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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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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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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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프란디아의 가장 서쪽 변방의 광활한 트란베스트 지방은 원래 호튼족의 땅이었다.




300여년 전 크레타온 1세가 프란디아 왕국을 세우면서 초원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호튼족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뒤 욱일승천의 기세로 트란베스트로 침입한 프란디아 군대에 호튼족은 속수무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조상의 땅을 잃을 위기에 처한 호튼족의 저항은 거셌다. 수백 개의 작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호튼족으로서는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프란디아의 군대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재빠르게 트란베스트를 점령한 프란디아는 항복한 호튼족에 대해서는 관용정책을 펼쳐나갔다. 광활한 트란베스트를 프란디아 이주민으로만 채우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일부 호튼족은 프란디아의 지배를 인정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배자에 협력하는 삶을 택했다. 일부는 굴종의 삶보다는 자유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선택, 침략자에 맞섰다.




하지만 힘의 균형으로 볼 때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프란디아에 유리했다. 호튼족은 점점 더 서쪽으로 밀려났다.




프란디아의 영토확장은 크레타온 1세 사후에도 몇 년 더 지속됐다. 항전을 택한 호튼족은 비옥한 트란베스트 지방의 저지대를 모두 잃고 피로스 산맥 너머 고원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지대에 정착한 호튼족의 지상과제는 '조상의 땅 수복'이 됐다. 트란베스트는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는 신성한 땅으로 묘사됐다. 이민족의 지배에 신음하고 있는 호튼족을 해방시키는 게 민족적 사명이 되었다.




고지대 호튼족은 틈만 나면 피로스 산맥을 넘어 트란베스트를 침략하면서 프란디아인과의 크고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프란디아는 처음 트란베스트를 지배했을 당시만 해도 적극적 이주정책을 펴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땅으로부터 얻는 이득이 생각보다 적은 데다 호튼족의 침략이 지속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자 점점 관심이 식어갔다.




결국 트란베스트로 이주한 프란디아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호튼족에 맞서야 했다. 이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트란베스트는 프란디아의 영토였지만 주민들은 프란디아에 대한 소속감이 미약했고,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된다.


프란디아인들의 트란베스트에 대한 관심은 식어갔지만 호튼족은 반대였다. 고지대의 호튼족들은 호시탐탐 트란베스트의 수복을 노리며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트란베스트 최대의 위기는 프란디아의 국왕 옥타비우스 1세가 재위하던 860년 경 찾아왔다. 오매불망 고토 수복을 외치던 호튼족이 통일왕조 발리마츠 왕국을 세운 후 노도처럼 트란베스트를 침략해온 것이었다.




당시 호튼족의 발호는 트란베스트 지방뿐 아니라 프란디아 왕국 전체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호튼족의 침략에 놀란 프란디아 왕실은 지방 영주들을 설득해 중앙 정부 산하 상비군을 마련하게 됐다.




또 트란베스트 입장에서는 호튼족 국가로 편입과 독립, 이후 다시 프란디아로 합병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등 프란디아 내에서 갈등의 씨앗이 됐다.




원래 호튼족은 수백 개가 넘는 부족들이 넓은 초원에서 유목과 수렵을 하며 살아가던 기마민족이었다. 부족의 발원지는 대륙의 북부 발리마르 지역이었다. 크라우족의 팽창으로 발리마르를 잃고 떠밀리듯 남서쪽으로 내려와 800여년 전 트란베스트 땅에 정착했다.




호튼족은 원래 살던 대륙 북부에 비해 훨씬 온화한 기후의 트란베스트에 와서도 발리마르에서의 생활방식을 유지했다.




호튼족은 오랜 기간 독립된 부족으로 살아온 탓에 각각의 개성이 뚜렷했다. 게다가 트란베스트에 정착한 뒤 500년 동안 주변 강력한 외적이 없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상 다른 부족은 정복의 대상이었지 통합하고 연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프란디아의 침략으로 수백년 동안 일궈온 터전인 트란베스트에서 쫓겨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작용-반작용의 원리처럼 외부 충격이 강해지자 내부 응집력도 높아졌다. 단 한 번도 일원화된 민족적 정체성과 정치체제를 갖지 못했던 호튼족의 민족의식을 프란디아가 일깨웠다.




기마민족으로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고 생활한 탓에 호튼족은 개개인의 전투역량은 높았다. 소규모 전투에서는 우수했으나 수천 수만 명이 맞붙는 전쟁에서는 그 한계가 뚜렷했다.




강력한 외부의 적을 만나자 대규모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부 부족들끼리 연합을 하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연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연대의식은 당연하게도 저항을 택한 피로스 산맥 너머 고지대의 호튼족 사이에서 강했다. 항복하고 트란베스트 거주를 택한 호튼인들은 프란디아의 민족융합정책에 편승해 자연스럽게 프란디아화 했다.




