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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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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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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DUMMY

15화




그날 밤.

정왕 주견신은 만인의 구원이었다. 별빛의 강이 밤을 건너 새벽에 닿을 때까지, 황궁의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 곳곳에서 견신을 칭송하는 목소리들이 밤하늘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반짝였다.


아직 자녀를 낳지 못한 비빈들. 주기진의 병이 기적적으로 낫지 않는 이상 함께 밤을 보낼 수 없으니 자녀를 낳을 가능성도 없고, 그래서 순장될 운명이었던 여인들부터.


-그 정왕께서 이리 큰일을 하실 줄이야···!

-이런 인사인 줄 알았다면 정왕에게 시집가는 건데, 호호호!

-이제 열넷 친왕이 가엾은 생목숨 여럿을 살렸네요. 그이는 영웅이에요.


대대로 순장을 당해왔던 사례감 환관들도.


-고자 인생 사십 년 동안 이런 장부는 처음이라니까! 내가 말했지? 정왕 전하는 본색을 감추고 계신 거라고?

-하여튼 가벼운 고자 같으니. 그새 또 정인이 바뀌었어? 어이구 이놈의 고자야, 반골 기질이 통한 거지! 뭐든 태자 전하와 반대로 하는 거 몰라? 그게 운 좋게 얻어걸린 거지.

-반골? 이 죽어서도 양물과 따로 묻힐 고자가! 말하는 꼬락서니 좀 보게 이거? 운 좋게? 경연장에서 오간 이야기를 듣고 서도 그 주둥아리에서 운? 운이 나와? 감춰둔 실력이지, 실력! 다들 전하 말씀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못했다잖아!

-그러게? 뭐? 반골? 이 양물이 똥통에 빠져 절여질 고자가! 정왕 전하처럼 무욕한 군자가 또 어디 있어? 더럽고 치사하게 비전을 안 주잖아. 황제를 무공 순으로 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정해진 자린데. 그래도 군소리 없이 검을 쥐고 맨땅을 일궈보겠다고 도전하는 사내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내 말이! 천재로 났는데, 천재로 났다고 시기해서 비전을 안 주는데, 전하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장부가 세상에 어디 있어? 두고 봐, 전하 나중에 진짜 크게 된다. 큰 인물이 될 거야.

-암, 정왕 전하야말로 사내 중 사내지. 크으— 들었어? 처음에는 자기 무식하다고 할말 없다고 사양했다는 거야. 겸손의 극치지. 근데 태자태사가 끈질기게 물으니까, 그때는 그냥 앞뒤 없이 그냥 들이 받아버리는 거야! 순장을 폐지해야 합니다. 당장! 크으— 없는 양물이 떨려온다니까! 전하의 위엄이 장강처럼 흐르는군!

-이건 역사에 남을 거야 분명! 내 보기에 정왕 전하가 당대의 용이라니까. 이번 대의 용은 정왕 전하라고. 원래 애매한 중간 내기들이 시끄러운 법이지, 정왕 전하 같은 진짜들은 평소 조용하다가 이렇게 필요할 때 크게 한 방 딱! 생각해 봐. 태자나 다른 황자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없지? 없다니까? 근데, 우리 정왕 전하는 세상에 그 순장을 말 몇 마디로 철폐해 버리셨지?

-이 미친! 조용히 해! 사지가 따로 묻히고 싶어? 누굴 역모에 끌어들이려고!

-푸흐흐— 듣긴 누가 듣는다고. 사방 천지에 허연 분 처바른 고자들뿐인데. 아무튼 나 정왕부로 보내달라고 할까 봐.

-헹! 너 따위가 가능할 거 같냐? 이미 낮부터 사례감 앞에 줄 섰더라.

-궁녀들도 난리가 났다던데.

-그년들이 가장 꼴불견이야! 정신 나간 것들! 황궁 물도 선후가 있지, 안 달린 것들이 감히 우리 전하를 노려?


평생 궁에서 처녀로 늙어가거나 운수 좋게 황제의 아이를 낳아서 비빈이 되거나 순장을 당하거나. 그중 한 경우를 생애의 결말로 맞이해야 하는 궁녀들도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견신을 칭송했다.


-나 오늘부터 야사 하나 쓸까 봐.

-야사?

-응, 주인공은 우리 주견신으로.

-제목이 뭔데?

-망나니 전하가 위엄을 숨김.

