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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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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DUMMY

8화




깊어지는 밤, 황궁 인근 반점.

당가의 벽 자 항렬 남매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이번 방문의 소감을 나누는 중이었다.


당벽호의 첫째 아우 당벽준이 조금 아쉬운 얼굴로 운을 뗐다.


“형님, 이리될 줄 알았으면 연화를 데려올 것을 그랬습니다. 전하께서 이리 시원시원하실 줄이야. 막말로 연화가 왔다면 오늘 결판을 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연화를 만나보셨다면 필시 혼약을 맺으셨을 겁니다. 본가의 자손이라서가 아니라 연화를 마다할 사내가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그의 말마따나 당가는 한껏 고무된 상태였다. 신비와 견신이 사람만 좋으면 정혼을 시도해 보겠다며, 사실상 수락했기 때문.


“제 녀석 팔자지. 행여나 거절당하면 어쩌냐고 한사코 안 오겠다는 걸 어쩌겠느냐.”

“허허허, 고 녀석이 어느새 여인이 되었나 봅니다. 연모에 깊이 빠진 것을 보니. 참 시간 빠릅니다, 형님. 증손주들이 벌써 시집장가 갈 나이가 됐으니.”

“빠르지, 이놈의 무정한 세월. 아무튼, 이번에 아우들 누이들이 수고 많았네. 전하의 정보를 얻어낸 게 주효했어. 다행일세. 자네들 덕에 내 증조부로서 면이 서겠네, 허허.”


당가는 다른 방문파가와 달리 견신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단 2년 전의 일 덕분에 견신에게 호감이 있었고, 그 호감이 견신을 포기하지 않게 했다. 2년 동안 물 쓰듯 돈을 쏟아부어서 정보를 수집했고 그러다 운 좋게 덕왕 주견린의 측근 궁녀와 끈이 닿은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견신의 진면모를.


그 결과, 견신이 측근들과 있을 때는 2년 전 겨울에 저들이 경험한 견신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에게 견신이 무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당가의 세상에서 무공은 많고 많은 기술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당연화도 견신이 구룡무맥을 계승하지 못한 사실을 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고, 변함없이 견신을 원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강호 역사상 최초로 황실과 정혼을 맺는 셈이니, 이제 아무도 본가를 괄시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도 있으나 우형은 연화 그 아이의 성화를 더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좋으이.”

“허허허! 천하의 당벽호가 이리 증손녀 눈치를 보는 것을 알면 다들 배꼽을 잡고 웃을 겁니다.”

“손녀 없는 인사들이나 그럴 테지. 한데··· 검파 검가들이 전하께 관심을 보였다고?”

“예,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무당, 화산, 남궁 등이 전하의 검예를 두고 진일보했다며 평했다 합니다. 이 아우는 정왕 전하께서 당신의 품성을 봉인하셨듯 검예 또한 진실한 실력을 봉인하신 거라고 봅니다.”

“진일보··· 봉인··· 구룡분승을 익히시지 못했고 변변한 검법도 없으신데··· 아우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전부인가?”

“무당 장교와 대제자가 약수지도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 대목에서 당벽호와 형제자매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검이 아닌 철편을 병기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들도 무인이다. 약수지도의 의미를 안다는 이야기.


“약수지도!”

[약수지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당이 한 말이면 믿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남존(南尊)무당. 도가 검파 중 선두를 다투는 명문 검파다. 남존은 천하 남쪽 사람들이 존경한다는 뜻이고.


유(柔), 부드러움을 핵심 이치로 삼은 검예는 무당의 이름을 도가 검파 중 최상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 무당이 검에 관해 내린 평가라면 믿어도 좋다.


“그렇겠지. 검은 남존무당이지 않은가. 재미있구나. 만약 아우의 추측이 맞다면 이건 뜻하지 않은 수확이야. 심법도 없이, 검법도 없이 자기만의 검예를 이루고 있다? 그건 종사들의 발자취가 아닌가?”

“아닐 것도 없지요? 따지고 보면 대종사들은 하나같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인물들 아닙니까? 처음부터 고수는 아니었습니다. 천하의 그 검자께서도 본래 빈농의 아들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 종사 재목이 아니라는 법은 없지요.”

