미있을걸.”

“이런 건 원래 길잖아. 그리고, 나는 널 방금 처음 봤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아, 통성명이라도 할까? 프레이야 하이트야. 너는?”


이름을 듣자마자 헬리온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구불구불한 짙은 밤색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동자. 둥근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 그녀는 정말로 프레이야 하이트였다.


‘레온하르트가 왔으면 인맥을 쌓을 수 있었을 텐데, 얼굴 팔리기 싫다고 처자기만 하고···. 입학생은 적어도 관계자가 많아서 누가 누군지 구별도 안 되겠구만.’


“왜 그래? 날 본 적이라도 있어? 나는 이름 댔으니까, 너도 이름 말해줘.”


모를 수가 없다. 그녀는 추후 레온하르트의 큰 전력이 되는 인물로, 부드러운 성격이나 외모와 달리 꽤 포악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 ‘신벌의 대리자’라는 별명이 붙는 인물이었다. 헬리온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아니, 처음 봐. 나는 헬리온 딜라드.”

“오, 그 딜라드 백작네 장남이 너였구나?”

“···너야말로 나를 알아?”

“너를 안다기보단, 4년 전의 그 ‘균열 사건’은 유명하니까. 개인적으로 네 가족에 대해 조사를 좀 했을 뿐이야.”


뒷조사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은 프레이야는 서늘한 내용과 달리 생긋 웃었다. 이름이 알려졌다는 레온하르트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홀의 조명이 어둡게 조절되고, 단상 위만 밝게 비춘다. 일순 조용해진 홀 내부에 프레이야는 신이 난 듯 말했다.


“이제 시작하려나 봐. 어떡해. 너무 떨려.”

“떨리면 좀 조용히 해 줘라······.”


단상 위로 누군가 올라섰다. 체구는 작았으며, 남색 교복이 아닌 어두운 붉은색 스커트가 돋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오렌지빛 단발머리를 양옆으로 절반씩 묶어 흰 리본으로 고정한 모습은 사랑스러움을 더해주었다. 앞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선명한 붉은 눈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몇몇 학생들은 그 외모에 감탄하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헬리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가의말

*음존재의 세 베일: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오르. 카발라 사상에 등장하는 개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11. 방어는 최선의 공격(2) 24.07.05 23 0 12쪽
10 10. 방어는 최선의 공격(1) 24.07.03 24 0 11쪽
9 9. 천재에게 찍혔을 때(2) 24.07.01 22 0 10쪽
8 8. 천재에게 찍혔을 때(1) 24.06.28 23 0 12쪽
» 7. 수정 불가, 역행 가능(4) 24.06.26 25 0 10쪽
6 6. 수정 불가, 역행 가능(3) 24.06.24 23 0 11쪽
5 5. 수정 불가, 역행 가능(2) 24.06.21 33 0 12쪽
4 4. 수정 불가, 역행 가능(1) 24.06.19 25 0 10쪽
3 3.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3) 24.06.17 31 0 13쪽
2 2.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2) 24.06.14 55 0 10쪽
1 1.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1) 24.06.14 59 1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