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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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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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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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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벌써 3월 중순이 되었다.

헬리온은 이른 아침부터 눈을 떠 채비를 마쳤다. 볼품없이 마른 몸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평균에 거의 가까워진 모습을 갖추었다. 키도 조금 컸는지 옷을 새로 맞춰야 했다.

며칠 전에 손질한 머리카락이 어색했다. 괜히 머리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슬슬 출발해야 해요! 준비 다 되셨어요?”

“아, 네. 지금 나갑니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메이드의 이름은 소피였다. 그녀는 방문을 살짝 열고 부드럽게 웃으며 헬리온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요, 지금 아가씨도 나와 계세요. 아, 그리고 고양이는···”

“라피는 누님께 맡겨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어디서 들어온 고양이인지는 몰라도, 소피는 헬리온이 고양이를 아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기숙사에는 데려갈 수 없으니 동물을 좋아하는 클레어에게 라피를 부탁했다.


“웨앵.”

“라피, 넌 따라오면 안 돼. 가만히 있어.”

“와아웅.”


라피는 그의 결정에 항의하듯 울었다. 불쌍하지만 어쩌겠는가, 오히려 수도에 데려갔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는 게 더 큰일이다. 헬리온은 라피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 후 방을 나섰다.






사용인들은 헬리온에게 필요한 짐을 챙기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헬리온은 그 사이로 빠르게 저택을 가로질렀다. 뭐라도 돕고 싶었지만, 저번에도 비슷한 말을 하자 ‘도련님은 가만히 계시라’며 퇴짜를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보호라니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워만 있던 몸이 약한 건 맞았다. 다만, 그는 새로 얻게 된(명진은 원래 ‘헬리온 딜라드’에게는 에테르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 추정했다.)에테르 덕분인지 빠르게 회복했다. 그리고 환자에게도 적당량의 운동은 필요한 법이다.

활짝 열린 저택 문으로 사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소피는 벌써 그 앞에 서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헬리온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이제 정말로 출발할 시간이거든요. 준비는 다 되셨나요?”

“네. 제가 할 일도 별로 없던 것 같지만요.”


사용인들은 그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3년 만에 눈을 뜬 귀하디귀한 도련님이라 그런 것일까. 다행히도 그 도련님의 내용물이 바뀐 건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3년이나 누워 있었으니 당연한가.’


3년이란 꽤 긴 시간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만큼의 시간인데, 성격 좀 바뀐다고 이상할 건 없었다. 이쪽으로선 의심을 사지 않아 고마울 따름이었다.


“헤, 헬리.”


작은 목소리가 헬리온의 뒤에서 불쑥 들려왔다. 클레어는 말을 더듬고 소심했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었다. 헬리온은 아직 저보다 조금 키가 큰 클레어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누님.”

“이, 인사하러 나왔어. 잘, 다녀와.”

“네.”


원래의 헬리온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명진’은 귀여운 동생은 못 되었다. 삼십 년을 외동으로 살아 누나가 있다는 사실조차 어색했다.


“도련님! 아가씨랑 인사 중이세요? 이제 정말로 출발해야 해요!”

“지금 가겠습니다.”


클레어는 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헬리온은 마차에 올라탄 뒤,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초고와 가까워진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긴장인지 두려움인지, 기대감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 박동이었다.






“도련님,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소피는 ‘도련님’을 정말 살뜰히 챙겼다. 헬리온은 그런 헌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명시적인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산 기억 탓일까. 그녀의 봉사 정신을 마냥 기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 ‘옷 갈아입는 걸 도와드리겠다’며 들어왔을 땐 정말 곤란했다. 물론 헬리온의 강력한 거부로 없던 일이 되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실 거니까, 짐은 최대한 간소하게 챙겼어요. 아, 그리고 교복은 알테스에 있는 의상실에 연락해 뒀다고 들었으니까, 도착하자마자 의상실부터 들러야겠네요.”

“네에···.”

“맞다. 스노우 부인이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주셨거든요. 지금 좀 드시겠어요?”

“아, 네.”


스노우 부인은 딜라드 저택의 주방장으로, 디저트 만드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평소 단 걸 그리 좋아하지 않던 헬리온도 그녀의 디저트만큼은 잘 먹었다. 소피는 대답을 듣곤 옆에 놓인 큼지막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가방을 여는 순간, 무언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소피는 무심코 짧은 비명을 질렀고, 헬리온은 당황하여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뭐가 튀어나온 건지 확인하는 순간, 헬리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피?”

“애앵.”


고양이는 태평하게 헬리온의 무릎에 앉아 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소피는 어안이 벙벙해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고양이, 계속 가방에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라피, 내가 따라오지 말랬잖아.”