“듣고 보니 그렇군. 아무튼, 좋네. 연화의 지아비만 돼주셔도 본가로서는 만족인데 내년에 왕림하시겠다는 말씀도 그렇고. 정보대로 잠룡이시라면 그 또한 실없이 하신 말씀은 아닐 터.”

“아닐 겁니다. 무릇 용은 경거망동하지 않는 법이니. 아우도 궁금하기는 합니다. 대체 무슨 수로 성도까지 오시겠다는 말씀인지.”

“내 말이 그 말일세. 흠···! 전하께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지 궁금하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저 친왕으로 살다 가실 분이 아니라는 이야긴데. 만약 잠룡이 승천한다면, 승천하신다면···”

“본가는 승천하는 용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지요. 철심(鐵心)이 북숭 남존을 누르고 강호의 태두가 되는 겁니다.”


벽 자 항렬 형제자매들의 얼굴에 회심의 빛이 떠올랐다.


철심은 당가, 북숭(北崇)은 소림의 별호다. 그중 북숭은 천하 북쪽 사람들이 숭상한다는 뜻. 철심은 쇠처럼 단단한 심기를 의미했다. 소림이야 천 년 전 초조 달마 이래 선종 불교의 본산으로서 세를 구가한 지 오래됐지만 무당은 아니다.


저 무당이 남존을 별호로 얻은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사십여 년 전 태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때마침 제자 중 걸출한 종사가 출현한 덕분에 지금의 세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닐세.”

“예?”

“본가는 여의주가 되어드려야지. 올라타면 언젠가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여의주는 모든 용의 운명이고 숙명일세. 또 잠룡이 승천하려거든 여의주를 얻어야 하지 않나?”

“여의주···! 그렇다면 형님 말씀은···?”

“우선 전하를 예의주시하되 여차하면 제대로 투자할 준비를 해둬야 한다는 말일세. 다른 세력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그들을 압도할 수 있는 투자금을 준비해 둬야겠지. 질이든 물량이든 단숨에 압도할 수 있도록. 중원에서 구하지 못하면 비단길을 통해서라도.”

“흠··· 그렇다면 내년에 전하께서 예고대로 왕림하실 때를 맞춰서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때가 적기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거야.”


이전에는 화산의 절반 수준조차 되지 못했던 무당도 불과 몇십 년 만에 남존의 칭호를 거머쥐었는데, 당가라고 그러지 못한다는 법은 없잖은가.




깊어 가는 밤, 당가의 야심도 달빛처럼 그윽해져 갔다.




#




노란 햇살이 천지를 녹이고 흐르는 물골마다 개구리 울음소리 들려오는 봄. 황궁도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주기진의 건강은 몇 달 새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그에 문무백관 중 상당수는 몇 년 내 주기진이 이승을 떠날 거라며 점쳤다.


이는 기존 권력의 지반이 지각변동을 앞둔 셈. 고관대작은 물론 평소 북경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지방관들과 토호들. 국경 너머 이민족까지 주기진의 건강 상태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태자 주견심에게 달리 결격 사유가 없으므로 대부분, 권력의 과실을 기대하는 자 모두 그의 뒤로 일찌감치 줄 섰다.


처음부터 주군으로 선택했다는, 같은 편이었다는 인상을 심어준 순서대로 과실을 나눠 받는 법이었다. 물론, 영리한 자들은 교묘하게 덕왕 주견린과도 끈을 연결해 뒀다. 만에 하나라도 태자 주견심에게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면 즉각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황실 스승들 즉, 황제의 스승들인 삼공(三公), 삼고(三孤). 태자의 스승들인 태자삼공, 태자삼고가 그런 부류였다.


황실 스승 역할 외에는 담당 사무가 없는 탓에 직접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없으나 환관과 궁녀를 제외한 문무백관 중 황제와 태자를 가장 가까이서 그것도 자주 살필 수 있는 이들이니만큼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대단히 컸다.


