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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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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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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2화

DUMMY

12화




그런 아이에게서 칼을 빼앗고 무예를 빼앗았다. 아니, 그게 아니다. 이는 재능을 빼앗은 것. 기회를 빼앗은 것. 한 사람의 훗날을, 장래를 빼앗은 것이다. 하늘이 내린 것을.


주기진이 못났기에, 환관 왕진에게 휘둘리고 오랑캐의 포로로 붙잡히는 역사적 굴욕을 저질렀기에, 귀비와 맏이를 추종하는 세력을 온전히 통제할 수가 없다. 황제 주기진의 권위는 불씨처럼 미약하니까.


물론 사람의 일은 때가 되기 전에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까지 셋째를 억누를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셋째를 있는 그대로 총애했다면 그래서 셋째가 맏이의 그것과 비등한 인망을 얻게 됐다면, 귀비와 맏이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을.


셋째가 맏이만큼만, 둘째만큼만 그저 적당한 재목으로 세상에 왔다면 좋았으련만 이리 번민할 일도 없었으련만.


그래서 아직이다, 아직. 조금 더 살아있어야만 한다. 둘째와 셋째가 무사히 궁을 나갈 때까지, 둘 다 봉지로 떠나서 정착할 때까지 천순제 주기진은 살아있어야 한다. 둘째 셋째가 궁을 떠나고 난 뒤에, 맏이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한다. 그래야 둘째도 셋째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은 점점 깊어지고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종종 눈앞에 아른거리니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참으로 잔인한 계절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황족으로 태어난 죗값이다. 황족이라는 혈연은 너무도 잔인한 굴레고 족쇄다. 주 씨는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원해도 결코 할 수 없는 일 또한 많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다.


사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용상의 후보자로, 태생적 경쟁자로 태어난다. 멋대로 저를 추종하는 권신들과 이용하는 간신들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다. 또 여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주를 통한 정치 개입 시도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한미하고 보잘것없는 가문의 사내에게 시집가야 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인세의 비극.


황제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태묘와 사직의 보전이기에 그 비극을 막겠답시고 아이를 한둘만 낳을 수도 없다. 아이들은 낳는 과정에서 또 자라는 과정에서 종종 요절하기도 하고 또 불운한 사고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발생하니까. 그러므로 한둘만 낳았다가는 대가 끊어지기 십상이고 황제로서 자손 생산을 등한시한 죄는 자미원으로 가지 못할 대죄다.


아무튼, 셋째가 이번에 위험한 짓을 했다. 경연장에서 맏이를 논리로 제압한 것은, 그런 제압을 다른 것도 아니고 순장 철폐로 이룬 것은 아주 위험한 행위다.


분명 지금쯤 온 황궁이 셋째를 다시 보고 있을 것이다. 특히 비빈들과 환관들, 궁녀들은 셋째를 숫제 추앙하기 시작했을 터. 순장 철폐를 주장하고 나선 황자는 사상 처음이니까. 또 그들이 살고 싶은 것은, 순장을 피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생존본능일 것이므로.


이 녀석은 황궁 사람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환관 궁녀의 추종을 보란 듯이 단숨에 거머쥐었다. 환관과 궁녀, 한 명 한 명은 보잘것없는 시종에 불과하나 그들이 제대로 뭉치면 고관대작도 쉬이 대적할 수 없다. 그들이 황궁의 손발이요 눈과 귀이기 때문. 모든 곳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순식간에 저들 전부가 알게 할 수 있다. 그게 낮은 곳에 거하는 자들이 가진 무기다. 강력한.


어쨌든 셋째의 인망이 지금처럼 급격히 확대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귀비와 맏이가, 두 사람을 추종하는 세력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므로.


왜 그랬을까, 왜 그랬더냐.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돌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태 저를 잘 감추던 건 다 어쩌고 지금 와서, 하필이면 지금 시점에 그것도 순장으로 이처럼 두각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한 우연일까. 소년의 반항일까, 치기였을까.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는 분명 계획된 일이다. 이 녀석이 목적을 갖고 벌인 짓이다. 제 거처에서 글만 읽고 검만 휘두르는 녀석이, 밖에서는 허허실실 저를 감추는 녀석이 생각 없이, 목적 없이 지금까지의 태도와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을 리가 없다.


