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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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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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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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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소년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헬리온보다 한 뼘 정도 큰 키 덕분에 그늘에 가려진 소년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올리브색 눈이 반짝였다.


“어?”

“가방, 무거워 보이길래. 기숙사 들어가는 거 맞지?”

“아, 응.”

“들어다 줄게. 난 어제 들어와서 지금 빈손이거든.”

“···그래, 고맙다.”


소년은 가뿐히 가방 두 개를 들었다. 전혀 무겁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쫓아가며, 헬리온은 체력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기숙사 입사는 이번 주부터 되긴 하지만, 입학식에 맞춰서 오는 애들이 많은데. 멀리서 왔어?”

“응. 로타님.”

“멀긴 머네. ···자, 이름 확인해 봐. 방까지 옮겨다 줄게.”


헬리온은 눈을 굴려 제 이름을 찾았다. 4층 왼쪽 복도 제일 끝에서 한 칸 앞. 독실인 듯했다.


“4층이야. 왼쪽 복도 맨 끝에서 한 칸 앞···”


옆방, 즉 복도 제일 끝 방에 적힌 이름을 본 헬리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는 헬리온을 향해 소년은 의문을 표했다.


“왜? 아는 이름이라도 있어?”

“어, 응···? 아니···.”

“맞는 거야, 아닌 거야? 하하. 가자. 4층이면 꽤 올라가야 하니까.”


소년을 따라 계단을 오르며 헬리온은 생각에 잠겼다. 다른 이름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옆방 주인의 이름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 이젠스.

소설〈시간의 끝을 향하여〉의 주인공이자, 이젠스 왕국의 왕자.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곤 공식 석상에 얼굴을 거의 비추지 않아,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왕자를 국민들은 사랑했고, 곧 왕세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젠스 왕국은 후계를 정하는 방식이 특이했다. 우선 사생아에게도 ‘왕자’의 지위를 주었다. 물론 계승 순위에선 적자가 우선되지만, 적자가 없는 경우 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사실상 동양에 가까운 제도지, 이건. 고등학생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거야.’


또한 왕자가 여러 명이건 한 명이건, 마지막 왕자까지 18세가 지난 후에야 정식으로 왕세자를 임명했다. ‘왕가의 혈통을 이은 이라면 누구라도 왕이 될 자격을 가진다’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탓이었다. 이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아직 왕자였고, 초고에서도 그러했다. 헬리온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초고의 내용을 되새겼다.


‘레온하르트가 이 학교에 입학하는 건 맞아. 동료도 여기서 만나고···. 그리고 그가 18세를 앞둔 어느 날, 왕이 건강 악화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지. 그 공백은 왕비가 대신 채웠고. 왕세자 임명권은 왕에게 귀속된 양도 불가능한 권리라서 레온하르트가 왕세자가 되지 못했어.’


그리고 그 틈을 타 반란이 일어났다. 왕은 혼수상태, 왕비는 사실상 구금. 반란의 주모자는 현왕의 이복형이었다.

그 반란에 가담한 사람이, 초고의 헬리온 딜라드였다.


‘대체 초고에서 얘는 왜 반역에 가담한 거야?’


헬리온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헬리온 딜라드의 분노가 왜 그렇게까지 커졌어야 했는지 명확하게 설정해두지 않은 고등학생 시절의 자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왕자에게 빌붙으면 살기야 살겠지만, 원래 주인공 근처에는 사건사고가 많은 편이라고.’


헬리온은 ‘안 죽고 편안하게 사는’ 걸 원했지, ‘주인공과 함께 어려움을 헤치고 해피 엔딩에 도달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생각이 깊어진 만큼 걸음이 느려지자, 가방 두 개를 들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계단을 오르던 소년이 뒤돌아 말을 걸었다.


“힘들어? 먼저 올라갈까?”

“아, 아니야.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미안.”

“뭘 미안할 것까지야.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름이 뭐야?”


긴 계단의 끝이 보였다. 힘이 전혀 안 들었다곤 할 수 없는 헬리온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헬리온.”

“헬리온이구나. 헬리온··· 아, 그럼 네가 그 딜라드 백작네 장남이야?!”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헬리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어갔다.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은 몰랐네! 로타님은 북쪽 끝에 있으니까 수도까지 소식이 잘 안 오거든. 심지어 여긴 알테스니까, 너는 개인 교사를 두거나 로타님에 있는 학교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고 싶다고 했어. 로타님은 너무···.”


소년의 말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라는 건,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초고에 그런 묘사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헬리온이지만 헬리온이 아니다. 만난 적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헬리온과는 초면임이 분명했다.


“너무 뭐?”

“아···, 너무 추워서, 겨울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도 꽤 오는 편이고.”

“로타님에서 태어났으면서?”


소년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헬리온은 정말로 겨울을 싫어했다. 난방도 잘 되지 않는 단칸방에서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런 기다림은 처음에는 하루, 그다음엔 일주일. 더 나중엔 한 달 이상까지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그는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몇 년 후엔 세상 모든 것에 기대를 품지 않게 되었다.

좋지도 않은 과거 회상을 하며 조금 더 걸어가자 금세 방 앞에 도착했다. 손이 빈 헬리온이 먼저 문을 열고, 소년이 이어서 들어온다.

방은 꽤 좋았다. 기숙사라기보단 호텔 객실 같았다. 침대는 딜라드 저택의 침대와 비슷한 크기였고, 침구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소년은 바닥에 짐을 조심스레 내려두었다.


“여기 두면 돼?”