가끔 다른 실직과 겸직하는 사례도 있었는데 그 경우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고 또 누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정2품 육부 상서 중에서도 요직이랄 수 있는 이부상서나 호부상서를 겸직한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황제 및 태자와 특별한 이유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황실 스승의 행사 또 정책에 그 누가 반대하겠는가. 반대했다가는 그날로 자기 정치생명이 끊어질 수 있는데.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양날의 검인 법이었다. 잘못 휘두르면 휘두르는 자도 베어 버리는 것이 권력이었다. 그런 권력을 시기한 이들이 간신으로 몰아서 탄핵하는 사례도 많았고, 재수 없으면 죽음을 앞둔 황제가 지극한 애정을 느껴왔다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정무적 판단을 통해 죽을 때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겨서 순장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 순장을 줄곧 대립해 온 정적들이 부추긴 사례도 많았다. 순장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것. 이는 최강의 차도살인지계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황제의 권력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는 계략이다.


황명으로 결정된 순장을 거부하는 방법은 없었다. 장례 기간 중 한번 지정되면 그걸로 끝. 한번 내려진 결정은 황제가 번복하지 않는 이상 불가역적이었다. 대상자가 울고불고 사정하든 발버둥 치든 무슨 수를 쓰든. 땅에 묻히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사실, 순장을 막을 방법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다음 황제의 결정이었다. 죽은 황제가 함께 묻어달라며 유훈을 남겼다고 해도 결정은 새로 즉위한 황제가 했고 필요하다면 이런저런 명분과 이유를 들어서 취소할 수 있었다. 물론, 선황의 유언을 불이행하는 결정 자체로 불충이고 불효지만, 명분만 적절하게 고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즉, 죽은 권력이 과거 그 얼마나 위력적이었든지 간에, 살아있는 권력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성년쯤 혹은 이후 정상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해 정통성을 갖고 즉위한 새 황제의 즉위 초기 권력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하늘의 명령, 천명이었다.


따라서 그런 새 황제에게 필요성과 가치를 인식시키기만 한다면 순장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처럼 권력의 본질이 양날의 검이고 황실 스승들은 그런 권력의 최상층을 점유한 이들이니만큼 권력의 향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런 그들의 주도로 아주 오랜만에 태자와 친왕의 합동 경연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장소는 황궁 동남부 문화전(文華殿).


경연은 태자와 친왕을 한자리에 모을 명분에 불과했다. 오늘 경연의 실제 목적은 태자와 친왕들의 장단점과 그 사례를 근거로 남겨두는 것이었다. 즉 같은 편으로 삼을 이유와 여차하면 팽개칠 이유도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스승들은 줄곧 지금과 같은 자리를 만들고자 시기를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웬걸? 주견심이 직접 황자들과 합동으로 경연을 하자는 게 아닌가. 제 아비처럼 태자와 친왕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며 단독 경연을 고수하던 이가 갑자기 합동으로 하자고 하니 의아하긴 했지만 어쨌든 대환영이었다.




맨 앞 열 좌측부터 태자 주견심과 덕왕 주견린, 견신까지 셋. 뒤 열에 수왕 주견주 포함 황자 넷이 나란히 앉았다.


피교육자 중에서는 태자 주견심과 덕왕 주견린이 답변을 도맡은 상황이었다. 황자 중 그 둘이 나이가 가장 많고 학업 기간도 가장 긴 만큼 두 사람이 답변을 주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견신은 평소 수업 때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따로 지목하여 묻기 전에는 입 열지 않았다. 따분한 표정으로 자리만 지키는 모습.


“······.”


견신에게 망신을 줄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한 주견심은 충효와 관련된 주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태묘대제 때 견신이 한 행동과 가장 밀접한 덕목이 그 둘이므로.


그러던 차에 마침 태자태사 이현이 충효와 관련되면서도 아주 민감한 주제를 꺼내 들었다. 무려 순장을.


“소신이 이번에는 순장(殉葬)에 대해 여쭙겠나이다. 순장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기탄없이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


이현은 과거 일부 관리들의 이간질에 넘어간 황제가 태자 주견심을 의심하던 당시 기지를 발휘해 주견심을 구했고 덕분에 황제와 주견심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일신의 학식과 경륜도 풍부했고 정파적 관점에서 중도 성향의 인물인지라 조정에서 따르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런 그라서 공공연하게 할 수 있는, 민감한 주제의 질문. 그에 주견심과 주견린은 물론 나머지 스승들도 이채를 띠었다.