어찌할까, 어찌해야 할까.

하기야, 고민해 본들 무슨 소용일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정왕.”

“예, 폐하.”

“생각을 바꾼 연유가 무엇이더냐.”




견신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긴장했다.


“······.”


예상 밖의 독대를 시작으로 대뜸, 과거 순장을 논의한 바가 있었는지부터 물었다. 있다고, 누구 아무개와 논의한 바 있다고 답했다면 즉시 그 아무개와 함께 옥사에 갇혔을지도.


거기 더해 이제는 이중생활에 대해서 따져 묻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을 바꾼 이유를 묻는 것은 곧 이중생활을 알고 있다는 뜻. 아버지는 짐작대로 어느 정도는 진실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이었다.


그에 어제 문화전에서 한 긴장과는 비교 불가한 수준의 경계심이 치솟고 거세진 심장 박동이 침전 바닥을 두드린다. 이번 생의 아버지는 어제오늘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번째 삶에서 천륜으로 연결된 아버지의 생각은 첫 번째 아버지의 그것과 달리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는 모두 대화가 부족한 까닭.




전생의 아버지와는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날마다 같은 시각에 일어나 인사를 나눴고 어머니나 누이들이 한솥에서 지은 밥을 먹은 뒤 농기구, 소와 함께 집을 나섰다. 종일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다 해 질 녘에 서로의 그림자를 바짝 붙인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퍽 과묵한 사람이었으나 늘 함께였고 손발을 맞춰서 일했기에 대화도 적잖게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세월이 조금 흐르자 나도 형들 누이들처럼 아버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아버지가 오늘은 일을 어디까지 하려고 하는지, 언제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대려고 하는지 등.


그런 짐작은 비단 농사일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일상에서 어느 정도 가능했다. 아버지의 깊은 속내까지는 모르더라도.


가족은 하나였고 그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일상을 함께하고 공유하는 만큼 누구 하나의 일은 곧 가족의 일이었고 어느 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즉시 가족의 감정이 됐다. 형과 누이의 얼굴이나 몸에 자그만 흉이라도 지면 그들이 아무리 숨기고 회피해도 아버지는 단번에 알아봤고 이내 가족 전체가 알게 됐다.


우리 남매는 그 흉이 자기 얼굴에 난 것처럼 분노했고, 흉수를 찾아 마을을 들쑤셨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남매가 질 때도 있었지만 내가 열세 살을 넘기고 나서는 감히 우리 남매를 건드리는 이들이 없었다. 아무도 고 씨 집안 막내 아들. 소년 장사 고사를 당해내지 못했다.


혼쭐이 난 녀석의 집에서 촌장을 앞세우고 찾아오는 사례가 점차 많아졌다. 고 씨 남매가, 힘센 고사가 자기 자식들을 때렸다고.


그때마다 아버지 어머니는 부족한 살림에 묵혀둔 술과 재워둔 고기를 꺼내서 대접했고 이내 촌장과 두 집안이 어울려 마셔댔다. 나중에는 애어른 할 것 없이 얼큰하게 취해서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곤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남매를 모아놓고 말했다. 그때마다 나와 우리 남매는 혼날 것을 예상하며 긴장했으나 아버지는 한 번도 혼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여기저기 멍든 얼굴을 하고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남매들에게 말했다.


-잘했다. 나중에 아비 어미 가고 난 뒤에도 그리 뭉쳐서 살아라, 꼭. 밥 먹자.


그게 끝이었다. 집에서든 논밭에서든 칭찬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 그럴 때만 꼭 칭찬을 곁들여 당부하곤 했다. 잘했다고 누가 식구에게 못되게 굴면 다 같이 가서 갚아주라고. 당신들이 죽은 뒤에도 우애 좋게 살라고. 어제처럼 우리 남매가 일치단결해서 살아가라고. 식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는 죽는 법이라며.


음식을 내오던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웃으며 덧붙였다.