-뭐야 그게? 최소 절륜황자 뭐 그런 걸로 해야지. 아무튼, 우리 전하 너무 멋져. 해보라, 그 맹세. 지금.

-그러니까! 진짜 미쳤어! 철부지 앤 줄 알았는데 어쩜 그런 위엄이! 아— 나도 정왕부로 가고 싶다—

-그르게, 궁에 남아 있으면 뭐 해. 독수공방으로 늙어만 가는데. 차라리 왕부가 낫지. 아— 평생 주견신 얼굴 보고 살고 싶다— 그러다 어느날 하늘이 도와서 전하 눈에 띄면 밤에···!

-이년이! 꿈 깨! 나 먼저!

-미친년! 내가 먼저! 네가 다음! 호호호!


그런 찬사는 이내 천하로, 제국의 힘이 닿는 강역 끝까지, 부지런히 뻗어나갔다.




#




여름은 늘 서두르는 것 같았다. 힘겹게 겨울을 밀어낸 봄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자리 잡는 것을 시기하듯 성큼성큼 다가오곤 했다.


덜 자란 꼬리를 흔들던 올챙이들도 어느새 개구리가 돼서 아래턱을 부풀렸고 산과 벌판은 무성한 녹음으로 속살을 감췄다.


그처럼 생명이 왕성해지는 계절에 황궁 역시 활력을 더해갔다. 환관들과 궁녀들은 종일 분주하게 쏘다녔고 문무백관도 외조와 군영을 바삐 오가며 맡은바 직분에 충실했다.


천순제 주기진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조 동쪽 구역.

여러 전각과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은 광장에서는 황자들과 황녀들의 합동 수련이 한창이었다.


녹색 비단에 오조룡을 수놓은 철릭 차림의 친왕들과 봉황을 수놓은 철릭 차림의 공주들은 덕왕 주견린의 지휘 아래 구룡대라도법을 수련 중이었다. 십 세 미만 황자들과 황녀들은 한쪽 구석에서 금의위 위사로부터 기초를 지도받는 중.


주견린의 구령에 맞춰 여러 자루의 도(刀)가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일초 금룡과하(金龍過河)!”

[금룡과하!]


구룡대라(九龍大羅)도법.

아홉 황룡과 그 움직임을 상상하여 창안한 도법은 무공의 여러 이치 중 힘 즉, 강(强)을 중심 이치로 삼았다. 따라서 대부분 키가 크고 허리도 굵직한 체격에 평균 이상의 장사로 태어나는 주 씨 사내들에게 최적화된 무예라 할 수 있고.


도법은 주원장과 그의 후손들이 종종 천생 신력을 타고나는 몽골 전사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태생적으로 힘이 모자란 사람은 대성할 수 없으나 근골이 일정 수준 뒷받침되는 이가 수련하면 형(形)과 의(意)가 힘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배가되도록 창안됐기 때문.


“이초 금룡양폭(揚瀑)!”

[금룡양폭!]


석 자 남짓 길이의 도에 구룡분승심법으로 쌓은 진기가 투사되지 않았기에 금룡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도의 궤적과 보이지 않는 선이 허공을 반듯하게, 이리저리 재단하는 중이었다. 이는 전원이 구룡분승심법을 익히지는 못한 탓에, 주견린이 진기 투사는 생략했기 때문.




주기진의 자녀들 7남 8녀 중 공력을 익힐 수 있는 체질로 태어난 사람은 총 아홉 명. 황자가 넷, 황녀가 다섯이었다. 주 씨 핏줄의 위대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 대의 열다섯 명 중 무려 아홉 명이나 공력을 익힐 수 있는 체질 즉, 기신(器身)을 타고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므로.


보통 뛰어나다는 혈족도 한 대에 일 할 내지는 최대 삼 할 이내에 그치는 데, 주 씨의 경우, 주원장부터 지금까지 매 대에서 오 할을 넘겨왔다. 진실로 대단한 수치.


아무튼 기신 즉, 그릇이 되는 육신. 줄여서 그릇으로 칭하는 신체를 소유한 황자들을 나이 순서대로 나열하면 태자 주견심, 주견린, 견신, 수왕 주견주.


그중 주견심은 불참했고 견신은 한쪽 구석에 앉아서 구경 중이었다. 주견주는 공력을 익히긴 했지만 구룡분승심법에 막 입문한 까닭에 아직은 병기에 진기를 투사할 수 없는 상태였고.