순장은 군주가 죽으면 처첩, 노비 등 다른 사람을 함께 묻는 장례 방식이다. 함께 묻히는 사람은 멀쩡히 산 사람이었고 산 채로 묻거나 죽여서 묻었다. 대상자는 지극한 충성심과 애정으로 자원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군주가 생전에 유언으로 정하거나 군주의 사후 다음 군주와 종친, 고관들이 정했다. 대부분 강제로 묻었다는 뜻.


이는 군주가 사후세계에서도 같은 지위와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며 축원하는 데서 고안된 제도였고 군주의 권세와 위엄을 뒷받침하는 제도 중 하나였다.


제국의 경우 최우선으로 자녀가 없는 후궁들. 또 군주가 총애했던 관리들과 생전 부렸던 환관들 궁녀들을 매장 전에 죽여서 묻는 게 보통이었고, 그렇게 태조는 남녀 합쳐 산목숨 50여 명을 흙으로 데리고 갔다.


때문에, 후궁들은 순장을 피하고자 자녀의 생산에 매진했고 그녀들을 비롯한 순장 후보군은 황제의 붕어가 가까워지면 가슴을 졸였으며 순장을 앞두고 살려달라며 눈물 콧물을 쏟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무튼 찬성하자니 죄 없는 신민의 입장에는 잔인하면서도 흉악한 제도고, 반대하자니 선황들이 잘못했다고 하는 격에 더해 황제더러 홀로 저승을 찾아가라고 주장하는 셈이니 불충한 신하, 불효한 자식으로 비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직전까지 경쟁하듯 앞다투어 대답했던 주견심과 주견린도 이번에는 약속한 듯 침묵했다.


[······]


주견심이 충효와 관련된 주제를 원한 건 사실이지만 순장처럼 민감한 주제를 원한 건 아니었다. 견신을 포함한 나머지 다섯 황자도 마찬가지였다. 막내 주견패는 이제 두 살인지라 불참. 참석자 중 가장 어린 주견치도 이제 겨우 여섯 살이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답변 가능한 사람은 태자 주견심, 덕왕 주견린, 정왕 주견신, 수왕 주견주 넷. 더 잡아도 열 살에 가까운 주견택과 주견준 정도.


그처럼 줄곧 유창하게 대답해 온 주견심과 주견린이 일제히 침묵하자, 이현이 주견택과 주견준을 돌아봤다.


“······.”


답변을 주저하는 주견심, 주견린에게 먼저 물었다가는 황위 계승 서열 1, 2위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으니, 개중 어린 황자들에게 먼저 물음으로서 주견심 주견린이 답변을 준비할 시간도 주고, 둘이 모자란 수준의 답변을 내놓더라도 어린 황자들과 비교돼서 모자라지 않은 것처럼 비치게끔 상황을 조성하려는 것.


비열해 보이지만 황궁도 야생이었다. 야생에서 약하고 힘없는 짐승이 먼저 잡아먹히는 것은 자연의 이치고 이는 황궁에서도 그대로 통용됐다.


그런 이현과 눈이 마주친 어린 형제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애꿎은 서책을 뒤적였다. 눈칫밥으로 이현이 저들에게 물을 것을 알아본 것.


두 어린 황자의 예상대로 이현이 주견준을 지목하려던 그때.


“하오면 소신이 먼저···!”


앞 열에서 손이 올라왔다.


불쑥—


견신이었다. 이현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손을 든 견신의 권태로운 얼굴을 돌아봤다. 견신이 경연에서 손을 든 것은 그가 알기로 과거를 통틀어 이번이 최초였다.


“오오— 정왕 전하께서 한번 논해보시겠사옵니까?”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아우들이 뭘 알겠습니까. 평소 학문을 게을리한 이 사람도 그렇고.”

“······”

“괜히 아우들 난처하게 마시고, 그냥 하던 대로 태자 전하와 덕왕 전하의 고견이나 들어보시지요.”