-너희 아버지가 자식들이 안 지고 왔다니까 좋으신가 보다. 그래, 누가 내력 없이 때리면 너희도 같이 때려줘라. 잘못 했으면 처맞아도 싸다만 세간살이 다 내줄지언정 내력 없이 맞고 들어오는 것은 못 참아. 알았지?


그런 순간들, 경험을 통해서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이해가 시작될 때쯤 헤어지고 말았지만··· 너무 일찍.


지금 이렇게 아버지를 보고 있는 데도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과묵했지만 분명 자식들을 사랑했던, 평생 논밭에서 쇠잔해 가며 모자란 칠 남매를 키워냈던 아버지, 우리 아버지···




반면 이번 생의 아버지는 전혀 달랐다. 잠도 늘 따로 잤고 밥도 늘 따로 먹었다.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날도 허다했다. 뭔가를 함께 한 기억이 손에 꼽을 만큼 적고.


그래서 아버지도 자식을 모르고 자식도 아버지를 모른다는 확신과 그로 인한 불신. 의심과 경계 등을 품고 살아가야 했다. 날마다 만나는 큰형은 조금 다르겠으나 아버지와 친왕들 사이에는 늘 희뿌연 안개의 강이 흘렀고 그 안개 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형체로 전체를 상상하며 지내야 했다.


지금처럼 가뭄에 콩 나듯이 만들어진 자리에서도 의도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대화가 강처럼 흐르고 호수처럼 고이기 일쑤.


그래도 핏줄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든 정체불명의 애틋한 감정이 건청궁과 거처를 연결하고 있는 느낌? 그런 어떤 감정이 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튼 아무래도 곧 헤어질 것 같다. 전생의 아버지와 열여섯에 헤어졌는데 지금의 아버지와도 그쯤 헤어질 것 같다. 어머니도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의 얼굴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번 생에서도 너무 일찍 헤어지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와.


전생의 아버지와도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석별의 정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영영 헤어지고 말았는데 지금의 아버지와도 그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억울하고 분해진다. 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 일인가.


아버지! 견신의 아버지!


전생의 아버지는 한평생 마소처럼 일만 하다가 못난 막내 아들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고, 지금의 아버지는 불과 아홉 살에 낳아준 아버지를 잃고 세상 물정 모를 나이에 버팀목도 없이 정치의 희생양이 돼서 모진 풍파를 겪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에 병을 앓으며 죽어가고 있다. 두 아버지 다 너무도 가엾은 사람들이다. 애잔한 인생들.


대체 아홉 살이 뭘 알겠으며 알아도 뭘 어쩌겠는가. 그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본 자가 아니라면 천순제 주기진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 감히.




어제의 순장은 그 원통함을 풀기 위해 선택한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기회에 올라탔고.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내 의도를 모를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의도를 모르듯이.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일은 내 욕심에서 시작한 일이므로. 영원한 자유,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내 욕심. 이 일의 목적 중에 아버지를 위한 목적도 있다는 생각마저도, 그게 진심일지라도 결국은 내 욕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충성이니 효도니 해도 결국 내 마음 편하겠다고 이러는 것이잖은가.


찰나, 도움을 얻고자 장인태감을 곁눈질하니, 홍순이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극도로 주의하라는 뜻. 환관의 언어다.


“···소자, 아둔하여 어인 말씀인지···”

“네가 이제 속이다 속이다 짐까지 속이려 드느냐.”

“황상 폐하, 황공하오나 소자는 정녕 어인 말씀인지 모르겠나이다.”


은근한 노기 섞인 목소리에, 그 내용이 기군망상(欺君罔上), 군주를 속이는 행위를 따져 묻는 것이기에, 생사의 기로로 여긴 견신이 이마를 단단한 바닥에 힘주어 찧었다. 이는 궁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방법이자 예법이었다.


쿵—


찢어진 견신의 이마에서 새어나온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침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주기진의 동공에 조금의 놀람과 슬픔의 빛이 교차했다. 끝에 가서는 씁쓸한 회한처럼 보이기도 했다.


“···멀구나, 이리도 멀다는 말인가. 정왕.”