한편, 견신은 광장 한쪽 구석 그늘진 기단 위에 앉아서 형제자매의 수련을 관전 중이었다. 견신은 거처 밖에서의 위장을 그만뒀다. 순쟁 당시 진면모를 드러냈으니 위장의 소용도, 필요도 없어진 것.


그러나 무공은 계속해서 봉인했고 가족 포함 누구에게도 수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려져서 딱히 좋을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찮아질 게 확실하기 때문.


멀리서 보는 얼굴들에서 순수한 기쁨이 반짝였다. 내내 바랐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의 얼굴처럼 빛났다.


“···참 열심이다. 그렇게들 좋을까. 무공을 시작하는 순간, 번민도 시작되는 것을. 평범한 삶과는 영영 이별인 것을.”


도법의 형도 의도, 친형을 뺀 나머지는 전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만큼 엉망이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모두 주원장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자연스레 해결될, 저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주원장은 천재 중의 천재였고 기록에 따르면 아들 태종부터 증손자 선종까지 전부, 천재였으니까. 녀석의 피를 물려받았다면 최소한 기재는 될 것이므로.




머잖아 저이들과 곧 헤어질 테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저들 중 6할쯤이 이복남매들이다. 전생에는 없었던 배다른 남매들.


이번 생의 남매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게 무엇이든 전생 시절 느낀 그것보다 가벼웠고 또 옅었다. 남보다 조금 나은 정도랄까. 식구라고 하기에도 조금 멀게 느껴졌다. 차라리 전생 시절의 친우들과 전우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질 만큼.


일단 배다른 핏줄이라는 점도 있고 태생부터 경쟁 관계이기도 하고 또 배가 다르면 일상의 대부분이 분리되니 우애를 쌓을 시간이 모자라기도 했다.


거기 더해 어차피 성년이 되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될 것을 아는 탓에 더더욱 가족의 유대감이나 우애를 쌓을 기회가 적었다.




전생에는 큰형, 큰누나가 동생들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통은 부모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첫째를 양육함에 어느 정도 미숙한 면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또 첫째는 자라는 과정에서 바람직한 맏이의 역할을 종종 요구받으며 눈칫밥을 먹고 자랐고 일하기 바쁜 부모 대신 동생을 보살폈다. 동생의 잘못은 첫째의 잘못이었고 첫째는 동생에게 부모 대신이며 스승이고 동시에 친구였다.


칠 세 이전에는 남녀가 방 한 칸에서 자기도 했고 커도 시집 장가 가기 전에는 형제는 형제끼리, 자매는 자매끼리 함께 방을 썼다. 좁아터진 방에서 날이면 날마다 싸우고 부딪혔으나 그럼에도 우애는 아주 짙고 깊었다.


무뚝뚝한 큰형이 대신 개구리나 매미 따위를 잡아서 보여준 기억, 성질 괄괄했던 둘째 누나가 늘 툴툴거리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제 얼굴 닦을 때보다도 세심한 손길로 세수를 해주던 기억. 남매 중 누군가 막내에게 심통을 부리면 늘 넉넉하고 자애로웠던 큰누나가 바람같이 나타나서 심통 부린 동생을 혼내주고 서럽게 우는 막내를 안아줬던 기억. 그런 기억들은 고스란히 우애로 화했다.


그런 남매의 내리사랑을 받으며 어른이 된 막내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마을 밖의 삶에,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끔찍해지는 생지옥에, 사람이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장에 생애를 던질 수 있었다. 기꺼이.


가족을 대신해 투신한 막내는 첫 전투에서 가족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17년 동안 수천에 달하는 전우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그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막내는 그날의 결정을 원망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형들과 누나들을 평생, 내내 그리워했다. 미치광이가 돼서도 행여나 잊을까 걱정하며 지팡이 삼은 철검으로 흙바닥에 이름을 썼다. 이승의 마지막 날에도 열여섯 그날 마지막으로 본 얼굴들을 떠올렸고.


그리운 형들, 누나들의 얼굴을.




아무튼 이번 생의 남매들과도 이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전생에서는 홍건적의 강요에 의한 이별이었으나 이번에는 원해서 하는 이별이다. 너무 아픈 우애는 어쩌면 우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남매들과의 우애가 그리 깊지 않아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깊어서 다행이었다.