그러지 않아도 평소 학문을 게을리하고 경연에 임하는 자세도 불성실했던 견신이 은근히 타박하자 줄곧 그런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현이 굳어진 표정으로 점잖게 받아쳤다.


“전하, 선현들의 지혜를 도구로 학문과 정사를 논해보자는 것이 어찌 난처한 일이겠사옵니까.”


그런 태도 변화를 접한 견신이 찰나 피식하며 실소했고 그를 목격한 이현과 스승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 내려다보던 이에게 받은 조소는 분노로 변하는 법. 이현과 스승들에게 견신은 신분상 황족이고 상전일 뿐, 학문 쪽으로는 비교 자체가 불가한, 수치인 하수, 아니 천것에 불과했다.


“스승님, 군도(軍刀)를 들어보셨습니까?”

“예?”

“다섯 살 아이에게 길이 두 자에서 세 자에 이르는 군도를 주고 휘두르라 하면 몇 번이나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들 수나 있겠습니까? 어린 송아지에게 쟁기를 얹어주면 밭을 과연 몇 결이나 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허면, 쟁기는 몇 근인지 아십니까? 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 말입니다. 여러 마리가 끄는 쟁기도 있긴 합니다만 그건 제쳐두고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과 어조. 그런데, 이현도 다른 학사들도 황자들도 모두,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들숨이 목울대에 걸려서 버둥거리는 것을.


“······.”

[······.]


이는 무관과 농부가 아닌 이상에야 소상히 알기 어렵고 따라서 이현과 사람들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요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여기 도를 들어본 사람은 몇 있어도 소를 쳐서 논밭을 갈아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평생 붓만 잡고 산 문사가 쟁기를 알 턱이 있나.


아무 대답이 없자, 당황한 스승들을 한번 쭉 훑어본 견신이 나머지 주장을 이어갔다.


“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가 기본 스물다섯 근입니다. 군도는 한 근 반쯤이고요. 그러니, 아이는 군도를 들지 못하고 송아지는 쟁기를 끌지 못합니다. 억센 논밭을 갈아엎을 수 없지요. 억지로 들고 끌게 하면 몸이 상할 것이고 들고 끌지 못해 창피를 당하고 매질을 당할 테니, 종래는 그처럼 저를 해친 군도와 쟁기를 미워하게 될 겁니다.”




이현은 얼어붙어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보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적당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


더불어 의문이었다. 주견신이 쟁기 무게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군도의 형태와 무게야 수련하면서 들어봤으니 알 수 있다고 쳐도 쟁기는 황궁에 실물이 없다.


그렇다면 농사와 관련된 서책을 읽어서 안 것이다? 주견신이 농사에 관한 서책을? 말도 안 되는 일. 제왕의 후예이자 친왕으로서 기본 중 기본이자 최우선시해야 할 사서삼경도 제대로 읽지 않은 이가 굳이 농사에 관한 서책을 찾아서 읽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게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잖은가.


게다가 선현의 말을 끌어와서 반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미할수록 그 논리 구조가 훌륭했다. 어린 황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예시와 비유를 통해 제 주장을 펼쳤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과거 선현들이 말한 바 있는 논리다. 예시로 든 소재가 다를 뿐, 고급 어휘와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나중에 몸이 자라서 들고 끌 수 있게 돼도 그러지 않으려 들지 않겠습니까? 아이 때 벌에 쏘여본 사람은 커서도 벌을 두려워하고 어릴 때 불에 데어본 사람은 커서도 불을 두려워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지금 순장은 두 아우에게 군도와 쟁기입니다. 제 삶도 제 죽음도 이해하지 못했을 아우들이 남의 죽음을 무슨 수로 이야기하겠습니까? 혹시나 저들에게 물을까 염려하며 가슴 졸이는 중일 겁니다. 저는 행여나 아우들이 저처럼 학문을 미워하게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대체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던 것인가? 학문을 진지하게 대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것인가?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인가? 대오각성?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한 성장이지 않은가?




그처럼 이현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견신이 이번에도 불쑥 공을 건넸다. 주견심에게.


“아니 그렇습니까, 태자 전하.”


이미 이현과 비슷한 심정으로 견신을 보고 있었던 주견심은 저를 불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 멍하니 앉아 있었고.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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