“예, 폐하.”

“고개를 들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허리를 세운 견신의 날카로운 콧대를 타고 흘러내린 빨간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뚝— 뚝—


그 핏방울들이 주기진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 것일까. 노기 섞였던 목소리가 얼른 병자의 그것으로 돌아갔다. 달아나듯 그렇게.


“명이 있기까지는 고두(叩頭)하지 말라.”

“···예, 폐하.”

“뭣 하느냐.”


주기진이 눈동자만 돌리며 말하자, 환관과 궁녀가 얼른 견신에게 달려갔다.


[예이—]

[분부 받잡겠나이다.]


희디흰 천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세심하게 찍어냈다.


“정왕.”

“예, 폐하.”

“바른대로 답하라. 이는 황명이며 짐은 천자다. 너는 짐이 모르는바 너 또한 모르고, 너 아는바 짐 또한 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예, 명심하겠나이다. 하문하시옵소서.”

“어찌하여 생각을 바꾼 것이냐. 너 경솔하였다. 너 잊은 것이냐? 태자에게 반대하지도 말고 태자를 시기하지도 말며 태자보다 낫다는 것을 보이려 애쓰지도 말라 하였다. 짐의 경고가 오래되어 잊었더냐? 짐의 자식 중 태자보다 뛰어난 자식은 없다고 누누이 말하였거늘.”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자는 태자보다 낫지도 않사옵고 질시도 하지 않사옵니다.”

“허면, 어찌하여 생각을 바꿨으며 이 풍파를 일으킨 연유가 무엇이냐. 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주기진이 눈짓으로 승천문 광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가리켰다. 어제처럼 문무백관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태의원과 내각, 한림원을 벌하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견신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


환관들과 궁녀들은 점점 더 따끔따끔 살갗을 찔러오는 공기의 첨예함을 느끼며 조만간 전에 없던 사달이 날 것을 짐작 또 괴로워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할 만큼.


이내 뾰족해진 공기가 그들의 살갗을 점차 파고들던 그때, 견신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자,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청···? 말해보라.”

“마지막으로 아버지라 불러보는 것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장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부탁에 이번에는 주기진이 침묵했다. 예상치 못한 또 아주 대담한 부탁이기에, 그는 물론 홍순과 나머지 환관들 궁녀들까지 전부 움찔거렸다.


흠칫—


특히, 마지막이라는 대목이 주기진과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상을 안겨줬다. 모두가 생각했다. 마지막. 어떤 마지막을 시사하는 걸까. 주기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아니면, 더는 아버지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 그도 아니면 이참에 황제와의 밀접한 거리를 과시해서 정치적 지위를 다지겠다는 뜻?


주기진과 모두 견신이 말한 마지막의 의미를 궁리하느라 침묵했다.


[······.]


이내 고심하던 주기진은 결심했다. 견신의 의도는 모르지만 일단은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허락하면 가장 먼저 태자와 귀비의 귀에 들어갈 거고, 그 둘이 멋대로 확대해석할 게 분명하니까.


“불허한다. 이는 지금 정무를 논의하는 자리임을 잊지 말라.”


그러나 줄곧 남몰래 아들을 관찰해 온 그도, 다른 이들도 견신의 성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황자 이전에 무사인 자의 성품을.


무사의 결심은 검과 같다는 진실과 무사의 검은 본래 실없이 검집을 떠나지 않는 법이며 일단 뽑히면 무엇인가를 반드시 베어내고 마는 이치를. 뭔가를 베기 전에는 결코 검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철칙을.


“아버지.”

“!!!!!!”

[!!!!!!]


그처럼 바로 직전에 들은 황명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를 발음하는 견신을 보고 모두가 경악했다. 이는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 견신의 아버지.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소자, 앞으로도 한없이 또 끝없이 바라겠사옵니다. 아버지 폐하. 이제 와 소자가 어제 경연에서 그리한 것은 아비와 자식 간에 의리를 위해섭니다.”


그에 불경을 지적할 겨를이 없을 만큼 놀란 주기진이 홀린 듯 되물었다.


“···의리?”