이별은 그리 멀지 않았다. 형이 초가을 산동으로 떠날 테니 상심한 어머니를 잠시 달랜 뒤 빠르면 초겨울에도 떠날 수 있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군···”


이렇게 되기까지는 또 한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궁은 순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귀비와 주견심 때문에.


순쟁 당시 수그러들었던 귀비와 태자도 그들의 추종 세력도 얼마 뒤 다시 고개를 들었고 정왕 주견신의 자유를 두고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친왕이 악한 마음을 품고 일을 벌여도 파악이 어렵고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도 있다는 논조로.


그들이 그때가 언제든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가 따질 거라는 예상은 했다. 만영과 신득이 수시로 소식을 물어왔기 때문. 귀비와 태자, 추종자들이 법도, 원칙, 관례 등 갖은 이유를 들어서 주견신의 자유를 반대하면서 조정의 중지를 모으는 중이라는 소식을.


아버지를 찾아갈 생각이 없다면 여럿이 모여서 여론을 조성하고 중지까지 모을 필요는 없으므로.


그에 진절머리가 나고 또 지겹다고 생각하던 참에 아버지가 먼저 일을 벌였다. 태자와 귀비에게 선수를 친 것.


순쟁이 있은 뒤로부터 아버지는 그 옛날처럼 자식들의 문안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건강을 고려해서 열흘에 하루 이틀 정도. 독대도 몇 번 더 했다. 아직 데면데면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요즘 종종 아버지와의 유대감을 느끼곤 했다. 부모와 자식으로 연결된 느낌을.


아무튼 어느 날은 아버지가 건청궁으로 큰어머니와 비빈들 자식들 모두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태자와 귀비에게 호통을 쳤다.


-이 미욱한 놈! 아우가 그리 두려우냐! 너 그리도 자신이 없느냐!


그에 당사자 주견심은 물론이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주견심을 문책한 사례가 없기 때문. 문책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독대할 때만 문책했다. 태자의 권위를 위해서.


그런데 비빈들과 동생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태자를 일개 신하 대하듯 신랄하게 꾸짖은 것이다.


-네 아우는 폐서인도 감수하겠다 하였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황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애초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냐? 한데 태자고 맏이며 형이라는 사람은 신하들과 작당하여 제 아비가 제 아우에게 준 상을 거둬들일 모의나 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너 아우조차 품지 못하는 그 그릇으로 정녕 제국을 경영할 수 있겠느냐? 간장 종지에 어찌 천하를 담을까!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듯 황궁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귀비와 태자 역시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것을 알면서 일을 벌였을 것이다. 여태 그래왔으니. 아버질 압박하는 동시에 아버지가 생각할 시간도 주고.


문제는 아버지가 순쟁 이전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순쟁을 기점 삼아 다른 사람이 된 아버지는 주견심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한동안 지켜본 것 같았다. 시험한 것 같았다. 결과는 주견심의 낙방이고.


-정녕 네 아우에게서 친왕 자리를 빼앗아야 그 직성이 풀리겠느냐! 무공은 진작 빼앗았고 이제 작위도 빼앗고 더 뭘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정녕 네 아우를 네 손으로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그 대목에서는 모두가 기겁했다. 한쪽에서 듣던 궁녀들도 어찌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정도였다.


-내 너를 어찌 믿고 용상을 넘겨줄까! 용상에 앉자마자 아귀처럼 아우를 잡아먹을 것이 뻔하거늘! 못난 놈! 천하의 옹졸한 놈!


주견심과 귀비는 그때 일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아버지가 여차하면 주견심을 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태자와 귀비는 즉시 납작 엎드려서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애원하고 사죄했다.


그처럼 두 사람이 애걸복걸했지만, 아버지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급기야는 구룡무맥의 전수 재개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지금 저기 수련 중인 주견주와 아우들의 얼굴이 밝은 까닭이다.




물론 정왕 주견신은 구룡무맥을 받지 않았고 그런 까닭으로 주견심은 더더욱 소인배로 전락하고 말았다. 맏이이자 태자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속좁은 사람이 되고만 것.


반면에 정왕 주견신은 분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황위에 아무 욕심이 없음을 다시금 확실히 해두고자 무맥을 포기하면서 황제와 황실을 배려한 호인으로 남게 됐고.


아무튼, 무맥을 익힐 수 있게 된 아우들은 지금처럼 열심이었고, 정왕 주견신은 여전히 검사로 남았다.