“아, 응. 고맙다.”

“별말씀을. 어차피 나도 4층이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그래. 맞다, 너는 이름이···?”

“어라, 말 안 했던가?”


4층까지 짐을 들고 올라와 열이 오르는지, 소년은 셔츠 소매를 걷고 모자를 벗었다. 반짝이는 금발이 땀에 젖어 있었다.

헬리온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설마 그런 클리셰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그런 헬리온의 속을 알 리 없는 소년은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온하르트 이젠스. 잘 지내보자, 헬리온.”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헬리온은 술이 간절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로타님에서 지낼 땐 나지도 않던 술 생각이 지금에 와서야 미친 듯이 났다. 고양이는 가방을 열자마자 방안 이곳저곳을 탐색하더니, 헬리온의 옆에 앉아 잠을 청했다.


‘여긴 불경죄 같은 거 없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있겠지. 의회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왕실의 힘이 강력한데. 진짜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눈을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반짝이는 금발에 올리브색 눈, 평균을 조금 웃도는 키. 자신이 설정한 외모인데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아니 애초에, 이 동네에 녹색 비슷한 눈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소피만 해도 녹색 눈이고, 주인공 동료 중에도 녹색 눈이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왕자를 짐꾼으로······.’



그런 헬리온의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금빛 글자가 허공에서 반짝인다.


[완성도가 상승합니다.]

[현재 완성도: 0.52%]


‘저것도 올라간 거라고, 진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0.22% 올라간 수치였다. 신인지 뭔지, 그를 이 세상에 집어 던진 존재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는 여태껏 무한대의 기한을 준 의미도 파악하지 못했다.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눕자, 옆에서 잠을 청하던 고양이가 앩, 하고 항의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완성도와 불경죄 둘 다 중대한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 이 기숙사에 딱 세 명이 있는데, 그게 사감과 나와 레온하르트라는 거지.’


레온하르트의 말대로, 기숙사 입사가 이번 주부터 가능한 것과는 별개로 대부분 학생들은 입학식 날짜에 맞춰서 입사하는 듯했다. 헬리온은 로타님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도저히 저택 내의 돌봄에 익숙해지지 않아 빨리 나왔다. 사감을 제외하고 일주일을 이 넓은 기숙사에서 단둘이 지내야 한다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레온하르트는 왜 일찍 온 거지?’


이전 몇 개월 치의 신문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로는, 공식 석상에 잘 나오지 않는다 뿐이지 큰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석하는 듯했다. 게다가 그가 적은 30화까지의 내용은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이 입학하는 시점 정도부터가 시작이긴 했으나, ‘레온하르트가 기숙사에 일찍 들어왔다’는 설정은 없었으며 내용도 언급되지 않았다.


‘내가 놓친 게 있거나, 무언가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머릿속에 넣어 둔 생각만으로 상황을 전개하려니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헬리온은 그 책을 떠올려 소환하려 했다.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 ‘열람’의 추가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귀속 아티팩트: □□□의 눈물]

[아티팩트 접근 권한이 승인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아티팩트를 통해 [□□□ □□□: 초고]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에테르가 저장됩니다.]



한번에 많은 글자가 쏟아져 헬리온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 가는 문장이 없었다.


‘‘열람’의 추가 기능은 또 뭐야? 아티팩트는 왜 생기는 거고. 접근 권한이라니···, 에테르는 또 왜 저장되는 건데?!’


이 세계에서 에테르가 많아 나쁠 건 없지만, 에테르가 저장되는 순간의 느낌이 싫었다. 전력으로 달린 후 멈췄을 때와 비슷한 심장 박동. 물론 그 시간이 지나간 이후엔 오히려 몸이 건강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나빴다.자연히 숨이 가빠진 헬리온은 이불을 붙잡고 가까스로 심호흡했다.


“헬리온—들어가도 돼?”


똑똑, 문을 두드리며 들려오는 목소리는 레온하르트였다. 헬리온은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려 했지만, 떨리는 호흡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것도 잠시,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렸다.


“헬리온, 왜 대답을 안 해? 뭘 하고 있길래··· 어어, 너 괜찮냐?!”


황급히 달려오는 왕자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 기다리라는 의미였다. 손에 가로막힌 레온하르트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헬리온은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은은한 금빛이 그의 주변에 펼쳐진 것 같기도 했다. 이제야 괜찮아진 듯한 그의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레 다가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괜찮은 거 맞아? 왜 그래?”

“그냥 좀···. 별거 아니야.”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게 별 게 아니야? 입학식 하기도 전에 장례식부터 치르겠다.”

“진짜 괜찮다니까. 그냥··· 가끔 있는 일이야. 심호흡 좀 하면 괜찮아져.”

“흐음······.”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헬리온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으니.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오고 나서 마법 쓰는 걸 제대로 못 보기도 했고. 취급이 어떤지 모르겠단 말이지.’


저택에는 방한 마법이 걸려 있었고, 저택 외부로는 방어 결계가 있었지만, 그 외에 마법을 접한 적이 없다.  초고와 같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으나 에테르를 다른 이들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에테르라는 게, 체내에서 생성되는 거 아닌가? 왜 이런 식으로 외부에서 저장을···.’


다시 생각에 빠진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레온하르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헬리온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헬리온은 조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뭐, 뭐야?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음···, 내가 어릴 때 본 헬리온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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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수정 불가, 역행 가능(2) 24.06.21 33 0 12쪽
4 4. 수정 불가, 역행 가능(1) 24.06.19 2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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