“청컨대 순장을 철폐한 군주가 되어주시옵소서.”

“너···! 허면···?”


그 순간, 두 눈을 부릅뜨는 주기진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빛이 반짝였다.


“황공하오나 무도한 것들이 아버지를 두고 업적이 없는 천자라며 멋대로 비평하고 있사옵니다. 그를 견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사옵니다. 아버지 폐하께서 천자이시라는 점을 떠나서 폐하의 생애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헤아려 봐도 법도로나 인륜으로나 입에 담을 수 없는, 담아서는 안 될 망발이지 않겠사옵니까. 그만한 능멸이 또 없을 것인바. 소자, 그들의 목을 치고 싶은 심정이옵나이다.”


황제 본인 앞에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이야기가 나오자, 장내 가장 노회한 홍순이 발작하듯 끼어들었다.


“전하!”


황제를 면전에서 모욕한 것을 떠나서 사화(士禍) 즉, 떼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는 발언이기에.


“건청궁이옵나이다. 부디 말씀을 가려···!”


그런데, 주기진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홍순, 물러나라.”

“예이, 폐하.”


그에 염려 가득 담은 얼굴로 입을 다무는 홍순. 그의 내심에서는 이율배반적인 걱정과 흥분이 격돌하고 있었다. 조금 전 견신이 주기진에게 순장을 철폐하라며 권했기 때문.


지켜보는 환관들과 궁녀들도 마찬가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도 잊은 채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후욱— 후욱—


환관들은 조바심이 나는 몸을 꼬고 궁녀들은 부푼 가슴을 아래위로 들썩였다. 견신이 주기진에게 그것도 면전에서 순장 철폐를 권유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그들은 걱정은 둘째치고 마음속으로 견신의 응원을 시작했다. 과거 주견신에게 가졌던 편견은 저 멀리 떠난 지 오래였다.


물론 헛된 희망이라는 것은 안다. 저 멀리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우성도 그렇고, 주기진의 유약한 성정과 정치적 입지도 그렇고. 그러니 어림도 없는 일이겠으나 그럼에도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인간의 심리였다. 누가 알겠는가? 어제오늘 예상을, 그동안의 평가를 완전히 초월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정왕 주견신이 기적을 불러올지?


“견신, 순장 철폐가 어찌 부자 간의 의리란 말이냐.”

“수나라 시대 명맥이 끊기고 요와 금 시대에 부활했으나 잠잠해지던 것을 원이 부활시켜 금일에 이르고 있사옵니다.”

“계속해 보라.”

“제국의 아침을 여신 태조 폐하께서도, 나라를 제국으로 이끄신 태종 폐하와 성군이셨던 인종 폐하 선종 폐하께서도 하지 못한 일이 순장 철폐이옵니다. 그 일을 폐하께서 하실 수 있사옵니다. 이는 천하의 사찰과 공자의 후예들, 일만 환관과 삼만 궁녀의 바람이옵니다. 그중 환관과 궁녀는 궐 밖 백성들이 보기에 저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니 억조창생의 아비로서 환관 궁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은 곧 억조창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사실, 장내 누구보다 고무된 사람은 다름 아닌 주기진이었다. 그는 조금 전 아들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달라는 청. 또 업적이 없는 군주, 순장 철폐. 부자간 의리. 이를 모두 더하면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아홉 살 나이에 부황을 여의고 황제가 돼야 했던 빌어먹을 운명. 그런 사정을 쥐뿔도 모르고 헤아리지도 못하는 연놈들이 허튼소리를 늘어놓지 못하도록, 아버지를 칭송하도록 또 세상이 우러르는 열성조가 하지 못한 까닭이 욕심이든 권세 과시든 뭐든, 그 대단한 열성조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쌓고 떠나라는 의미다. 죽기 전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 녀석이 나섰다는 이야기. 일평생 후회와 죄책감, 수치심, 자격지심에 시달렸던 아버지가 그러한 마음의 짐을 떨쳐내도록 어제부터 판을 깔았다는 이야기다. 이제 겨우 열네 살 소년이. 오래전 그날, 경황도 없이 황제가 돼야 했던 아비보다 겨우 다섯 살 많은 아이가 줄곧 아비를 생각했다는 증거이자 아비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다는 이야기다.