도법은 그렇다고 쳐도 고등한 심법까지 익히지 않은 건 뭐랄까. 원인 모를 기피 의지의 영향이 컸다. 주원장 그 녀석의 무공이라는 관념이 강해서일까.


일단은 계획한 대로 창안이 목표였다. 소림사의 달마와 혜능, 전진교의 왕중양, 화산파의 학대통 같은 사람들도 해냈는데 검자가 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궁을 떠나기 전에 초석은 마련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 여태 형에게 부탁해서 의서, 도경, 불경 등을 가져와 탐독해 온 것이고 근래 어느 정도 근접했다는 판단이었다.


“······?”




그때 문득, 상념에 잠긴 견신을 깨우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견신이 고개를 들어서 보니 주견린과 주견주였다. 나머지는 계속 도를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신아.”

“형님 전하! 수련은 아니 하시옵니까?”


웃으며 다가온 그들은 견신의 옆에 차례로 앉았다.


“나는 됐다. 네가 참 열심이다, 견주. 무맥은 어떠하냐. 흥미가 있느냐.”

“아주 재미있사옵니다. 근래 이것이 가장 재미있사옵니다. 형님 전하 덕분에 운 좋게도 무맥을 이어받았사옵니다. 아우들이 어찌 얻은 기회이옵니까. 마땅히 열심이어야지요. 형님 전하, 심법을 궁리 중이셨사옵니까?”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중이었다.”


주견주가 대답대신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자, 이번에는 주견린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었다.


“신아, 검법의 이름은 지었느냐?”

“아직입니다, 형님.”

“초식이 여덟 개라 했었던가?”

“예, 일단은 여덟 개입니다.”


초식이라기보단 의(意)가 여덟 개. 그런 사정을 따로 설명하진 않았다.


전생의 애병 고(鼓)를 통해 얻은 검법, 무명검법.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탓에 무명으로 남은 검법은 문자로 얻지 않았다. 의식과 체득으로 얻었다. 검법은 그날 고를 처음 쥐고 휘두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시때때로 새로운 길이 보였고, 그 길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이었다.


한때는 검자 고견신의 성과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시기는 짧았다. 그날 동굴에서 만난 존재의 안배 혹은 고의 묘용과 타고난 재능이 조화를 이뤘다고 볼 수밖에 없으니까.


그 결과물은 여덟 가지 이치고.


빠름, 쾌(快).

부드러움, 유(柔).

연속 혹은 면면부절, 연환(連環).

반탄력의 탄(彈).

무너트릴 붕(崩).

깨부수는 쇄(碎).

붙잡는 도(屠).

미혹하는 환(幻).


전장에서 체득으로 이룬 까닭에 정해진 형(形)도 없고, 형과 의를 결합하고 상대의 대응을 예상하여 대응하고 제압하는 일련의 움직임 즉, 투로의 모음으로 정리한 초식도 없다. 그래서 무명검법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는 이름을 지어줄 생각이었다. 전생에서 가져온 것 중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덟 개, 검법의 초식이 여덟 개···”


주견린이 잠시 골몰하는 듯 하자 지켜보고 있던 주견주가 끼어들었다.


“팔초··· 아···! 송구하옵니다. 아우의 생각에도 유치한 것 같사옵니다. 아니 들으신 것으로 해주시옵소서.”


그를 주견린이 싱긋 웃으며 받았다.


“팔초검···! 시도는 좋은 것 같다. 검법 이름이 거창할 필요는 없지. 천하에 이름만 번지르르 한 것이 얼마나 많더냐.”


사실이었다. 공자와 제자들의 사상 체계가 오랜 세월 땅 위를 잠식, 지배하면서 인간은 긴 이름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게 됐고 긴 이름을 짓는 세태가 유행처럼 번졌다. 한 예로 주원장의 시호는 무려 19글자였다.


성신문무흠명계운준덕성공통천대효고황제.


물론 사람 이름은 대상에서 제외. 사람 이름을 길게 지으면 일상생활이 불편하기도 하고 또 피휘(避諱) 즉, 황제의 이름에 들어간 문자를 피해서 지어야 하니, 전처럼 짧게 지었다.


사람들이 길게 지은 이름은 무공 이름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무공 이름은 나중에 지어진 것일수록 또 새롭게 생겨난 유파의 것일수록 길었다. 그를 일종의 과시 또는 허세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관점이었다.


“허나, 팔초는 초식이 여덟 개라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이름이 되겠구나.”