고지대 호튼족들 사이에 어느덧 민족의식이 고조되되면서 통일왕조에 대한 필요성을 많은 부족들이 공감하게 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통일왕조를 세우기에 부족했다.




부족들을 통합하고 이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영웅이 필요했다.




이들 부족을 통합하고 하나의 통일왕조를 출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도들란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난 이후였다.




부족장의 큰아들로 태어나 부족의 후계자로 자란 도들란은 프란디아와의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으면서 갑작스럽게 부족장이 됐다.




도들란은 뛰어난 무장이었던 아버지의 전투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프란디아 군대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자 전쟁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도들란은 대규모 군사끼리 맞붙는 전쟁에서 개개인의 전투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즉 조직화되고 체계적인 군대를 거느려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이를 위해서는 백여 개의 부족으로 산재한 호튼족의 통일이 우선이었다.




842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부족장이 된 도들란은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설득으로 부족들을 하나씩 통합해 나갔다.




호튼족 최대 부족의 수장이었던 루테가는 일찌감치 도들란의 능력을 알아봤다. 자신의 딸을 도들란에게 출가시킨 후 도들란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통일전쟁을 시작한 지 17년 만인 859년 도들란은 마침내 고원지대에 산재한 호튼족을 통일해 최초의 왕조를 열었다. 국명은 발리마츠로 정했다.




발리마츠는 호튼족이 원래 발흥했던 발리마르에서 이름을 따왔다. 트란베스트뿐 아니라 발리마르까지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담은 국명이었다.




통일왕조를 세운 도들란의 최우선 목표는 프란디아에 빼앗긴 조상의 땅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트란베스트는 호튼족을 잉태한 어머니의 땅으로 묘사됐다. 트란베스트를 수복해야 되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호튼족의 사명이었다.




십수년 간의 통일전쟁을 거치며 탄생한 발리마츠는 출범부터 전투경험이 풍부한 10만명의 기마군단을 거느린 군사강국이었다.




도들란이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 아래 일사분란한 체계를 갖춘 군대는 예전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조상들의 땅을 되찾아 호튼족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명징한 목표도 있었기에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860년 1월 새해가 밝자마자 도들란은 '고토회복'을 외치며 발리마츠의 10만 기마병과 함께 피로스 산맥을 넘었다.




도들란은 10만 기마병을 4개 군단으로 편성해 1개 군단을 후방에 두고 3개 군단이 각각 3개 방향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발리마츠의 기마병은 개전 초부터 프란디아의 군대를 압도했다. 개인 기량에 기대어 전투에 임하던 예전의 호튼족 군대가 아니었다.




도들란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발리마츠군은 파죽지세로 3월 중순이 됐을 무렵 조상들이 빼앗긴 땅을 대부분 수복했다.




기세를 탄 발리마츠 군대는 우터베써강을 넘어 트란베스트 경계를 벗어나 프란디아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란디아를 침공했을 당시만 해도 호튼족의 노략질로만 여겼던 프란디아 왕실은 화들짝 놀랐다. 전령을 통해 들어오는 소식은 프란디아 왕실을 근심스럽게 했다.




프란디아 왕실은 부랴부랴 각 지방 영주들에게 군사 동원령을 내려 발리마츠 기마대의 발을 묶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보병 중심의 프란디아 군대는 발리마츠 기마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마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프란디아 군인들의 주검만이 널부러져 있었다.




트란베스트와 인접한 다트마르센주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자 도들란의 군대는 어느덧 프란디아의 수도 벨라시타를 목전에 두게 됐다.




발리마츠 기마대의 진격 속도로 볼 때 일주일이면 충분히 도달할 거리였다.




늑대를 숭상하는 호튼족 기마대는 프란디아 침략 당시 붉은색 머리띠와 붉은색 견장을 휘날리며 달렸다. 호튼족 기마대를 멀리서 바라봤을 때 온통 붉은색으로 보였기 때문에 프란디아에서는 이를 '붉은 폭풍'이라고 불렀다.




붉은 폭풍이 조만간 수도 벨라시타까지 덮칠 것으로 보이자 프란디아 주민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부는 피난을 떠났고 남은 자들은 마을 회당에 모여 펜타스틱을 붙잡고 하늘의 신께 기도를 드릴 뿐이었다.




이때 거침없이 달리던 도들란의 군대는 벨라시타를 목전에 두고 결정적인 전략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그대로 진격했다면 벨라시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도들란은 프란디아 내부로 너무 깊숙히 들어오는 바람에 병참이 너무 길어진 것을 걱정해 이를 점검하고 기마대의 휴식을 준다는 이유로 클리베르트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덕분에 프란디아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각지의 영주들이 거느린 군대가 클리베르트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사실 도들란은 개전 이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으면서 프란디아 군대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이들이 뭉쳐서 대항한다 하더라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작은 전투를 여러 번 이기는 것보다 건곤일척의 대결을 통해 단숨에 프란디아를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프란디아의 영웅 올리베르 폰 크롬벨 백작 이 등장하면서 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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