저 아이가, 어리디어린 것이 알량한 명리를 쫓아서 저를 줄곧 매몰차게 대하고, 부자간의 정도 주지 않은 아비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리도 깊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다. 애달프다. 주기진이 여전히 어리석어서.


“물··· 물을 다오.”


주기진이 물을 찾자, 궁녀가 얼른 물이 담긴 다관을 들고 왔고, 주기진은 오래 갈증을 느껴온 사람처럼 허겁지겁 삼켰다.


물을 마시고 난 주기진은 한껏 고무되면서도 불현듯 접근하는 두려움과 대면해야만 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견신은 그런 아비의 시선이 머리 위 거기 침전 문으로 향하는 데서, 그러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데서 주기진의 심리를 꿰뚫었다. 아비의 마음속 오랜 병이 다시 고개를 디밀고 있음을.


그리하여 검을 뽑기로 했다. 그 병을 베어 넘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폐하! 성심대로 하시옵소서! 성심이 곧 길이 될 것이옵나이다!”


촤—아—앙—


마음의 검을, 무사의 기백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목소리에 실었다.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단숨에 제압하자 주기진과 홍순도 환관들과 궁녀들도 순간 벼락에 맞은 사람들처럼 떨었다.


“유림의 반절이 철폐를 반대할지언정 그들 반절이 찬성하는 일이옵고 천하 모든 사찰과 양민이 찬성하는 일이옵나이다. 또한 폐하께서 천자이시거늘. 어느 누가 감히 명분도 있고 도리도 있으며 억조창생이 지지하는 황명을 거스르겠나이까.”

[!!!!!!]

“그런 자가 있다면! 정당한 명분이나 논리 없이 성심을 거스르려 드는 자가 있다면! 소자가 그자의 목을 치겠나이다. 맡겨주시옵소서. 견신을 칼로 쓰시옵소서. 소자가 하겠나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백전노장에게서도 접하기 힘든 기백이 침전을 진동시키고 주기진과 홍순, 환관들과 궁녀들의 영혼을 압도, 뒤흔들었다. 천 년 제일 검사, 검자 고견신의 기백이.


그처럼 견신의 숨 막히는 기백에 시간마저 멈춘 듯한 건청궁.


[······.]


환관들과 궁녀들 몇이 완전히 압도된 나머지 가랑이를 적시고는 바들바들 떠는데 무언가 작심한 듯 두 눈을 빛내는 주기진이 일성을 내질렀다.


“홍순은 지금 즉시 봉천전에 비빈과 친왕, 정3품 이상 조정 백관을 부르라! 봉천전으로 갈 것이다. 정왕은 짐을 따르라!”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남은 생기가 반짝이듯, 회광반조(回光返照)처럼 생기를 발산하는 그의 음성이 밖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밀어내고 밖으로, 밖으로 길게 뻗어나갔다.


라— 라— 라—


아들의 그것과 닮은 목소리가.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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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무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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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5화 +18 24.07.23 11,031 432 23쪽
15 14화 +28 24.07.22 10,726 511 21쪽
14 13화 +31 24.07.19 10,742 526 23쪽
» 12화 +54 24.07.18 10,803 539 23쪽
12 11화 +9 24.07.17 10,978 395 19쪽
11 10화 +16 24.07.16 11,130 436 18쪽
10 9화 +13 24.07.15 11,331 401 17쪽
9 8화 +14 24.07.12 11,735 475 20쪽
8 7화 +22 24.07.11 11,877 490 17쪽
7 6화 +32 24.07.10 12,577 527 23쪽
6 5화 +24 24.07.09 13,079 494 23쪽
5 4화 +20 24.07.08 13,769 479 20쪽
4 3화 +14 24.07.05 15,627 441 23쪽
3 2화 +19 24.07.04 17,559 527 18쪽
2 1-2화 서(序) +38 24.07.03 18,447 641 25쪽
1 1-1화 서(序) +60 24.07.03 24,398 63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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