“···네, 형님 전하. 송구하옵니다.”

“송구는 무슨. 신아.”

“예, 형님.”

“팔문(八問)이 어떠하냐?”

“팔문이요?”

“그래, 무예에서 초식은 곧 상대에게 던지는 물음이 아니겠느냐? 어찌 극복할지, 어찌 대응할지, 초식의 감상이나 그 감상을 통해 검법과 나에게 부여한 의미까지도 말이다.”


별생각 없이, 별다른 기대도 없이 듣고 있었던 견신은 부여한 의미를 듣는 순간 전생에서 운명을 깨달았을 때. 그때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꼈다.


“!!!!!!”


전쟁이 첫 번째 운명이었고 낡은 수도 한 자루가 두 번째 운명이었으며 태조 주원장이 세 번째 운명이었고 죽어가던 당산나무가 네 번째 운명이었으며 미지의 존재가 마지막 다섯 번째 운명이었음을 깨달았을 당시 느꼈던 기분을.


그런 감정의 홍수에서 곱씹어보는 형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질문 그리고 의미.


검자 고견신은 평생 궁금해하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묻지 않았었나. 삶의 의미 혹은 가치 같은 관념들을.


그런 해석을 지금 접한 것과 전생 중 여덟 개 의의 이름만은 붙여둔 게 마치 백여 년이 흐른 오늘 연결되는 필연처럼 느껴졌다.


그에 홀린 듯이 하나씩 나열해 봤다.


팔문 1식, 초광(初光).

팔문 2식, 명풍(命風).


곱씹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팔문··· 팔문···”


잠시 그렇게 몇 번 곱씹던 견신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친형을 마주 봤다.


“형님, 팔문으로 하겠습니다.”

“음···? 그···리 쉽게 결정해도 되는 것이냐? 우형이 딱히 오래 고심한 건 아니라···”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그, 그래···! 네가 좋다니 우형도 좋구나.”


주견린은 평소 무덤덤한 동생이 귀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한껏 고무된 얼굴을 하고 바라보자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이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대단하면서 또 소중한 동생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형만 남아 있었다.


“좋구나, 신아. 그리 좋아하니, 우형도 정말 좋다. 정말 좋아.”




#




석 달 뜨겁게 달궈졌던 대지가 천천히 식어가는, 햇살도 유순해지는 수확의 계절이었다. 가을을 맞이한 황궁에서는 이 계절이 시작되면 이행키로 한 약속이 이행 중이었다.


오늘은 얼마 전 황실과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궁가의 여식과 혼례를 올린 주견린. 그가 신비와 견신의 곁을 떠나 산동으로 가는 날.


견신이 형과 이별하는 날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11화 오류 정정>

11화에 오조룡(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 황제 고유의 상징이라며 표현한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대명집례>에 따르면 황제부터 친왕과 군왕까지 오조룡이 그려진 복식을 입었습니다. 

관련 내용을 조선 세조실록에서도 확인했고 해당 표현이 15화, 무공을 수련 중인 황자 황녀의 복식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상충되어 오류를 바로잡습니다.


물론, 작품은 대체역사물이 아닌 무협 드라마물을 지향하며, 그 지향을 위해서 실제와 다르게 가공한 소재가 사용될 수도, 허구의 소재가 추가될 수도 있음을, 작가의 조사가 부족하여 소재가 실제와 다르게 사용될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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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무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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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18 24.07.23 11,030 432 23쪽
15 14화 +28 24.07.22 10,726 511 21쪽
14 13화 +31 24.07.19 10,742 526 23쪽
13 12화 +54 24.07.18 10,802 539 23쪽
12 11화 +9 24.07.17 10,978 395 19쪽
11 10화 +16 24.07.16 11,130 436 18쪽
10 9화 +13 24.07.15 11,331 401 17쪽
9 8화 +14 24.07.12 11,735 475 20쪽
8 7화 +22 24.07.11 11,877 490 17쪽
7 6화 +32 24.07.10 12,577 527 23쪽
6 5화 +24 24.07.09 13,079 494 23쪽
5 4화 +20 24.07.08 13,769 479 20쪽
4 3화 +14 24.07.05 15,627 441 23쪽
3 2화 +19 24.07.04 17,559 527 18쪽
2 1-2화 서(序) +38 24.07.03 18,447 641 25쪽
1 1-1화 서(序) +60 24.07.03 24,398 63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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