고양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헬리온과 눈을 마주쳤다. 고양이의 상체를 붙잡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쉰 헬리온은 자연스럽게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이미 출발했는데··· 역에 도착하면 누님께 연락해야겠습니다.”

“앗, 네. 도련님께서 데리고 가신다면야······.”






‘명진’이 만들어낸 이 세계는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렇기에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있는 법이다. 헬리온은 그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수도 시설이랑 공중위생 관념이 현대랑 거의 같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뿐만이 아니다. 철도 시설도 비교적 잘 발달해 있어, 딜라드 저택에서 로타님 역까지만 가면 수도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물론 KTX 같은 속도를 기대할 순 없고, 한두 번 정도 열차를 갈아타야 했지만 몇 날 며칠 동안 마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역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영지에 있는 클레어에게 ‘고양이는 이쪽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기차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생기자, 짐을 먼저 싣고 돌아온 소피는 헬리온에게 가져온 디저트를 잔뜩 먹였다. 헬리온은 배가 꽉 찬 상태로 기차에 올라탔다.


*


덜컹, 덜컹.


“도련님, 저기 보세요. 저기 큰 호수가 있죠? 저게 아인 호수예요.”


기차는 알테스에 거의 가까워졌다. 기차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아인 호수가 그 증거였다. 헬리온은 고개를 돌려 호숫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이 이 땅을 만들 때 가장 먼저 생명을 불어넣은 곳이라나 뭐라나.’


일주일 동안 대부분 방안에서 시간을 보낸 헬리온이 계획 정리 외에 할 만한 일은 고양이 쓰다듬기와 책 읽기밖에 없었다. 방 안에 있는 책은 헬리온이 의식불명 상태가 되기 전 그대로인지, 어린아이용 책이 많았다.

상식도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사양이다. 헬리온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건국 신화인지 뭔지부터, 역대 왕들의 업적을 담은 책도 있었다. 덕분에 이 세계에 대한 기초 상식은 갖추었다.


“이제 곧 역에 도착할 거예요. 고양이··· 는 잘 있죠?”


갑작스레 나타난 고양이가 못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소피 입장에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고양이가 도련님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습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헬리온은 가방을 아주 살짝 열었다.


“아주 잘 있습니다.”


답답할 만도 한데,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잠을 청하는 라피가 대견했다.


‘오 년 넘게 함께했으면 가족이지, 아무렴.’






얼마간 더 달린 기차는 이내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풍경은 출근길 지옥철을 떠올리게 했으나,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사람들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인파를 헤치고 사람이 몰린 곳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마차를 불렀다.

먼저 기별을 넣어 둔 덕에 의상실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었다. 교복을 받아 든 소피는 직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의상실을 나왔다. 헬리온은 그 뒤를 조금 느리게 따랐다.


“도련님, 혹시라도 힘드시면 언제든지 영지로 돌아오셔도 돼요. 아셨죠?”

“네. 항상 수고 많으십니다.”

“뭘요. 제가 맡은 일인데요. ···아, 도착했나 봐요!”


아카데미 기숙사 입구는 학교 정문과 다른 방향이어서 학교 건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헬리온은 짐가방을 꺼내는 소피를 보고 말했다.


“여기서부턴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며칠 동안 고생했어요, 소피.”

“괜찮으시겠어요? 혼자 들긴 힘드실 텐데···. 일어나신 지도 얼마 안 되셨잖아요.”

“지금까지 소피도 거의 혼자 다 들었는걸요. 그 정도는 들 수 있습니다.”

“네···.”


헬리온은 소피에게서 짐을 넘겨받은 후, 마차를 먼저 돌려보냈다. 이제 그의 곁에는 짐 가방 두 개와 고양이가 든 가방 하나가 있었다.


‘···이걸 이제부터 어떻게 들고 가지.’


소피를 빨리 돌려보내고 싶어 혼자 들 수 있다는 둥 허세를 부렸지만, 지금 그의 근력으로는 가방 세 개를 한 번에 옮기기 어려웠다.

방은 이미 내정되어 있고, 입사자는 입구에서 방 위치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니 헬리온에게는 가방 세 개를 들고 헉헉대며 입구까지 가 방 위치를 확인한 다음, 가방을 하나씩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들어나 볼까.’


라피가 든 가방은 어깨에 멜 수 있는 형태이나 나머지 두 가방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에, 헬리온은 세 개를 들고 입구까지 간다는 계획마저 지워버렸다.


‘메이드는 힘도 세야 하는 건가? 그냥 하나씩 옮기는 수밖에···’


입구까지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헬리온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 그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다.

묵직한 가방을 겨우 하나 들자, 등 뒤에서 불쑥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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